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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울던 마을> 겉그림
<개구리 울던 마을> 겉그림 ⓒ 창작과비평사
거뭇거뭇한 숲속에 앉아
퍼런 못자리 물 속에 앉아
너는 울어라.

도랑물 흐르는 긴 둑을 따라
듬성듬성 포플러 서 있는 신작로를 따라
너는 울어라.

학교에서 공을 차고 늦게 돌아와
꾸중 듣고 저녁을 굶고 엎드려 잠든
동생의 꿈속에서 너는 울어라.

숙제 공부에 지친 머리
바라보는 밤하늘의 별들은
나지막히 떠서 눈물에 어려 빛나고
너는 울어라.

멀리 돈벌이 가신 아버지
소식이 궁금해
오늘도 근심에 젖은 동무의 눈앞에
가물가물 호롱불빛은 떨고
너는 울어라.

내일은 며칠인가?
학교에 가져갈 돈을 걱정하는
아가의 가슴속에
너는 울어라.

십릿길 읍내 장에 나물을 팔고
자갈돌을 밟으며 돌아오시는 어머니
빈 광주리에는 너의 노래가 담겼다.
온몸에 너의 노래를 감고 오신다.

도랑물 흐르는 긴 둑을 따라
듬성듬성 포플러 서 있는 신작로를 따라

외딴집 불빛이 빨간
그 앞을 지나

서늘한 풀잎들 숨쉬는
온 들판에서

개구리야,
개구리야,
너는
울어라.

- 이오덕. '개구리 소리 2'. <개구리 울던 마을>(창작과비평사, 1981)

지난 8월 25일 아침에 이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아침에 전화로 연락을 받고 알았습니다. 저와 함께 일하는 선생님 한 분은 이오덕 선생님이 1983년에 '한국 글쓰기 교육 연구회'를 만들었을 때부터 함께 일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아침에 충주에서 소식을 듣고 저에게도 알려주시더군요.

지금 언론 보도나 여러 분들이 추모하는 글을 보면 이오덕 선생님이 해온 많은 일 가운데 '평생 교육자의 길을 걸은 분'이며 '어린이문학가'이고 '우리 말 바로쓰기'를 했다는 대목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 빠뜨린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1960년대부터 아이들을 가르칠 때 해온 '글쓰기 교육' 이야기입니다.

이미 60년대부터 아이들 글과 그림을 받아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당신 집에 차곡차곡 모아오셨습니다. 이 열매는 지난 1998년에 <허수아비도 깍꿀로 덕새를 넘고>(보리)라는 책으로 나왔습니다. <허수아비도 깍꿀로 덕새를 넘고>는 1962~1964년 사이에 이오덕 선생님이 가르친 '경상북도 상주군 청리 초등학교 아이들 68명'의 글과 그림을 모은 책입니다. 무려 마흔 해 앞선 때 가르친 제자들(지금은 모두 아줌마, 아저씨가 되었지요) 글과 그림을 차곡차곡 모아놓고 있다가, 고운 글과 그림을 세상에 빛을 보게 한 거죠.

<허수아비도 깍꿀로 덕새를 넘고> 겉그림
<허수아비도 깍꿀로 덕새를 넘고> 겉그림 ⓒ 보리
'안개' - 박갑분, 1964.4.20

안개 속에 발간 살구꽃이
하얀 안개 속에 살구꽃이 발갛게
비칬다.
살구꽃에 해가 비치면
살구꽃이 얼마나 좋아할까?

'내 동생' - 박근임, 1962.11.17

나는 집에 강깨
동생이 울고 있는데
눈 안에
동그란 눈물이
반짝합니다.
나는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아이들이 마음 문을 열 수 있도록 '글쓰기 교육' 첫발을 떼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또 위(교육청)에서는 아이들에게 '동심 천사주의'에 가득한 시만 쓰도록 강요했습니다. 아이들의 생각힘(상상력)을 죽이고 억누르면서 곱디고운 노래로만 부르도록 하는 걸 시켰지요. 이오덕 선생님은 일찍부터 이런 '거짓된 시 교육'을 비판했습니다. 시중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아동시론>(세종문화사, 1973)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거짓된 동시'를 날카로운 목소리로 비판합니다.

'별' - 1956년 전국 글짓기 내기 입선작

별들은 눈동자랍니다.
초록빛으로 반짝이는
우리 아기 눈동자 같은
별들은 눈동자랍니다.

별하늘은 꽃밭이랍니다.
까만 밤하늘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별하늘은 꽃밭이랍니다.

