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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은 굶어도 기타 없이는 못사는 기타맨 조용연씨는 늘 웃는 얼굴이다.
밥은 굶어도 기타 없이는 못사는 기타맨 조용연씨는 늘 웃는 얼굴이다. ⓒ 송성영
그는 별탈 없이 하루 밥 세 끼 먹고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문제는 하루 세 끼 먹고 살기 힘들게 농사를 지어왔다는 것이다. 논농사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고는 하지만 피 뽑는 일조차 익숙지 않다. 농사일이라는 게 다 때가 있는 법인데 늘 뒷북치기 일쑤다. 남들 농약 두 번 칠 때 한번 치니 수확량은 80% 수준에도 못 미친다.

“우리가 농사 진 쌀을 1년에 30세대가 먹고 있는데요. 내가 쌀을 안전하고 맛있는 거 먹고 싶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좋은 쌀을 공급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마음으로 농사짓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돈을 더 많이 받는 것도 아닙니다. 쌀 상태가 안 좋다고 오히려 남들보다 1~2천원 덜 받고 있습니다.”

그는 본래 농사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중학교 때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해서 40년 동안 기타를 쳐 오고 있는 그는 기타가 있고 또 연주할 공간만 있으면 마냥 즐거운 사람이다. 밥은 굶어도 기타 없이는 못 사는 기타맨이다.

노래 한 두 곡으로 평생을 우려먹는 가수나, 그럴싸하게 폼만 잡는 기타맨하고 다르다. 자신의 음악을 원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간다. 마을 잔치가 있는 날이면 종종 노래판을 자청하고 나서 동네 악사가 되기도 한다.

정작 생활의 전부인 농사일에는 젬병이지만 음악에 관련된 얘기만 나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 그의 세상사는 대부분 음악에 맞춰져 있다. 그는 6~70년대 고려대학교(전기공학과 68학번)를 다닐 당시 미 8군 등지에서 5인조 록 밴드로 아르바이트를 했을 정도로 인정받는 기타맨이었다.

농사일에는 젬병…음악에는 열병

당시 미 8군을 들락거리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여전히 유명세를 타고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적당히 유명세를 타다가 무대 뒤로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또 여전히 서울 인근 미사리 등지에서 근사한 생음악 카페를 차려 놓고 여유 있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유명세는 고사하고 소도시의 밤 업소나 잔치집 등을 전전하며 3류 밴드로 활동하다가 결국 나이 들어 음악에 손을 놓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조용연씨 또한 그런 사람들 중에 한 명이라고 볼 수 있다.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라는 영화를 보면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록커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는데 조용연씨가 살아온 흔적들을 들춰보면 그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을 많이도 빼닮아 있다.

“어려서부터 기타 연주 소리를 듣고 자랐지요. 아버지, 삼촌, 형 모두 기타를 다룰 줄 알았으니까요. 중학교 때 처음으로 기타를 배우고 또 팝송을 처음 접했는데 고등학교 때는 그저 팝송 가사를 구하기 위해 방송국 정문 앞에서 진을 치기도 했죠. 악보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악보를 구할 길이 없어 대학에 다니는 선배들조차 팝송을 듣고 직접 악보를 그려내기도 했는데 우리는 그 악보들을 구해 카피했을 정도로 열성이었죠.”

한창 기타에 미쳐 있을 때는 하숙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타 치는 연습했고 버스 손잡이를 잡고서도 기타 코드를 잡는 연습을 했을 정도였다.

가족들 걱정은 이만 저만 아니었다. 충남 부여하고도 장암면 합곡리 시골 촌놈이 중학교를 대전으로, 고등학교를 서울로 유학을 갔을 정도로 동네에서 알아주는 수재였던 그가 대학 다닐 때는 수업은 고사하고 휴학까지 하면서 음악에 미쳐 지냈던 것이다. 록 밴드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부터였다.

음악에 미쳐 지낸 동네 수재

“내가 70년 4월 군번인데요, 군에서 잠깐 휴가 나와 보니까, 생 음악이 굉장하더군요. 이거 뭐 되겠다 싶었는데 월남전에 다녀와서 제대를 하고 나니까 10월 유신으로 제재가 심했지요. 그 때 나도 대마초 사건으로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그때부터 록 밴드 활동이 어려워졌던 것 같아요.”

