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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 지방의 민속놀이인 나마하게 모형
오가 지방의 민속놀이인 나마하게 모형 ⓒ 박도
오가반도

12: 30, 오가(男鹿)로 가는 도중 라면집에서 가볍게 점심을 먹었다. 우리 일행은 예약이 돼 있어서 바로 먹을 수 있었지만, 그냥 온 손님은 대기 번호를 받고 대기실에서 책이나 만화를 보면서 기다리다가 종업원이 번호를 불러야 실내로 들어왔다.

어디서나 목격했지만 그들의 밝은 표정과 친절은 도에 지나칠 정도다. 어려서부터 몸에 밴 오랜 습성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런 표정과 친절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아리가도 고자이마스”, “이랏사이마세”, “스미마센”

이런 말들은 일본 천지를 에워싸고 있다. 이런 친절이 패전 후 맥아더 사령부를 감동시켜 그들 천황을 전범에서 구해냈을 뿐만 아니라, 천황제까지 그대로 존속시킬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분석하는 이도 있다.

나의 취재 장비는 요란하다. 취재 가방에는 지도, 안내 책자, 여분 필름, 필기도구 등이 들어있고, 카메라가 두 대(디지털과 수동, 거기다가 망원렌즈까지)나 된다. 또 늘 손에 들고다니는 취재 노트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고속도로 진입로
고속도로 진입로 ⓒ 박도
그런데 디지털 카메라에서 배터리가 다 됐다는 신호가 왔다. 한 개 여분이 있지만 불안하던 차에 라면집 건너편 슈퍼마켓을 봐 뒀다. 점심을 빨리 먹고 길 건너편 슈퍼마켓으로 갔다. 혼자 다녀도 웬만한 쇼핑은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할아버님이 나에게 한자를 가르쳐 주시면서, “동양 삼국에서는 말이 안 통하면 한자로 필담을 할 수 있다”고 하시던 말씀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그때 배운 한자를 중국과 일본을 누비면서 아주 요긴하게 써먹고 있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더 한자를 많이 쓰고 있어서 길거리 반 이상이 한자 간판이라 대부분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 수 있었다. 거기다가 간단한 영어 회화를 곁들이면 일본말을 전혀 몰라도 여행하는 데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여럿이 함께 다니면서 취재하려면 늘 남보다 더 부지런해야 일행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늘 긴장하면서 두 눈과 귀를 열어둬야 좋은 장면과 글감을 놓지지 않는다.

13: 30, 다시 버스에 올랐다. 에이지 버스 기사와 아이코 안내인은 늘 우리 일행보다 먼저 식사를 하고 차에 올라 시동을 걸어두고, 입구에서 일일이 인사를 한다.

틈틈이 비스켓이나 과일을 깎아 접대하는가 하면 혹 소지품이라도 빠뜨리지 않았는지 매번 챙겨주었다. 나이 지긋한 그들의 몸에 밴 직업의식에 호감이 가서 사진도 한 컷 찍었으나 하필이면 그 부분이 필름을 갈아끼운 첫 장이라 반쯤 잘려버려 못내 아쉽다.

김석준 PD도 늘 취재를 다니지만 일본 기사들의 직업정신에 감복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국내에서 취재다니면 기사가 문을 잠근 채 잠을 자고 있거나, 차를 잠가두고 다른 곳에 가서 딴 일을 하고 있어서 시간 낭비를 많이 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반면 일본 취재 때는 먼저 문밖에 나와 취재는 잘 되었느냐고 인사를 해, 일본인을 미워할 수 없는 감정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날씨 변화가 매우 심했다. 햇빛이 비치다가 금세 눈이 내리고 그러다가 비가 질금질금 내렸다. 이렇게 내리는 비를 ‘여우비’라고 하는데, 여우가 그 사실을 알면 오히려 ‘사람비’라고 우길지 모르겠다.

눈 덮인 시내의 물새들
눈 덮인 시내의 물새들 ⓒ 박도
오가를 가는 도중에 한 다리를 지나는데, 마침 다리 아래 시내의 물새와 언저리 경치가 좋아서 차를 멈췄다.

14:00, 버스는 계속 고속도로를 달렸다. 우리를 안내하는 세 개 현의 공무원 중, 유독 이와테 현의 구로다 주사가 나에게 관심을 많이 보였고, 내가 무슨 질문을 해도 그가 가장 친절하고 정확하게 답변해 주었다.

