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반도의 '나마하게'
16: 30, 숙소인 세이코 그랜드 호텔로 들어갔다. 그런데 기모노를 입은 여종업원 다섯이 일렬로 서서 상체를 90도로 굽힌 채 "아라가도 고자이마스" "이랏사이마세"를 외쳤다. 그리고는 일행에게 달려와서 짐을 낚아챘다.
숙소에서 체크인과 체크아웃은 일본인 가노 과장과 우리 측 김 계장(김자경 씨)이 맡아서 하기에 키만 받고 주면 되었다.
"선생님 간밤에 불편하셨지요. 오늘부터는 독방을 쓰십시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사양해도 막무가내로 410호 키를 주었다. 승강기를 타고 410호에 도착하자 문에는 엽서 크기의 두꺼운 종이에 다음과 같이 예쁘게 쓴 글이 붙어 있었다.
"歡迎 Park Do"
그리고 그 아래에는 가방이 놓였다. 이런 일은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처음이었다. 그것이 허례허식이라도 그 순간은 나그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은 불령선인들을 자기네 나라로 초청해 갔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친일파로 돌아선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친절이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게 아니라는 걸 다짐하면서, 더 냉정해지고자 마음을 다잡았다. 여간 정신 차리지 않고는 그네들의 입에 발린 듯한 친절에 껌벅 넘어가기 일쑤일 것 같았다.
짐만 두고 저녁 행사장에 가기 위해 곧장 로비로 내려갔다. 버스에 오르자 구로타 씨가 장화를 건네주었다. 그걸 신자 발에 꼭 맞았다. 출발 전 전화로 신발 사이즈를 묻더니 장화를 준비하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행사장은 진흙인 데다가 눈이 녹아서 길도 진탕이 많아서 준비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자기네들은 신지도 않았다.
오늘 밤 행사는 '세도마쓰리(柴燈祭)'라고 하는, 오가지방의 전통 민속 축제의 하나로, 해마다 2월 두번째 금 토 일요일에 열린다고 한다. 축제장에 이르자 잔치 분위기로 많은 사람들이 시끌벅적했다.
오가지방은 물론, 일본 전국 각지에서 버스나 승용차를 타고 참관객이 모여들었고, 일본 NHK TV에서는 실황중계 방송준비로 한창이었다. 행사장 가운데는 삼나무 장작을 높이 쌓아두고 불을 지폈다.
행사장 둘레에는 이 지방 청년회에서 가께우동, 어묵, 찹쌀떡 등을 즉석에서 판매했다.
마침내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축제가 시작됐다. 산에서 나마하게 도깨비들이 춤을 추면서 내려오고 행사장 한편에서는 풍어제를 올렸다.
잔뜩 차린 제물 앞에서 구시(宮司)가 절을 할 때는 참배객 모두가 따라서 절을 했다. 북소리 징소리가 진동했다. 그 울림과 함께 참배객들이 함성을 질렀다. 나는 그 울림과 함성에 소름끼치는 전율감을 느꼈다. 모두가 하나로 북소리와 함께 함성을 질렀다.
나는 이 힘이 바로 일본의 잠재된 저력으로, 이로써 나라가 발전했으며, 때로는 이 힘이 지나쳐서 때로는 이웃 나라를 침략했거나 가미가제와 같은 특공대가 자기네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졌을 것 같았다. 한바탕 북소리 징소리 함성이 멎자 나마하게 전설이 공연되었다.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 중국 한(漢) 나라의 왕이 다섯 명의 도깨비를 데리고 오가(男鹿)에 왔다. 도깨비들은 산에서 쉬지 않고 일만 했는데, 1월 15일 하루만 자유가 주어졌다. 이 날이 되면 도깨비들은 마을에 내려와 여자들을 잡아가거나 밭을 망가뜨리는 등, 마을사람들을 괴롭혔다.