당시 젊은이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을 몹시도 싫어했던 박정희 군부 독재 정권은 ‘자유를 추구하는’ 음악인들의 숨통을 조였다. 수많은 음악인들이 대마초 사건 등으로 밥줄을 위협당했다. 작은 소도시 밤 업소에서 연주하는 것조차 공연 허가증이 있어야 했다.

그가 속해 있던 5인조 밴드가 해체될 무렵에는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처럼 트럭 가득 악기들을 싣고 강원도 횡성에서부터 부산 여수에 이르기까지 전국 밤 업소를 떠돌아다녔다.

“밴드 생활은 월남전에 다녀와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비틀즈 음악이 한창 유행이었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몰고 다녔죠. 우리도 한창 잘 나갈 때 그런 꿈을 꾸었죠. 전국 대도시를 돌면서 순회공연을 하면 굉장히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만 같았어요. 그런 계산을 하고 밴드 활동을 했을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앨범 한 장 내지 못하고 80년대 말까지 10여년 동안 떠돌이 밴드생활을 했다. 밤 업소 주인들은 공연료를 떼먹기 일쑤였고 그마저 일이 없으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하루 두 끼 그것도 잔치국수로 허기를 때운 적도 있었다. 결국 배고픈 5인조 밴드는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한동안 술꾼들이 가슴팍에 찔러주는 돈을 받아가며 ‘룸싸롱’에서 연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명 ‘오브리’를 받고 연주하는 것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 무렵 그는 술과 커피를 함께 취급했던 신촌의 ‘러시’이라는 카페를 들락거렸다. 가난한 록커들과 함께 커피 한 잔 시켜놓고 하루종일 카페에서 죽치곤 했는데 거기서 아내를 만났다.

신촌의 한 카페에서 아내를 만나

돈벌이가 형편없었던 남편, 아내는 아이를 갖게 되었고 먹고살기 위해 이런 저런 궁리 끝에 결국 고향 땅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고향에는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열여덟 마지기의 논이 있었다.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의 품으로 돌아왔으나 호락호락 받아 주질 않았다. 아버지 때부터 살아왔던 고향집은 다 쓰러져가고 있었고 농사일 또한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밴드에 미쳐 살았던 조용연씨, 이번에도 역시 남들 순탄하게 가고 있는 길에서 저만치 비켜서서 갔다. 패기만만하게 농약 한 방울 치지 않고 유기농으로 농사짓겠다며 겁없이 달려들어 그야말로 피만 봤다. 주변 사람들의 예상이 적중했다.

“말하자면, 남들 5가마 소득을 올릴 때 논 갈아준 사람 한 가마, 모 심어 준 사람 한 가마, 벼 베 준 사람 한 가마, 이것저것 빼고 나니까 한 가마 정도가 떨어지더군요. 그게 맨 처음 신고식처럼 치른 농사일이었죠.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남들 두 번 칠 때 한 번 정도 농약을 치긴 하는데 그나마 70%정도의 수확을 올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 일 저 일 남 손 빌려서 하다보니 1년 농사 지면 빠듯하게 우리 네 식구 먹구 살고 한 백 만원 정도 남지요.”

서울 신촌이 고향인 아내는 진짜 서울내기였다. 그런 아내의 시골 생활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아내는 시골에 내려와 1년도 채 버티지 못했다. 아내는 도망치듯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향해 보따리를 쌌다. 그도 뒤따랐다. 서울에서 1년 넘게 처갓집 옥탑방 생활을 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렇게 다시 고향 땅에 내려와 서울로 올라가 멋지게 재기하겠다고 다짐하며 내려온 지가 벌써 10여 년.

주업은 농사이지만 그는 여전히 음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년 농사짓고 나면 보통 1~2백 만원쯤 남게 되는데 그걸로 백만원 짜리 기타를 산 적도 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나무를 구입해 깎고 다듬어 엠프 기타를 만들기도 한다. 기타 소리는 신통치 않지만 한반도의 지도를 본떠 만든 엠프 기타도 있다. 그의 집안 구석구석에는 기타뿐만 아니라 아주 오래된 음반이며 대형 엠프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노래 좋아하는 손님이 찾아오는 날이면 다 낡은 함석집은 난데없이 즉석 노래방이 되기도 한다. 조용연씨는 그 한 옆에서 엠프 기타를 메고 신나게 반주까지 해준다. 마을에서 산날맹이 맨 꼭대기 집이다 보니 소음 시비는 없다.

