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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다는 이한신 목사, 20년전 군대에서 잠시 만났던 그 친구가 찾아 왔습니다.(지난 4월 <오마이 뉴스>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1년에 한번씩 모인다는 선교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고 합니다.
선교모임 일정을 다 마친 그는 아내 안은경씨와 동욱(17세), 라미(12세). 라미는 외국식 이름이 아니라 동그라미 할 때 ‘라미’라고 합니다) 두 아이들과 함께 우리 집에 찾아 왔습니다.
그는 여전히 마른 체구였습니다. 그에 비해 나는 그가 놀랄만치 살이 쪄 있었습니다. 하는 일이 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좌판 두들기는 일이라서 ‘똥배’가 나온다고 스스로 핑계를 대곤 하지만 나는 그에 비하면 여러 모로 살찐 돼지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서로가 이메일을 통해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었는데 막상 마주 대하고 보니 이상하리만큼 낯설었습니다. 서먹서먹했습니다. 몹시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대했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감흥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0여년만에 만났는데, 두 분이 뜨겁게 포옹해야 하는 거 아녀요?”
이 목사의 아내와 내 아내가 그 이상한 만남에 흥을 불어넣어 주기 전까지 나는 아주 낯설게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를 깊이 껴안으면서도 역시 기대했던 만큼의 감흥이 오지 않았습니다.
종교적으로 다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딱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의 그 감흥은 다 어디로 가고 왜 그렇게 낯설게 다가왔는지 아직까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를 억지로 끄집어 짜 맞춰 보면 그 낯설음은 그가 선교사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평소 선교사들을 싸잡아 불신하고 있는 편입니다. 그를 만났을 때 혹여 내가 싫어하는 그런 선교 활동을 하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서로가 살아온 흔적들을 꺼내 놓다가 나는 결국 내 안에 있던 선교사들에 대한 불신을 꺼내 놓았습니다. 선교사들을 싸잡아 말할 수 있을 만큼 그가 편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형, 나는 솔직히 말하면 선교사들을 불신하고 있습니다, 선교사 하면 성경을 앞세우고 권총을 들이댔던 제국주의자들이 먼저 생각납니다. 약소국가들, 순수하고 가난한 나라를 침탈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선교사들을 이용했던 제국주의자들요.”
“나도 그걸 인정합니다.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그랬고, 또 스스로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용당하기도 했지요. 과거와는 다르지만 지금도 역시 어떤 면에 있어서 그러고 있는 선교사들도 있다고 봐요. 하지만 지금은 예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어요.”
그는 선교사에 대해 부정적인 내 생각의 많은 부분들을 인정했습니다.
“처음에 나도 그런 적이 있었지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핑계삼아, 나도 모르게 내가 갖고 있는 한국적인 정서를 그들에게 주입시키려 했으니까요.
나는 그의 솔직함에 내 앞에 놓여 있던 그에 대한 불신의 벽 하나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고해성사를 받아 주는 신부님 앞에서처럼 그동안의 내 삶의 흔적들을 시시콜콜 늘어놓았습니다.
그는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오만과 편견을 벗어 던지지 못하고 살아온 내 삶의 자세들을 묵묵히 다 받아 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짐짓 10여 년 만에 만난 반가움에 들떠 주절대다가 문득문득 그를 보았습니다.
젊은 날에 만났던 그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무거워 보였지만 지금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치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자신을 짓누르는 어떤 믿음에 대한 의심을 벗어 던진 수행자처럼 한결 가벼워 보였습니다.
우리는 술잔 대신 수십 잔의 녹차를 우려내면서 종교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지금의 기독교인들, 특히 목회자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했던 그들 초기 기독교인들의 청빈함을 배워야 할 것이라는데 동감했습니다.
이한신 목사, 그는 1989년 목사 안수를 받고 경기도 용인 땅에 개척교회를 세워 목회활동을 하다가 1990년부터 1994년까지 필리핀과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 후 말레이시아로 선교지를 옮겨 지금까지 생활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말레이시아 복음 신학대학’ 교수로서 성경과 신학 선교학, 전도학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신학대학 교수들의 월급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거기서 단 한 푼의 강의료도 받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보수를 받기보다는 오히려 학생들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할 때가 더 많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이 속해 있는 선교단체로 부터 보조금도 받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하고 있는 것일까? 아내는 이 목사네 생활비 문제를 몹시 궁금해했습니다. 갑부의 자식도 아니고 대형교회를 대물림 받은 것도 아닌, 단지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이한신 목사였습니다. 헌데 선교 단체에서도 신학대학에서도 단 한푼의 돈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먹고사는가 그것이 내내 궁금했던 것입니다.
