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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 물이 불어나 계곡물이 박진감있게 휘몰아친다
비로 물이 불어나 계곡물이 박진감있게 휘몰아친다 ⓒ 우동윤
아버님 생신으로 한자리에 모인 형제들과 사촌들이 가족 야유회를 가기로 했고, 장소는 옥산서원이었다. 한 주 앞으로 다가온 여름휴가가 있지만 각자 사정으로 같이 휴가를 즐기지 못하니 짧으나마 일요일 한나절을 함께 보내기로 한 것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1491∼1553) 선생을 제향하고 후학을 교육하기 위한 옥산서원. 유적지라는 선입견 때문에 가족 나들이 장소로는 별로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속으로 장소 선정에 대한 불만을 가졌지만, 도착해서 본 그 곳은 그야말로 기대이상이었다.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기다렸다는 듯이 뜨거운 햇살과 습도 높은 기후로 짜증을 느끼고 있던 차에 이리저리 휘몰아치며 바위 사이를 질주하는 시원한 물줄기에 그동안의 짜증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듯 했다.

사실 나만 몰랐지 포항, 안강 등지에 사는 사람들에겐 꽤 유명한 곳이라 했다. 출발 전에 비가 와서 망설였지만 일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가족 나들이란 생각에 계획대로 강행하기로 했던 것이 주효했다.

간간이 이슬비가 내린 탓인지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키 큰 나무로 숲에 들어가 자리를 펴고 앉으니 그까짓 이슬비 따위야 감히 범접하지 못했고, 정오 무렵이 지나면서부터는 날은 개었지만 해는 나오지 않는, 그야말로 한 여름 중간에 가을 같이 선선한 날씨가 됐다.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옥산서원의 계곡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옥산서원의 계곡 ⓒ 우동윤
잠시 후엔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아무리 선선하다지만 그래도 여름은 여름인지라 쉬지 않고 들려오는 매미소리와 함께 여름의 정취가 물씬 풍겨왔다. 사람들도 점점 많아져 형형색색의 파라솔과 각종 물놀이 용품들이 알록달록하니 예쁜 장면을 연출했다. 이만하면 소문난 여름 휴가지에 하나도 뒤질 것이 없을 듯 했다.

여름 휴가지로 산과 바다를 두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던데 계곡이라면 둘의 장점을 모아 놓은 이상적인 휴가지가 아닌가. 물론 좋은 점만 생각하니 그렇겠지만, 오랜만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나온 나들이 자리에 굳이 나쁜 점만을 생각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옥산서원을 둘러 보는 것도 좋았다. 옥산서원에 가려면 계곡 사이로 가로지른 외나무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다. '군대에서 유격훈련을 받을 때 숱하게 건너 봤다'던 왕년의 경험도 갑자기 맞닥뜨린 외나무 다리 앞에선 무용지물이었고, '건너다 떨어지면 어쩌나'하는 걱정과는 반대로 아내와 조카들 앞에서 '뭐 이정도 쯤이야' 하는 듯한 표정관리에도 신경을 쓰자니 쉽지가 않았다.

외나무다리 건너기가 너무 아슬아슬해 개구쟁이들은 엎드려 기어서 건너기도 한다
외나무다리 건너기가 너무 아슬아슬해 개구쟁이들은 엎드려 기어서 건너기도 한다 ⓒ 우동윤
꼬마들처럼 두손 두발로 기어서 건너기엔 체면이 허락지 않았고, 건너자니 아무래도 떨고 있음을 들킬 것 같아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이신전심이랄까 나처럼 겉과 속이 다를 것 같은 아저씨 몇몇이 다리 앞에서 망설이며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기도 했다.

어찌어찌해 다리를 건너 옥산서원을 둘러봤다. 이런 옛집을 처음 봤을 코흘리개 조카들에게 뭐하는 집인지 설명도 해주었다. 나름대로 쉽게 설명을 한다고 '옛날 학교였다'고 하니 이 녀석들은 아무래도 이상한 모양이었다. 인근에 회재 선생의 별장이자 서재였던 독락당(獨樂堂)도 있다.

'혼자 즐거움을 누리는 집이라.' 옛 학자의 꼿꼿한 성품이 느껴진다. 지금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행락지로 유명한 곳이 됐지만 우거진 숲과 계곡이 있는 이 곳에 있으니 마치 심산유곡에 와 있는 것 같다.

반나절의 나들이가 마치 여름휴가를 완전히 즐기고 온 것과 같은 만족감을 줬다. 이렇게 좋은 곳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쓰레기와 고성방가로 오염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해 봤지만, 나 역시 그 중 한 명이 아니었던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향하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한 옥산서원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향하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한 옥산서원 ⓒ 우동윤
옥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자원봉사 조끼를 입은 할머니가 그 '비싼' 지자체 쓰레기 봉투를 무상으로 나눠주셨다. 우리가 먹은 것이라도 깨끗하게 치우는 것이 한나절 즐거움을 준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라는 생각으로 쓰레기 봉투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갔다.

흔히들 아무리 좋은 곳도 사람의 발길이 닿으면 급속도로 황폐화된다고 하지 않는가. 틀린 말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고 일상에 쪼들린 도시인들의 자연 나들이를 원천봉쇄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방법은 각자 알아서 조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너무 뻔한 말인가? 그래도 별다른 수가 없지 않은가. 알면서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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