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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검찰공화국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물론 과거의 개념과 지금의 개념은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변화의 시대에, 이 과도기적 상황 속에서마저 여전히 검찰공화국이란 사실은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불행일 수도 있다. 왜 이런 모순된 언명이 진실일 수 있는가.

과거 검찰은 완벽하게 정권의 시녀요, 권력의 도구였다. 검찰의 모든 수사행위가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검찰의 소속원인 검사 모두가 그런 것도 역시 아니었지만, 일부 출세욕에 젖은 검찰간부의 알아서 기는 처신에 바탕해, 검찰 수사권은 정치권력의 목적에 봉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었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깨졌다. 그야말로 검찰에게는 경천동지할 만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결코 그들의 자기 반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검찰은 정치권력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났다.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검찰의 구성원 자신들이 과거 행태를 낱낱이 볼 수 있는 처지에 있다면 그들은 한때 정치권력의 지상명령이란 일종의 폭력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한번 일어난 일들은 반복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공권력적 폭력이 다시는 자행되지 않도록 할 장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강금실 법무장관이 지금까지 검찰을 유지시켜 왔던 조직의 유지 근거였던 검사동일체 원칙과 상명하복제에 대해 재검토를 하겠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쳐다봐야 그게 무슨 의미인지 파악할 수 있다. 검찰 스스로 반성한 것은 아니지만, 새롭게 등장한 개혁정권의 덕분에, 그야말로 외부적 요인에 의해 검찰에게 '정치적 독립'이란 과실이 주어지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필자와 만난 한 검찰 간부는 "지금 일선 검사들은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CEO"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게 무슨 얘기냐 하면, 검사 개개인이 모두 최고경영자와 같은 자율권을 누리고 있다는 의미다. 이제 검찰 간부를 통한 일선 검사에 대한 정치권력의 수사 중단 혹은 왜곡 요구가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인사권을 장악한 정치권력이 검찰 간부들을 통해 검찰권을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는 없는 시기로 접어들었다는 극명한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검찰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불행하게도 통제를 벗어난 검찰권의 자의적인 행사는 보기에 따라서 지극히 편파적으로 비칠 수 있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민주당은 얘기할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이 검찰권 행사가 오로지 민주당에게만 집중되고 있는가라고. 검찰로서야 굿모닝시티 사건을 조사하다 보니, 혹은 대북송금 의혹 가운데 플러스 알파 부분을 수사하다 보니 나오는 것을 난들 어쩌겠느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경험한 대통령선거전 정치현실을 감안해 보면, 민주당의 불만도 전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이 정치자금에 관해 불법한 일을 저질렀다면, 한나라당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왜 한나라당에 대해서는 수사를 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일 소지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의미다.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은 검찰 스스로의 처신에 달려 있다. 한 사람 한 사람 CEO인 검사 개개인의 의사가 공평한 공론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검사들이 정치적으로 각성해야만 한다. 이제 명령을 내리고, 판단을 하던 '윗선'이란 주체는 사라져 버렸다.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검찰 스스로의 판단이 사회 공익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과거와는 다른 의미지만 지금도 여전히 검찰공화국이란 오명을 씻을 수는 없다.

인간의 삶은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모두가 일정하게 법률을 위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걸면 걸린다"는 얘기는 개혁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그것이 개인간의 충돌로 드러나지 않는 한 법률이 개입해서는 안된다. 검찰이 법률지상주의에 빠져, 사회 공론에 위배되면서까지, 자의적으로 걸면 걸린다는 식의 수사권을 휘두른다면 그것도 문제다. 그럴 경우 검찰공화국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어떤 식으로 표출될지 짐작하기 어렵다.

따라서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검찰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에 의한 일정한 통제가 필요하다. 수사권은 양날의 칼이어서, 범죄를 예방하고 범죄자를 색출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사회를 숨막히게 만들 수도 있는, 그리하여 사회를 질식시킬 수도 있는 수단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것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은 정치권력에 의한 검찰권의 통제이지, 통제 그 자체인 것은 아니다. 양날의 칼인 검찰권력에는 일정한 사회적 합의에 의한 통제가 필요하다.

이미 통제되지 않는 검찰권력의 해악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 권력의 통제가 있었던 시절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해악인지는 모르나, 정치권력의 통제가 사라진 지금, 그러한 해악이 일반의 주목을 끄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청주지검의 몰래카메라 수사를 놓고 일선검사와 부장검사간에 벌이고 있는 공방이 이 시점에 불거지고 있는 것이 우연한 일은 아니다.

때마침 법무부가 검찰에 대한 외부감찰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정치권력의 검찰 통제가 존재했던 시절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이 사라진 지금도 검찰은 엄연한 권력이다.

권력은 어떤 식으로든지 통제돼야 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통제장치를 서둘러 마련할 필요가 있다. 변호사에서부터 출발해 이들 가운데 직접선거에 의해 임명되는 미국식 검찰제도 한 방법일 수는 있다. 검찰을 감찰할 수 있는 중립적인 기구를 마련하는 방안 등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

때마침 강금실 법무장관은 검찰이 내부적으로 갖고 있는 감찰기능을 법무부로 이관하는 문제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문재인 민정수석의 얘기대로 감찰 책임자를 외부의 중립적 인물에게 맡기든 어떻든 정치권력의 개입 가능성만 차단된다면, 검찰로서도 기분 나빠할 이유가 없다.

이미 검사동일체의 원칙이라든지, 상명하복제라든지 하는 기본적인 구조에 대한 메스가 가해지고 있는 이러한 시점에 검찰만 무풍지대일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검찰에 대한 감찰이라든지, 다른 수단의 견제 및 통제장치를 마련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치권력과 무관한, 사회적 합의에 의해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방안이 돼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검찰은 오히려 스스로의 막강한 권한을 잘못 행사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국민 혹은 사회 구성원의 반발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반발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자세를 보이는 것이 정도가 아니냐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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