이 목사는 그냥 하느님이 다 알아서 해주신다고 웃고만 있었습니다. 궁금한 게 있으면 견디질 못하는 아내가 이 목사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국내 후원자들이 좀 있나 봐요?”
“그분들이 도와 주시기 때문에 먹고 살 수 있지요. 교회단체나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목사님들, 그리고 친형제 자매들과 개인적인 후원자들이 보내주는 고마운 돈으로 살고 있는 셈이지요.”
이 목사네 한달 생활비는 아이들 교육비를 제외하고 우리나라 돈으로 30∼40만원(월세포함)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 네 식구가 60만원 정도로 살아가는 것과 거의 같은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목사와 우리의 생활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우리는 생활비 60만원 정도에서 얼마간의 돈이 남게 되면 가족 여행을 떠나곤 하지만 그는 생활비를 쪼개서 원주민들에게 나눠주게 될 옷가지며 의료품 등을 구입하는데 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단순한 선교 활동만이 아닌, 진실로 나눔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이든 그들의 삶에 필요한 것들이라면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게 되는 것인데, 이런 일들은 말과 교육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들과 함께 같이 살아가면서 실행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어요. 왜냐면 나는 나의 소유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까. 내가 가진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이 나에게 나누어 준 것들이라 할 수 있지요.”
그는 자신에게 들어오는 재물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눠 써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저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아니, 아주 가끔씩 교회에 갈 때는 잠깐동안 ‘기독교인’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하느님은 어디에든 다 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에든 하느님이 계시기에 그 나라, 그 민족의 고유한 전통문화나 종교를 그대로 내버려두자고 하는 주의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것들보다 의미가 있고 소중한 것이니까요. 그들의 문화며 종교 또한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태어 선교사들이 나서 종교를 개종시키거나 주입시킬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들이 지켜온 것들을 내버려두고 그들에게 단지 사랑을 베푸는 것, 이것이야 말로 하느님의 뜻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목사는 선교사 활동에 대해 불신하고 있는 내 생각들을 바꿔 놓으려 하질 않았습니다. 나는 그런 이 목사가 좋았습니다. 내가 10여년 동안 그를 찾아 헤맸던 것도 바로 그런 편안함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다음날 아침부터 장마비가 쏟아져 살결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공기가 싸늘했습니다. 나는 반바지를 입고 있는 그에게 긴 바지를 권했습니다. 더운 나라에서 생활하던 그가 나보다 더 추위를 탈 것 같았습니다. 그는 모처럼 만에 한국의 싸늘한 날씨를 즐기고 있으니 괜찮다고 사양합니다.
그의 아내 안씨가 거들고 나섭니다.
“우리 목사님은 여름 옷 몇 벌이 전부랍니다.”
솔직히 나는 이 목사를 잘 모릅니다. 나는 이 목사와 달리 법당이든, 이슬람 사원이든 그 어디에든 똑같은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지만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절대적인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때문에 나는 기독교인들의 절대적인 믿음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 목사에게서 하늘을 섬기고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말레이시아로 다시 돌아가면 그는 보루네오 섬의 한 지역인 ‘부르나이 왕국’의 어느 밀림 속으로 들어가 그곳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고 합니다.
