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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 모습에 넋을 놓고 있는 일행들
천지 모습에 넋을 놓고 있는 일행들 ⓒ 지요하
백두산을 오르고 백두산 천지를 보는 일이야말로 이번 나들이의 주목적이요, 핵심 사항이었다. 그 뜻 깊은 일을 중국 땅으로 우회해서 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나에게 묘한 부담감과 곤혹스러움을 갖게 했다. 애초의 입금 비용에 포함되지 않은 일인당 1만6천 원씩의 '비자대'라는 것을 공항에서 별도로 내는 순간부터 그 사실은 좀더 명료해지는 것 같았다.

11일 중국 요동반도의 항구 도시인 대련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타고 심양을 거쳐 '연변조선족자치구'의 수도인 연길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부터 버스로 다섯 시간을 달려야 했다. 백두산의 앞쪽이 아닌 뒤쪽에서 백두산으로 접근한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가운데서 '장백산'이라는 중국 이름 표지판을 접하는 순간에는 내가 지금 우리의 백두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장백산을 오르는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은 시달려야 했다.

백두산 뒤편의 광활한 땅이 옛날 고구려 시대에는 우리 영토였다는 사실이 내게 묘한 아쉬움과 위안을 동시에 안겨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땅이 지금은 중국 영토일망정 '연변조선족자치구'에 속한, 그리하여 우리 말과 우리 글이 법적으로도 '공용'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은 내게 분명한 위안으로 작용했다.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의 유명한 '청산리 전투' 승전지를 거쳐 드디어 백두산에 도착했고, 백두산 중턱에서부터는 중국 국영회사에서 운영하는 지프형 승용차에 7명씩 나뉘어 타고 산을 올랐다. 일본 도요타와 미쓰비시에서 특별히 제작한 차들이라는 지프들의 탁월한 성능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지만 꾸불꾸불한 길을 20분 정도 마치 곡예 운전하듯 오르니 적이 아슬아슬 해서 등에서는 식은땀이 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백두산의 장엄한 모습에 수없이 감탄을 해야 했고, 중국이 백두산을 이용하여 한국인들을 상대로 돈을 꽤 잘 벌고 있다는 씁쓸한 생각도 해야 했다.

오후 3시쯤 우리 일행은 드디어 백두산을 올랐고, 마침내 천지 앞에 섰다. 지프에서 내려 경사가 가파른 70미터 정도의 모랫길을 누구보다도 먼저 오른 내 어린 아들녀석이 환성을 터뜨리며 아빠 엄마에게 빨리 오라고 재촉을 했을 정도로, 천지의 모습은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웠다.

백두산 정상은, 그리고 천지는 장엄과 신비의 분명한 실체였고, 한마디로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말로만 듣던, 그림으로만 보던 천지의 모습이 바로 이렇구나! 나는 벅찬 감격과 감동 때문에 연신 심호흡을 했다. 백두산 정상 천지의 맑은 공기를 수없이 들여 마시자니 한 순간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천지 앞에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 를 바치다.
천지 앞에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 를 바치다. ⓒ 지요하
한동안 사진 찍기에 바빴던 우리는 한 자리에 모여 북한 쪽을 바라보면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바쳤다. 우리 일행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백두산 정상 천지 앞에서조차 민족의 분단 현실을 체감해야 하는 우리 처지가 슬프고 스스로 안쓰럽기도 했지만, 우리는 민족의 평화 통일을 갈망하는 마음을 그 기도 속에서 더욱 뜨겁게 가슴에 아로새길 수가 있었다.

약간의 고소공포증 때문에 나는 더욱 조심을 하면서, 우리는 그곳에서 겨우 30분 정도 머물 수 있었다. 그것은 지프들을 운영하는 회사, 즉 중국 당국의 규칙이라고 했다. 너무도 아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 감성과 기억의 보따리 안에 장엄, 신비, 환상, 감격, 감동이라는 단어들을 가득 담아 가지고 내려오는 느낌이 실팍했지만, 그만큼 아쉬움과 허전함도 분명했다.

일단 지프들이 출발하는 곳으로 내려온 다음 우리는 방향을 조금 바꾸어 장백폭포를 향해 걸음을 했다. 장백폭포는 천지 가까이에 있는, 천지의 물이 흘러내리는 세 줄기의 폭포였다. 폭포의 길이가 자그마치 60미터라고 했다. 그리고 그 물은 송화강으로 유입된다고 했다.

폭포 가까이에 접근한 우리는 풍성한 계곡 물에 손을 담가보았다. 너무도 차가워서 10초도 견디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장백폭포 길에는 좀더 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한국 사람 못지 않게 중국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았다. 오르고 내리는 길에서 중국말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천지 앞에서 아들 한결(중1)과 기념 촬영을 하다.
천지 앞에서 아들 한결(중1)과 기념 촬영을 하다. ⓒ 지요하
중국 사람들 속에서 나는 문득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내가 한국 사람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한동안은 침묵을 하기도 했다. 겨레의 땅을 밟고 백두산을 앞쪽으로 오르지 못하고 중국 땅으로 우회해서 백두산 뒤쪽을 오른 처지인 우리를 그들이 어찌 볼지 절로 궁금해지는 마음이었다. 우리를 보는 그들의 시선 속에 혹 '연민' 같은 것은 없을까. 그리고 그 연민 속에 혹 '경멸' 같은 것이 껴들어 있지는 않을까.

나는 참으로 그 괜한 궁금증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 또한 분명한 분단 상황의 한 가지 소산일 터였다. 공연한 생각에 얽매이는 나 자신을 스스로 핀잔하면서도, 분단 상황의 지속 속에서 민족의 영산(靈山)이라고 우리 모두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백두산을 중국 땅을 우회해서라도 밟아보려고 애쓰는 우리 처지가 참으로 구차스럽고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민족의 분단 상황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나 평화 통일에 대한 열망 따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여유 있고 행복한 처지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관광의 즐거움만을 만끽하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터인즉, 그들의 희희낙락해 하는 모습을 보는 가운데서 중국 사람들에 대한 나의 괜한 궁금증과 부끄러움은 더욱 배가되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백두산 천지를 쉽게 볼 수 있었던 나의 행운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두산을 찾은 첫 번째 길에서 천지 모습을 한눈에 본 것은 분명히 행운에 속하는 일이라고 했다. 몇 년 전 신학교 동창 성직자들과 함께 백두산을 처음 찾았다가 급작스러운 날씨 변화로 천지를 보지 못했던 불운한 경험을 안고 있는 대전평화방송 사장 방윤석 신부님은 백화산을 다시 밟는 순간부터 마음이 몹시 조마조마했다고 했다. 불안과 긴장 때문에 백두산 정상의 하늘 쪽으로만 온 신경이 쏠렸다고 했다.

백두산을 열 번 올라야 겨우 두 번 천지를 볼 수 있다는 그 '비율'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정말 큰 행운을 얻은 셈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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