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두어 번 홰를 치자, 이언적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지난밤에 외숙(손종돈)의 집 사랑채에서 잠을 청한 참이었다. 경상도 관찰사를 그만 두고, 한양에 올라가 공조참판을 하게 될 외숙이 그에게 하룻밤 묵고 갈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밖을 나서니 아직 새벽안개마저 어둑어둑했다. 기침소리를 내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질그릇 대야에 물을 떠 가지고 와서 세수를 권했다. 질그릇 대야는 검소함을 미덕으로 아는 선비의 면모를 유지하려는 외숙의 고집이었다. 외숙은 한때 서울에서 당당한 언관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당시의 사치품이던 놋으로 된 세숫대야는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면으로 보이는 산위로 아직 아침 안개가 낮게 깔리고, 집 뒤에는 솔숲이 검푸른 기왓골 뒤로 짙어지며, 후원처럼 펼쳐 있었다. 골짜기 아래쪽에 보이는 낮은 초가지붕 옆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마당에서는 종들이 부산했다.”
이 것은 소설의 한 대목이 아니다. 사계절출판사가 펴내는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 제9편 <조선생활관1>에 나오는 구절의 하나이다. '아침 사랑에서 책을 벗하고, 저녁 정자에서 술을 벗하네' 편에서 양반가의 생활 중 선비를 소개하는 대목이다.
사계절출판사는 그동안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를 이미 8권이나 발행하여 국내 출판 기획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개척했다.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우리 겨레의 생활사를 총 12권에 담아낸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는 그림, 사진, 도표 등의 시각자료를 중심으로 대담하고, 입체적인 편집으로 구성됐다. 또한 철저한 고증에 바탕을 둔 정확하고 알찬 내용과 초등학생도 볼 수 있도록 쉽게 씌여진 것이 이 택의 특징이다.
이번에 나온 제 9권 ‘조선생활관 1’은 이 시리즈의 조선편 첫 권으로, 천년 넘게 이어온 기존 불교적 전통이 유교로 바뀌던 조선 전기를 그리고 있다. 염정섭 서울대 규장각 책임연구원,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등 7명의 전문가가 집필하고, 정주하 백제예술대학 교수 등 10명의 작가가 그림과 사진을 맡아 완성했다.
또 이 책은 철저한 고증에 바탕을 두기 위해 이태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최준식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주영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등이 감수하였다.
여성이 당당했던 조선 전기
지금 여성계는 호주제 폐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은 이 호주제가 조선시대부터 이어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 조선 전기 여성들의 당당함에 놀란다. 현재의 호주제는 조선 후기로 오면서 가부장제가 형성된 시기에 생긴 것으로 보이며, 일제강점기에 많이 왜곡되었다는 논리에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조선 초기, 혼인한 여자는 남편과 함께 친정에 살거나 집안의 대소사와 경제활동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죽기 전 남편에게 새 장가를 가지 말라고 당당히 요구하거나 기생과 어울리지 못하게 하고, 아들의 혼사와 상례 등을 자기 맘대로 치루는 것도 예사였다.
또 16세기까지는 아들딸 구별 없이 유산을 고루 나누어 물려받고, 윤회봉사라 하여 제사도 돌려가며 지냈다. 또 <안동 권씨 성화보(1467)>, <문화 유씨 가정보(1562)> 등을 보면 족보도 아들딸 가리지 않고,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되었으며, 혼인한 딸의 후손도 빠짐없이 기재되었다.
또 이 책은 여성의 당당함 뿐만 아니라 조선의 향촌사회가 어떻게 되었으며, 양반가의 생활은 어땠고, 관아의 구조에 대한 이야기, 마을 잔치, 농가의 생활 등을 상세하고도 쉽게 설명돼 있다.
또 유네스코에서 ‘세계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된 <종묘제례악>과 종묘제례애 대한 자세한 설명과 재현 당시의 사진 그리고 조선의 시간 생활과 시계는 어떠했는지를 담은 사진과 그림 등이 아주 뛰어나게 묘사돼 있는 책이라 하겠다.
조선시대에 만든 시계들
시계는 어떻게 만들게 되었을까? 조선시대 사람들은 일식을 하늘의 경고라고 보고, 또 그것을 그치게 하기 위해 구식례(求食禮)를 행했다고 한다. 세종임금도 구식례를 하려 했지만 중국의 기준에 맞춘 예보는 1각이 빗나갔고, 예보관에게 장형이 내려졌다. 이를 곰곰이 고민하던 세종임금의 지시로 정인지와 장영실을 통해 천문기구와 시계 등을 제작한다.
이 때 만들어진 시계들은 북극고도를 측정하기 위한 ‘간의(簡儀)’, 밤 시각도 측정하기 위한 일종의 해시계 겸 별시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이동하는 군사들을 위한 휴대용 해시계 ‘천평일구(天平日晷)’와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 ‘자격루(自擊漏)’ 등이 있었다.
자격루 이전에 물시계를 맡은 군사가 밤에 졸다가 시간을 알리는 때를 놓쳐 종종 처벌을 받았는데 세종임금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자동시계를 만들도록 하였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곁들인다.
조선생활관1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1. 야외전시-청계고가도로에서 조선을 만나다
2. 조선실-향촌의 생활, 양반가의 생활, 읍성의 생활, 민촌의 생활
3. 특별전시실-종묘의 모든 것
4. 가상체험실-조선의 시계
5. 특강실-성리학과 유교문화, 훈민정음
6. 국제실-세계의 문자 등이 망라 되어 있다.
