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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3일 천도제가 열릴 너릿재 정상 부근.
오는 13일 천도제가 열릴 너릿재 정상 부근. ⓒ <전라도닷컴> 제공
46년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의 해방 1주년을 맞이하는 날이었다. 동시에 그날은 전남 화순군 동면 탄광촌 사람들에게는 미군정에 의한 '학살의 날'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희생당한 원혼을 기리기위해 평화실천광주전남불교연대(상임공동대표 행법 스님. 이하 불교연대)는 13일 오전 11시 화순 너릿재 정상에서 '1946년 미군정하에 희생된 화순탄광노동자 천도재'를 봉행할 예정이다.

이 행사는 반세기가 넘도록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던 학살당한 화순탄광 노동자들의 원혼을 달래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로 이어지도록 마련한 것이다. 학살이 자행된 지 58년만의 일이다.

46년 8월 15일. 광주에서 열린 광복절 1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했던 화순탄광 노동자 등 1500여명은 미군정에 의해 현재 광주 전남대병원 근처에서 화순 너릿재 고개까지 '토끼몰이'를 당하면서 쫓겨왔다. 이 과정에서 김판석씨 등 노동자들이 미군정의 총에 사망했고, 수 백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해방 이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자행한 최초의 민간인 학살로 기록되고 있다. 곧 '미군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인식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정의행 불교연대 공동대표는 "억울한 원혼을 해원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천도재를 준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전쟁 전후 행해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라며 "천도재가 평화와 생명을 소중히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천도재에는 당시 희생자 유족들이나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이들은 참석하지 못한다. 불교연대 등이 피해자와 유가족 등을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했다. 이주 노동자라는 탄광 노동자들의 특성도 있지만, 45년 화순탄광 노동자들은 노조를 결성해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미군정의 극심한 탄압을 받아 완전히 무너졌다.

천도재에는 불교연대, 인권운동단체와 '민간인학살 전국유족회' 관계자 등 8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미군학살진상규명을 위한 전민족특별위원회(전민특위)' 광주전남본부 이신 조사단장은 "희생자 유가족들과 증언자들이 참여할 수 없지만 미군 범죄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당시 피해자의 증언 등을 토대로, 내년 4월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유엔인권소위에 제소할 때 화순탄광에서의 학살도 포함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46년 화순, 무슨 일이 있었나

화순탄광 노동자들에 대한 미군정의 학살이 처음(50년 이후) 보도된 것은 월간 <말> 89년 1월호에 의해서다. 당시 오연호(현 오마이뉴스 대표이사) <말>지 기자는 46년 30대의 광부였던 김봉래(79)·이봉우(83)·이두신(77)씨 등의 증언과 미군정보고서(G-2 일일보고서) 등을 근거로 46년 화순탄광촌의 비극을 세상에 전했다.

그가 99년 주한미군 범죄 55년사를 묶어 출간한 <노근리 그 후>(월간 말)와 91년 '전남일보 광주전남현대사 기획위원회'가 펴낸 <광주전남현대사1(실천문학사)>를 보면 화순탄광촌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상세히 알 수 있다.

미군정이 화순탄광을 점령한 것은 45년 11월 초. 당시 화순은 미군정 61중대 관할지역이었다. 점령작전의 총책임자는 미군 율러 대위로 탄광을 무조건 접수한다고 공표했다. 그는 임성록씨를 일방적으로 탄광소장에 앉히면서 노조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화순탄광노조는 45년 11월 5일 결성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산업별·지방별 노조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노조의 지도자는 '광주학생독립운동' 출신의 유몽룡으로 81인의 전평 집행위원 중 한 사람이었다.

이두신씨 증언에 따르면, "광주에서 8·15 기념식을 한다기에 3000여명의 탄광노동자들이 출발했는데 미군들이 못 가게 하는 것이여. 불법집회란 것이제.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이 주최한 8·15기념식이라고. 근디 그때 우리 한테는 좌익이고 우익이고 있어깐디. 나라가 독립돼야 허고 배 좀 그만 곯자는 것이었제. 우리들은 길을 비켜 달라면서 미군 탱크 앞에 쫙 앉아 있었어. 그런데도 미국놈들이 탱크를 몰아 중간중간 대열을 잘라 결국 1500명 정도가 광주까지 갔을 것이여." (노근리 그후)

이들은 광주까지 진출해 "우리에게 쌀을 달라", "완전한 독립을 달라"며 광주시내를 행진하다 지금의 전남대 병원 근처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광주 진출 저지에 실패한 미군은 총에 대검을 꽂고 폭격기까지 동원해 기념식장을 에워싸 강제해산 시키려했다. 미군은 화순탄광 노동자들을 화순 너릿재까지 '토끼몰이식'으로 몰았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전평의 기관지 <전국노동자신문>(1946. 8. 23)은 "김판석 동무는 칼로 다리와 머리를 사정없이 찔리고 깊은 골짜기에 떨어져 즉사하고 말았으며 행방불명된 자가 7명이었다"고 보도했다. 또 <해방후 4년간의 국내외 중요일지> (민주조선사 1949년 발행. 돌베개 1986년 복간)는 그 사건으로 "즉사한 수가 30여명, 부상자가 500여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노근리 그 후)

<미군정보고서>는 "광부들이 계속 행진하자 미군 군복을 입은 기마경관들이 발포했다. 그러는 동안 미군 비행기 6대가 공중에서 시위자들에게 총격을 퍼부었다. 2명의 광부가 사망하고 109명 부상, 7명 행방불명, 15명 체포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주전남현대사1)

그러나 미군의 학살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미군은 8·15 기념식 이후 탄광노조 간부들의 체포가 여의치 않자 같은 해 11월 4일 새벽 4시를 기해 기습 검거작전을 펼치며 이에 항의하는 탄광노동자를 다시 한번 학살하게 된다.

이양이 할머니는 "그 때 '빵빵빵' 허고 총소리가 여남은 방 납디다. 사람들이 '워매 또 죽었네, 또 죽었네' 허는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곳에서 대여섯 명이 차에 깔리고 총에 맞아 죽어부렀제라"라고 증언했다. (노근리 그 후)

그러나 화순 방향으로 빠져나오던 미군은 또 다시 탄광촌 사람들과 맞닥뜨리게 되고, 5명의 노동자가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광주전남현대사1>은 ▲11월 4일 3명 사망 ▲11월 6일 75명의 노동자 체포 ▲11월 9일 오후 경찰서를 공격하던 1000여명의 노동자 중 3명 사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46년 미군은 화순탄광촌 사람들을 4차례에 걸쳐 학살을 자행했다.

한편 전민특위 광주전남본부는 오는 10월께 함평군 불갑산 양민학살 현장에 대한 발굴을 벌이고 불교연대와 함께 위령제를 마련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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