언제까지 그곳에 머무를 것인가 묻자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겼다고 합니다. 신을 믿고 신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맡기고 사랑을 베풀고 살아갈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목사에게는 두 아이가 있습니다. 한국의 교육제도로 말하자만 큰 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 작은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 큰 아이 동욱이는 다섯 살, 특히 작은 아이 라미는 6개월 될 무렵 강보에 싸여 한국을 떠날 그때부터 줄곧 외국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목사네가 말레이시아에 정착하고부터 두 아이는 줄곧 부모와 떨어져 필리핀에 있는 선교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말레이시아에서 거주 비자를 받을 수 없어서, 결국 선교사 자녀들이 다니는 필리핀 학교로 보내게 되었지요. 다행히 필리핀에 있는 선교 학교는 국제 학교로 등록이 되어 있어 학생들의 비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말레이시아에도 정부에서 인정하는 국제 학교가 따로 있다고 합니다. 그 국제학교는 주로 일반 사업을 하거나 외교관이나 상사 주재원들의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는데 학비가 너무 비싸 보낼 형편이 못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목사네 아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학비와 기숙사비가 적게 들어가는 필리핀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필리핀 선교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 두 아이들과는 1년에 두 차례, 방학 때마다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그때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한국어와 한국의 문화 등을 배우게 된다고 합니다. 동욱이와 라미는 10년 넘게 외국 생활을 하고 있지만 우리말을 잘합니다. 잘 할 정도가 아닙니다. 외국에서 오래 동안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잘합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우리는 이 목사네 아이들이 연주하는 흥겨운 피아노 소리에 빗소리를 곁들여 가며 점심나절까지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놀면서 외국의 교육과 한국의 ‘살벌한 교육 현실’을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이 목사의 아내 안씨의 말을 듣다보니 한국의 피아노 교육은 즐기기 위해 배우기보다는 학교 시험에 대비한 음악, 콩쿨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기 위한 음악, 세계 음악사에 이름을 빛내기 위한 음악 공부처럼 여겨졌습니다.
아내는 월세를 전전하고 있는 이 목사네가 피아노는 물론이고 그 흔해 빠진 소형 전자 피아노조차 없다는 것을 알고 애지중지 모셔두고 있던 전자 피아노를 꺼내 왔습니다. 지금의 중고 피아노를 얻어오기 몇 해 전, 피아노를 대신하기 위해 전자상가에서 중고로 구입한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그 중고 전자 피아노를 이 목사네에게 기분 좋게 내주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그는 처음에 왔을 때처럼 반바지에 낡은 티셔츠, 그 모습 그대로 떠났습니다. 한국에 와서 그는 목사의 권위가 서지 않는 그 남루한 옷차림 때문에 몇몇 근엄한 목사님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당당했습니다.
이 목사네 식구들이 쓸쓸히 떠나 보내고 나서 아내가 혼잣말로 툭 내던졌습니다.
“에이구, 대형교회 목사님들은 그 많은 헌금 받아서 다 어디에 쓰고 계시나.”
나는 친구로서 이 목사의 신념에 찬 행동을 돕고 싶었습니다. 아내가 내 의중을 간파했는지 돈벌이가 넉넉한 달에는 단 돈 만원이라도 보내자고 제의해 왔습니다. 말레이시아 밀림 속에서 살아가는 원주민들에게 보내지게 될 약값에 보태고 싶답니다. 그런 마음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생활비 60만원으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마음을 내 준 아내가 무척이나 고마웠습니다.
내가 만난 이 목사는 입으로만 하느님 말씀을 떠들어대는 목회자는 아니었습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외면하면서 십일조금이나 꼬박 꼬박 받아 챙기는 목회자들, 교회 건물을 보다 더 넓고 더 높이 쌓아 올리고는 것이 하느님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식의 믿음을 강요하는 목회자들과는 분명 달랐습니다.
그는 또한 정치 이데올로기의 하수인 역할을 자청하고 나서는 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교회 안에 모든 것을 가둬 놓으려 하는 교회주의 적인 편협 된 신학의 틀을 깨고자 하는 좌파 신학자였습니다. 가진 재물 없이 월세 방을 전전하면서 종교적인 신념을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청빈한 목회자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선교사이면서도 제국주의의 선봉대 역할을 했던 선교사들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또 감싸안고 있었습니다. 젊은 선교사들조차도 꺼려하고 만류하는 위험천만한 밀림 속으로 터벅터벅 들어가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을 펼쳐나가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떠난 자리는 쓸쓸했습니다. 그가 우리 집을 찾아 왔을 때처럼 쓸쓸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를 만났을 때 이미 이별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만나면 곧바로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군대에서의 4주간의 짧은 만남, 그리고 10여년 동안 찾았던 친구, 말레이시아 그 먼 나라에서부터 날아와 1박 2일간의 짧은 만남, 나는 그 짧은 만남 속에서 10여년 동안의 세월을 되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가 살아온 ‘나눔의 시간’에 비해 내 시간들은 얼마나 초라했던가? 나는 그렇게 이 목사가 떠난 자리에서 내 초라한 시간들을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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