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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거울> 표지
<생각의 거울> 표지 ⓒ yes24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의 <생각의 거울>(북라인, 김정란 역, 2003)을 읽다. 이 책은 철학 지망생이었던 한 작가가 써낸 흥미로운 철학 에세이다.

투르니에는 일상의 이런 저런 부스러기들을, 쌍(雙)을 지어 여러 개로 분류하고 그 짝패들을 통해 삶의 현장에서 작동하는 여러 철학적 개념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 사유의 음정(音程)은 <목욕과 샤워>와 같이 삶의 베이스에서부터 <신과 악마>나 <존재와 무>와 같은 추상(抽象)의 소프라노까지 옥타브를 높여간다.

이 책을 다 읽는데 달포 가량 걸렸다. 그렇지만 한 달이라는 시간은 이 책의 행간(行間)의 답답함이 아닌 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나른한 봄날에 꽃놀이 나온 노인네 마냥 느릿느릿, 마주 서 있는 '개념'들의 사이를 거닐듯이 읽었다. 미셸 투르니에가 삶을 다루는 방식은 딱딱하거나 근엄하지 않다. 말랑말랑하고 유쾌하다.

미셸 투르니에의 '거울'은 라캉과 이상(李箱)의 것보다 얇고 하루키와 영화 <거울속으로>의 것과는 달리 발랄하다. 투르니에의 '거울'은 평범하다. 그의 거울은 우리가 매일 보는 그것과 상사(相似)하다. 그 거울은 '대칭'을 이루는 양편의 축이다.

사람들은 거울의 대칭성을 이용해 화장을 고치거나 머리를 매만진다. 투르니에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일상을 '상대화'하고 개념을 '상대화'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지성은 경험에 자연상태로 주어지는 절대적인 것들을 '상대화하는' 능력이다."(200쪽) 이 말에 따르면, 투르니에의 거울이 다른 사람들의 것이 비해 조금 더 지적(知的)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 거울의 양편으로 각기 '대칭'인 개념을 위치시킨다. 각각의 개념은 실증적인 하나의 '반대 개념'을 통해 자신의 내적 면모를 드러낸다. 그렇다고 투르니에가 대립되는 짝패들만을 모아 놓은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서로 유사성이 도드라져 보이는 사물들을 접근시켜보기도 한다. 그러면 막연하게 같은 구역에서 서식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것들이 서로 간섭하면서 색다른 의미의 파장을 만들어낸다.

가령 트루니에는 '불세출의 바람둥이'들인 돈 주앙과 카사노바의 대비(對比)를 통해 이들의 동질성에 섬세한 균열을 내고 거기에 신선하고 유쾌한 의미를 채워 넣는다. 이것은 삶에 대한 통찰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삶을 바라보는 투르니에 눈은 날카롭다기보다는 섬려(纖麗)하고 심각하기보다는 사려 깊다. 그는 말하기보다 듣고 생각하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현대 프랑스 문인들 중 가장 앞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하나라는 평에 걸맞게 트루니에의 문장은 군살 하나 없이 늘씬하다. 그리고 그 걸음걸이는 경쾌하다. 꽤 무거운 생각을 짊어졌을 때조차 그렇다. 읽어보시라. 종종대는 문장으로 인해 입이 즐거워질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와 더불어 오늘날 철학의 왜소화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터이고 물론 그 중 우선은 천박한 세태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몇몇 철학 전공자들의 문장에 대한 게으름 또한 그 한 까닭이리라 생각한다. 철학자가 꼭 문장가일 필요는 없겠지만 복잡하고 심오한 사유의 타래를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풀어 보여 줄 수는 철학자들이 있다는 건 썩 좋은 일이다. 투르니에의 글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에 대해 말할 때 빠트릴 수 없는 것은, 이 책이 '김정란'에 의해 번역됐다는 사실이다. 그는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문학동네, 1997) 번역으로 1998년에 백상출판문화상(번역 부분)을 수상한 바 있다. 말하자면 번역자가 김정란이라는 사실은 이 책의 프랑스어에 대한 한국어의 대응이 신뢰할만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의 불어 원문을 볼 수 없거니와 설사 어떻게 볼 수 있다하더라도 읽을 수조차 없는 나로서는 이 책의 번역이 잘된 것인지 못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것은 전문가들의 영역에 속한 것이고 몇 년 전의 일이긴 하지만, 김정란은 이미 그 능력을 인정받은 바 있다. 나는 6년 전 백상출판문화상(번역부분) 심사위원들의 판단을 존중한다.

그렇지만 이 책의 번역을 신뢰하는 것은 번역자의 수상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김정란이 언어를 통해 존재의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용기 있는 시인이자 일견 하찮아 보이는 쉼표 하나도 보듬어 이름을 붙여주는 평론가이기 때문이다.

시 평론집 <영혼의 역사>(새움, 2001)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김정란은 평범한 시어(詩語)들의 복중(腹中)에 새롭고 풍부한 의미를 점지(點指)하는, 삼신할미 같은 평론가다. 그만큼 김정란은 한국어의 결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불문학 전공자다. 명문장가로서의 투르니에의 명성이 한국에서도 여전하다면 그것은 대개가 김정란의 몫일 것이다. 투르니에는 운이 좋았다.

아침저녁 나절로 삽상한 바람이 부는 요즈음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철학과 만나보는 것이 어떨지.

생각의 거울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북라인(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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