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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305번지에 '문화공간 가라'가 있다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305번지에 '문화공간 가라'가 있다 ⓒ 우동윤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305번지는 월막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였다. 단층짜리의 조촐한 건물에서 시골분교의 정취가 흠뻑 묻어난다. 오래 전에 폐교된 이 건물에 전통 각 기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문화체험공간을 열었다. 지난 1999년 6월에 문을 연 ‘문화공간 가라'가 그 곳이다.

'가라(아래 아로 표기됨)' 는 가야(伽倻)의 옛이름이다
'가라(아래 아로 표기됨)' 는 가야(伽倻)의 옛이름이다 ⓒ 우동윤

'가라’란 가야(伽倻)의 옛 이름이다. 고령은 옛날 대가야국이 있었던 자리였다. 그동안 구전과 문헌으로만 전해져 오던 순장(殉葬:임금이나 귀족이 죽으면 그가 부리던 사람들을 같이 묻어 장사지내는 것)이 실제 고령에서 발견된 고분군에서 확인돼 학계에 일대 충격을 가져오기도 했던 곳이다.

복도에 각종 판각체험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복도에 각종 판각체험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 우동윤

고령은 대가야 관련 유적 뿐만 아니라 팔만대장경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경남 합천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다.

그 중 팔만대장경이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한 실정이다. 여기에 대해 최근 설득력을 얻고 있는 학설 중 하나가 팔만대장경을 고령의 장경나루를 통해 합천 해인사로 운반했다는 것이다.

실제 경북 고령과 경남 합천은 차로 3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 고령군에서도 이 곳의 가치를 인정해 이곳 폐교 건물을 무상으로 임대해주고 있다.

'문화공간 가라'에는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고인쇄 관련 물품들이 전시돼 있다
'문화공간 가라'에는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고인쇄 관련 물품들이 전시돼 있다 ⓒ 우동윤

'문화공간 가라'는 그 옛날 고려인들이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불심을 모아 만들었던 팔만대장경에 주목하고 있다. 5천만자에 달하는 실로 어마어마한 분량의 팔만대장경에 사용된 각 기법을 연구하고 재현하는 것이다.

다행히 당시 각(刻) 기법은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맥이 끊기지 않고 내려오고 있다. '문화공간 가라'와 이산 각연구소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 안준영 소장은 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전통 각수(刻手) 중 한명이다. 그는 이미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옛날 방법 그대로 재현해 낸 바 있다.

차실(茶室)에서는 각종 판각작품들을 감상하며 전통차를 즐길 수 있다
차실(茶室)에서는 각종 판각작품들을 감상하며 전통차를 즐길 수 있다 ⓒ 우동윤

특히, 지난 2000년에는 팔만대장경의 주재료가 산벚나무인 것과 판각을 위한 최적의 목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바닷물에 3년 이상 묵힌 후 작업했다는 것을 학계 전문가들과 함께 밝혀 내고, 직접 시연해내기도 했다.

그동안 팔만대장경에 대해서라면 그저 ‘대단하다’, ‘어마어마하다’라는 단순한 반응이 일반적이던 때 최초로 실증적이고도 구체적인 방법을 동원해 일군 성과였다.

그리고 세계 최고 수준의 목판인쇄술을 가졌던 우리나라의 문화적 자긍심을 살리고, 인류문화의 보고라 일컬어지는 팔만대장경을 창조해낸 전통 각 기법을 일반인에게 전파하고자 '문화공간 가라'를 열었다.

이곳에서는 각 체험과 함께 인경(印經:판각된 경전에 먹물을 묻혀 종이에 찍는 것), 장승깎기, 한지공예 등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역시 전통 각 체험. 나무판에 새기고자 하는 글귀를 풀로 붙여 말린 후, 조각칼과 망치를 이용해 새긴다. 언뜻 간단해 보이는 방법이지만, 마음먹은 대로 조각칼을 움직이기도 쉽지 않거니와 망치로 조각칼을 때릴 때 힘 조절이 그리 쉽지 않아 깊이와 방향을 맞추기가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조각칼과 망치를 이용해 판각한다
조각칼과 망치를 이용해 판각한다 ⓒ 우동윤
조각칼의 깊이 조절과 망치의 힘 조절, 그리고 칼의 방향잡기가 절대 쉽지 않은 것이 판각작업이다
조각칼의 깊이 조절과 망치의 힘 조절, 그리고 칼의 방향잡기가 절대 쉽지 않은 것이 판각작업이다 ⓒ 우동윤

처음 하는 사람들은 명조체 등 비교적 반듯반듯한 글씨로 시작하고, 점차 궁서체, 흘림체 등으로 난이도를 높여 나간다. 붓글씨의 삐침이나 먹의 농담에 따른 독특한 시각적 효과도 그대로 표현이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언뜻 서각(書刻)과 비슷해 보이지만 세밀하고 정확한 표현에는 서각이 따르지 못할 것 같다.

'문화공간 가라'의 회원 중에는 이미 일반인의 경지를 넘어선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 고급회원들은 모두 3년 이상 각을 배운 사람들이고, 전부 주말에나 시간이 나는 직장인들이다. 하지만 전시실에 걸려 있는 이들의 작품은 범상한 수준을 한참 벗어나 있다.

일반 회원들의 작품
일반 회원들의 작품 ⓒ 우동윤

'문화공간 가라'의 올해 숙원 사업은 건물을 늘리는 것이다. 단층 짜리 폐교 건물은 각종 전시실, 체험실, 차실과 사무실 공간으로 전부 사용되고 있어 이 곳을 찾은 사람들이 쉬어 갈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곳 사람들은 '문화공간 가라'가 전국적으로 잘 알려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 진다면 분명 기뻐해야할 일이지만, 시설과 시간이 부족해 제대로된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하기 힘들다는 고민을 함께 안고 있다. 정부의 지원이 절실한 시점이다.

상당한 수준에 오른 한 회원의 작품, 추사 김정희의 새한도를 판각했다
상당한 수준에 오른 한 회원의 작품, 추사 김정희의 새한도를 판각했다 ⓒ 우동윤

안준영 소장은 다른 수련원처럼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쉬어 갈 수 있는 숙식시설만 갖추어진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전통 각 문화와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기술을 제대로 알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는 '문화공간 가라'가 존재하고 있는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고려인들은 팔만대장경을 만들면서 한 자를 새기고 세 번 절했다고 합니다. 일자삼배(一字三拜)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죠. '문화공간 가라'는 단순히 옛날의 각 기술만을 전하는 곳이 아닙니다. 바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온 나라가 하나가 돼 지극 정성을 다했던 선조들의 정신도 함께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라는 외침이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는 때 ‘'문화공간 가라'의 옛 것, 우리 것 흉내내기가 오늘날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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