마을사람들은 도깨비들에게 여자를 주는 대신, 도깨비들에게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 천단의 돌계단을 쌓을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도깨비들이 돌계단을 완성하기 직전, 마을의 한 사람이 닭울음소리를 흉내 내어 날이 밝음을 알렸다. 그러자 도깨비들은 놀라 도망갔고, 그 이후로는 마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나마하게 전설을 어린이 교육용으로 발전 전승시켰다. 어린이들 중 울보, 게으름뱅이, 부모를 귀찮게 하는 아이, 텔레비전만 보고 공부하지 않는 아이, 또 행실이 나쁜 며느리는 이 나마하게가 잡아간다는 내용으로 연극을 꾸며서, 다른 지역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이 지방의 전설을 알리고 어린이들에게는 권선징악의 교훈적인 내용을 일러주기 위하여 전승되고 있는 민속 행사였다.
실제로 나마하게 도깨비가 무대에 등장하자 어린아이들은 새파랗게 질려 울부짖었으며, 부모 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마하게를 공손히 대접하면서 잘못된 행동을 하던 아이를 자기가 잘 타일러 바르게 살도록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러자 나마하게는 일부러 한번 더 윽박지르듯 겁을 주고는 그 집을 떠나는 것으로 막이 내렸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을 축제화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아 관광수입을 올리는가 하면, 마을의 공동행사로 주민 서로간의 친목과 결속을 다지는 축제였다.
나는 이 축제를 보면서 우리나라에는 이보다 더 좋은 신화, 전설, 설화가 많은데, 이를 현대화시키면 좋은 축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예를 들어 경주지방의 처용전설이라든지, 정읍지방의 정읍사를 현대화시켜 해마다 정례화시키면 좋지 않을까?
내가 이런 생각을 늘어놓자, 곁에서 김광회 씨가 듣고는 자기도 지방 민속제에 리포터로 숱하게 다녀봤는데, 참배객이나 관객의 호응도가 없어서 늘 김빠진 맥주가 되었다면서 자기 문화를 아끼고 보전하는 문화의 열기 차이라고 한마디했다. 우리는 너무 우리 것을 천시하고 서양 것만 쫓는 것은 아닌지?
돌아오는 길에 구로타 씨가 지푸라기 두 개를 줬다. 나마하게 도깨비가 입고 있던 옷에서 뽑았다면서, 이것은 일종의 부적으로 머리가 아픈 사람은 머리에 두르고, 다리가 아픈 사람은 다리에 두르면 효험이 있고 건강한 사람도 잘 보존하면 일년 동안 무병장수한다는 이 지방의 민간 속설이 있다고 했다.
21: 00, 호텔 큰 방에서 늦은 저녁식사가 있었다. 오늘의 메뉴는 오가지방의 향토 요리로 이시야키(石燒)라고 했다. 이 요리는 오가 지방의 삼나무로 만든 통에 물을 붓고 불에 달군 돌을 넣어서 물을 덥혔다. 거기다가 도루묵, 새우, 조개, 해초 등 각종 해산물과 야채를 넣고, 일본 된장을 푼 다음 또 다시 시뻘겋게 달군 돌(800-900도)을 넣어 익혔다(달군 돌을 세 번이나 넣었다). 옛날 어부가 바닷가에서 냄비가 없을 때 바위 공이에다가 익혀 먹었던 요리법이라고 했다.
요리사가 떠준 이시야키 찌개의 맛을 보자, 담박하고 깊은 맛이 있었다. 그밖에 산해진미도 많았는데, 쌀을 발효시켜 만들었다는 소스의 맛이 독특했다.
한참 맛나게 먹는데 곁에 앉은 김효석 씨가 고추장을 넌지시 건넸다. 그걸 받아 공깃밥에 비벼 먹으니 밥맛이 더 꿀맛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촌놈 한국인, 조센징이었다.
22: 00. 객실로 돌아왔다. 넓은 방을 혼자 쓰니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여기저기 구석구석을 살폈으나 머리카락, 먼지 한 점 없는 완벽한 청결 상태였다. 옷장을 열자 유카다도 두 벌로 170 이하용과 그 이상용으로 한 치 허점도 엿볼 수 없었다.
완벽한 청결에 최상의 서비스를 한 후, 그에 걸맞은 요금을 받겠다는 게 이들의 상술인가 보다.
온천 욕탕에 몸을 담그자 피로에 눈이 절로 감겼다. 곧 객실로 돌아와서 유카다도 속옷도 입지 않은 채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해방감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