그는 음악에 미쳐 지내는 덕분에 뒤늦게 졸업장을 받았지만 전기공학과를 나온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집 곳곳에는 희한한 조명이 꾸며져 있는데 누군가 그런 조명들을 원하면 순박한 전기공처럼 주섬주섬 도구를 챙겨든다.

자신의 음악을 원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는 그는 동네 악사이기도 하다
자신의 음악을 원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는 그는 동네 악사이기도 하다 ⓒ 송성영
자신의 음악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면 어디든 열일 제쳐두고 달려가는 조용연씨, 그는 요즘, 부여정보고등학교에 들러 밴드부 학생들을 지도해 주고 있다(이 밴드는 조용연씨의 건의로 작년에 결성됐다).

"요즘은 가수는 있어도 밴드가 없는데, 좋은 음악은 서로 협동해서 내는 화음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밴드가 또한 매력이 있는 거구요."

기타를 들고 있는 젊은 사람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아주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지겨울 정도’로 ‘음악 강의’를 시작하기도 한다. 그의 강의를 들어보면 록이며 재즈며 랩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의 음악 세계를 꿰차고 있다.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가진 쉰 다섯의 록커

올해 쉰 다섯, 그에게는 여전히 꿈과 패기가 있다. 젊은 록커들 이상 가는 패기와 꿈이 있다. 밴드를 다시 결성해 음악을 하고 싶은 꿈이 있고 비록 다 낡은 집이지만 한구석에 음악 연습실을 갖추고자 하는 평생의 꿈도 있다.

집 뒤편 언덕배기 아래에다가 음악실을 만들어 보겠다고 지난 몇 년 동안 5백만 원이 넘는 거금을 모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 교통사고(단순한 접촉사고 였는데 세상물정 모르는, 음악이 전부인 사람이다 보니 거의 사기 사건에 말려든 것 같다)로 한순간에 다 날려보냈다.

돈이 없어 지붕하나 제대로 못 고치고 산다. 매년 장마철이 되면 옥탑방 고양이처럼 덕지덕지 짜깁기 해 놓은 지붕을 수시로 올라가야 한다. 슬레이트 쪼가리에 함석 쪼가리, 길거리에서 주워 온 문짝까지 임시 방편으로 끼워놓은 지붕이다 보니 제대로 된 구석이 하나도 없다.

“빗물이 새는 것은 물론이고 태풍이라도 불어닥치는 날이면 들썩거리고 제껴지고, 날아가기 일쑤지요. 이런 지붕 아래에서 그동안 장마철을 어떻게 견뎌 왔는지…. 언젠가는 고치긴 고쳐야 하는데 수리할 돈이 없으니 늘 마음만 앞섭니다. 다 낡은 함석 쪼가리들을 걷어내고 새 지붕을 입히겠다고 한 지가 벌써 7년이 넘었으니까요.”

그는 열여덟 마지기의 적지 않은 농사를 통해 밥을 먹는 가난하고 순박한 농사꾼이기도 하다. 그저 기타가 좋아서 평생을 기타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 점점 패기와 열정에서 멀어져 갈 나이를 먹고 있는 쉰 다섯 록커이다.

남들 제 밥그릇 챙겨먹을 때 숟가락 장단만 맞추고 살아왔다. 하지만 이것들은 세상의 잣대에 불과하다.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다. 무엇이든 재미있는 일을 하고자 한다.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늘 좋은 시절을 보내고자 한다. 먹고 사는 일에는 느려 터졌지만 아름답게 살고자 한다.

그는 음악 외에는 세상일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세상 모든 일에 관심을 두고 살아간다. 그 일이 음악처럼, 기타 치는 일처럼 즐거운 일이라면 말이다. 그렇게 그는 기타 치는 일처럼 즐겁게, 언제나 소풍 나온 사람처럼 재미있게 세상을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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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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