그는 우리들의 질문에 대비한 듯 봉투에다 3개 현에 대한 자료를 잔뜩 넣어 늘 들고 다니면서 자기네가 모르는 것은 자료집을 뒤져봐서라도 성실하게 답해 주었다. 한 번은 내 질문이 자료집에도 나오지 않자 얼굴을 붉히고는 내일 아침에 답해 주겠다고 했다. 다음날 나를 만나지마자 어제 내 질문에 대한 답부터 했다. 밤새 수소문해서 알아둔 모양이었다.

일본인들은 인사를 나누면 으레 명함을 건넨다. 나는 여태 명함이 없다가 얼마 전, 한 출판사에서 만들어줬다. 그동안 별로 쓰지 않다가 이번 여행에 요긴하게 썼다.

일본 입국 후 그들과 인사를 나눈 후 이름을 외기 위해 명함을 점검하던 중, 구로다 명함에 있는 산과 첼로 그림이 궁금했다. 그래서 그의 옆자리로 가서 당신 취미생활로 첼로를 연주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구로다는 정색을 하면서 명함에 새긴 산은 자기네 고향 이와테산이고, 첼로는 자기네 고장 출신 미야자와 켄지(宮澤賢治)의 동화 작품 <첼로를 켜는 고슈>라는 작품을 좋아하기에, 그 작품에 나오는 첼로를 자기 명함에다 새겼다고 했다.

구로다의 명함
구로다의 명함 ⓒ 박도
그의 명함 뒷면에는 노트에 쓴 육필 글씨를 새겼는데, 그것도 미야자와 켄지의 친필 유작시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찔했다. 작은 섬나라 일본이 자기네보다 수십 배나 큰 청나라와 러시아를 차례로 꺾고, 마침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후, 이어 만주를 삼키고 중국조차 수중에 넣으려 했던 그 무서운 힘이 무력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이런 문화 애호도 그 바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 시절, '국어학개론’을 수강하면서 걸핏하면 오쿠라진페이(小倉進平) 교수의 <朝鮮の 方言>이란 책을 들먹일 때, 우리 방언을 일본인이 처음으로 연구해서 저서를 남겼다는 데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낀 바 있었다.

우리나라 어느 지방 공무원이 자기 고장 출신 작가의 작품 속에 나오는 배경을 명함에 새겼는가? 춘천시 공무원이 김유정의 <동백꽃>에 감동해서 명함에다 동백꽃을 새겼는가? 평창군 공무원이 이효석의 <메밀 꽃 필 무렵>에 매료된 나머지 메밀꽃을 명함에 새겼는가? 나는 여태껏 그런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내가 안동에 갔을 때, 마구 팽개쳐진 육사의 생가를 보고 얼마나 분노했던가. 오히려 중국 연변 용정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생가보다 자칭 유림의, 양반의, 문화의 고장이라고 한 안동이 더 관리가 되지 않는 걸 보고 얼마나 통탄했던가.

그후, 우리나라 국민들의 독서량이 동남아나 아프리카 수준에 맴돌고 있다는 한 신문의 보도가 오보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책을 읽지 않고, 생각하지 않고 대충대충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빈 머리에 권력만 잡으면 됐지 몰래 돈까지 움켜 쥐다가 나중에 탄로가 나서 대통령한 것이 부끄러웠다고 눈물을 질금 흘리는 한심한 나라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문화 후진국이 아닌지?

14: 50, 바다가 보였다. 오가반도로 접어들었다고 했다. 아키타현의 오가반도는 우리나라 동해쪽으로 불쑥 혹처럼 돌출된 반도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뤘다.

지형을 봐도 지도를 봐도 외로움에 지친 섬나라가 대륙을 그리워하던 나머지 불쑥 튀어나온 혹처럼 우리나라 동해를 향하고 있다. 해안선이 리아스식으로 굴곡이 심하고 저녁 노을에 비친 경치가 일품이라고 한다.

15: 30, 오가반도에 있는 오가신잔전승관(男鹿眞山傳承館)에 닿았다. 이곳은 ‘나마하게’라는 이 지방 전래의 도깨비 모형을 전해 두고, 대형 스크린으로 나마하게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설경(1)
설경(1) ⓒ 박도
설경(2)
설경(2) ⓒ 박도
오가의 삼나무 숲
오가의 삼나무 숲 ⓒ 박도
세도마쓰리 축제를 알리는 등 행렬
세도마쓰리 축제를 알리는 등 행렬 ⓒ 박도
오가진산전승관에 전시된 나마하게
오가진산전승관에 전시된 나마하게 ⓒ 박도
나마하게 무리 모형
나마하게 무리 모형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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