이 외에 부록으로 찾아보기, 연표, 도서실(원전, 단행본, 논문, 도록 등), 자료제공 및 출처 등이 추가 된다.
사계절출판사 강맑실 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거기가 생활사박물관인가요? 몇 시에 열고 몇 시에 닫나요?’ <한국생활사박물관> 1, 2권을 출간하고 나서 일간지에 낸 광고를 보고 걸려온 전화였다. <역사신문>을 출간했을 때도 “역사신문을 구독하고 싶다”는 전화를 일년이 넘도록 받아야 했다. 이처럼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로운 형식의 책을 출간할 때면 책에 대한 독자들의 굳어진 인식도 함께 깨나가야 하는 힘겨운 일이 뒤따른다.”
다른 역사서나 문화책들과는 완전히 다른 구조이다. 수필인가 하면, 이론서이고, 이론서인가 하면 도록이며, 도록인가 하면 만화책이다. 이 말은 이 책이 정확한 고증에 의한 서술이면서도, 감성적인 책이며, 초등학생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100여 컷의 컬러사진, 40여 컷의 컬러그림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들을 보면 먹이나 채색 물감으로 조선 전기 생활상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는데 바로 눈 앞에서 보듯 그리기도 했으며, 하늘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묘사하기도 한다. 또 어느 것이나 그림의 각 부분에 자세한 해설, 사진자료 보강 등의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은 점도 돋보인다.
또 다른 전문서적이나 참고서처럼 중간 중간에 설명상자가 끼어들고 있어 이채롭다. 이 설명상자를 보면 ‘기 수련-선비의 건강법’, ‘양반가의 재테크’, ‘마을 이름의 역사’, ‘재미삼아 보는 점, 답답해서 보는 점’, ‘자격루, 그 이후’ 등 조선사회의 단면을 살펴보기에 쉽게 되어 있다.
훌륭한 책에도 보이는 옥의 티
하지만 이 책에도 약간의 티는 있게 마련. 조선 백자 등 도자기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으면서도 서민들의 실생활에 그보다 널리 쓰였을 그릇은 없었고, 왕실의 종묘제례는 상세한 사진과 그림, 도표 등으로 넘쳐 나지만 일반의 제사는 볼 수가 없었다. 또 일상생활 중 주로 주거생활에만 조명을 맞추고, 옷과 음식에 대한 내용이 결여 되는 등 전체적으로 아쉬운 부분이 나타나기도 한다.
구체적인 내용 중에서는 선비의 생활상 묘사가 불만스럽다. 조선의 선비는 4예(四藝), 즉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고, 그림을 걸고, 꽃을 꽂는 일과 함께 삶을 살았으며, 이를 모르면 선비라 할 수 없는 것으로 아는데 이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특강실의 ‘성리학과 유교문화, 훈민정음’은 좀 지루하고 어렵다는 느낌이 있다. 이것을 좀더 쉽게 설명할 수는 없었을까? 또 ‘국제실-세계의 문자’편은 ‘꼭 넣었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과 함께 이 대신 더 많은 생활상을 담았으면 좋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간단한 전화 인터뷰를 시도했다. 다음은 강응찬 편집주간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이 시리즈를 발행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의 문화유산은 대단한 것들이 많음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 문화유산을 보러 박물관에 가보면 전시된 문화유산을 이해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진열장 뒤에서 박제가 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화유산들을 지면으로 옮겨서 가까이서 쉽게 그리고 늘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사계절출판사는 다른 출판사와 달리 많은 모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격적인 주제와 편집은 전에 발행되었던 많은 책들에서 익히 보아왔습니다. 특히 이 시리즈에서 더욱 심화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데 발행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이 모험은 위험성이 분명히 있지만 이전 경험으로 가능하다는 계산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예측에 비해 엄청나게 늘어난 투자비용은 1~2권을 만드는데 이미 소진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민족문화를 알려내야 한다는 것과 많은 성원을 보내주는 독자들에 대한 도리를 생각한다면 어떻게든 완성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 판단이 바로 밀어붙이는 뚝심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 제가 몇 가지 옥의 티를 지적했는데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옷과 음식이야기가 빠진 것은 조선 초기에 거론하는 것보다는 후기편에서 같이 이야기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되어 미루어 놓았습니다. 서민들의 그릇과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지 못한 아쉬움은 새겨듣겠습니다.
그리고 선비의 4예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인데 앞으로 보완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또 특강실이 어렵고 지루했다는 지적은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그 부분이 워낙 전문적인 꼭지이기 때문에 쉽게 해결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는 점은 이해 바랍니다. 국제실에 대한 지적은 이 시리즈의 전체 흐름이 국제적인 시야를 넓히는데도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필수이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2000년 7월 제1권 ‘선사생활관’으로 출발한 생활사박물관 시리즈는 이제 3권만 남아있을 뿐이다. 조선 후기를 다룬 제 10권, 개항기와 구한말을 다룬 제 11권과 함께 제 12권 남북한생활관 편을 끝으로 대장정의 대미를 장식한다.
나는 많은 민족문화 관련 책들을 보았고, 또 서평을 쓰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책들 중 대부분이 너무 어렵고, 지루하다는 느낌이어서 우리의 훌륭한 겨레문화를 알려내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듯하여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이제 희망을 찾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의 대중들이 무조건 ‘겨레문화는 어려워!’라고 하기에 앞서 이 책을 먼저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러면 대다수의 독자는 감탄으로 무릎을 칠 것이며, 독서삼매경에 날 새는지도 모를 것이다. 이 삼복더위를 조선생활사박물관을 읽는 것으로 극복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