(** 이오덕 선생님에게 비판을 받은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동시론> 겉그림
<아동시론> 겉그림 ⓒ 세종문화사
학교 현장에 있으면 이런 동시를 숱하게 만난다지요. 먼저 '동시 작가'들이 이런 동시를 쓴답니다. 다음으로는 학교 교사가 교과서에 실린 이런 동시를 읽어 주고, 이런 동시가 훌륭한 동시라고 칭찬하는 한편, 아이들에게 이런 글을 쓰게 한답니다. 그리고 글짓기 대회가 있으면 교사가 미리 훈련을 시켜서 이런 글을 쓰도록 해서, 글짓기 대회에 심사위원으로 나가서 작품을 들여다 보노라면 거의 똑같고, 거의 다 비슷한 시만 주욱 나온다지요. 그리고 이렇게 써서 어른 시 흉내를 내고 '동심 천사주의' 시로 써야 입선이 되고 대상을 받고 금상을 받는다 하고요. 그래서 이오덕 선생님은 1960년대부터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글쓰기를 시키려 애썼습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할 테지만 아직도 아이들 현실은 어둡습니다. 요즘은 학원이다 조기교육이다 영재교육이다 뭐다 해서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바쁘고 힘듭니다. 지난날 아이들은 가난한 집안에서 부모 못지않게 일을 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자랐습니다. 산에 가서 참꽃을 따먹고 열매를 따먹고 칡을 캐고 나물을 뜯어서 죽을 끓여 먹었죠. 그런데 아이들이 쓰는 '동시'라는 건 자기들 현실살이, 곧 자기가 살아가는 모습이나 속에 품은 생각을 도무지 나타내려 하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이오덕 선생님은 아이들을 가르칠 때 '머리'로만 가르칠 게 아니라 '마음'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교사가 아이 앞에 마음 문을 열어 아이들도 교사 앞에서 마음 문을 열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죠. 그런 '마음 문 열기'로 '글쓰기 교육'을 했고, 아이들이 자기 삶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털어놓으며 후련함, 속시원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와 함께 다른 동무들도 마찬가지로 겪는 가난, 배고픔, 힘듦, 고단함을 비롯해서 자연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면서 자기 스스로도 소중하게 생각하도록 했지요. 더불어 자기를 키우려 애쓰는 부모를 생각하고, 부모가 하는 일을 돌아보고 살피게 하면서 부모님이 얼마나 애쓰는가, 또 얼마나 고단한 일을 하는가, 또 일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쳤습니다. 그와 함께 아이들은 '공부' 못지않게 '놀이'가 중요하므로, 공부 굴레에 너무 뒤집혀 씌워지지 않게 마음껏 산과 들과 물에서 뛰놀고, 자기가 느낀 마음을 글로 담고 그림으로 담도록 가르쳤지요.

처음에는 거의 혼자서 하던 이런 글쓰기 교육 운동을 <아동시론>(세종문화사), <글쓰기 교육의 이론과 실제>(온누리),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한길사) 같은 책으로 묶어냈고 마지막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쓸까>(보리)와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보리)로 갈무리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1983년 '한국 글쓰기 교육 연구회'를 열어서 현장(학교) 선생님들이 손수 자기 먼저 공부를 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도록 이끄는 모임을 만든 거고요.

<2>

"만일 아동들이 자기 자신의 생활과 마음을 자기의 말로 쓰게 된다면, 거기 유사 모조품이란 거의 있을 수 없다. 천 명의 아이가 쓴 천 편의 시는 천의 얼굴처럼 다 다를 것이 당연하다. 또한 같은 아이가 쓴 같은 제목의 시라도 어제 쓴 것과 오늘 쓴 것이 달라야 한다. 그것은 이 아이가 어제 본 것을 오늘 꼭 그대로는 보지 않기 때문이고, 어제보다 오늘은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이 작품들은 어떠한가?"
<아동시론>(세종문화사, 1973) 25쪽


"아동의 감동은 끊임없이 새로와지는 감동이다. 그리고 이 새로와지는 감동은 마음 속에 두고두고 간직해 둔 그것이 아니라 생활의 현장에서 발화되어 갱신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던 이오덕 선생님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그대로 소중한 목숨붙이이고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도권 교육 틀 안에서는 아이들이 아이들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고 판박이가 되듯, 앵무새가 되듯, 획일화가 되었다지요.

"아동들이 쓰는 말이 이렇게 획일적으로 된다는 것은 그들의 감각과 사고가 획일화된다는 것이요, 개성의 사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시는 우리 아동의 개성-곧 우리 민족의 생명을 학살하고 있다"
<아동시론>(세종문화사, 1973) 52쪽


<참 교육으로 가는 길> 겉그림
<참 교육으로 가는 길> 겉그림 ⓒ 한길사
아이들 천 명이 있으면 아이들 목소리는 천 가지요, 아이들 생각도 천 가지요, 아이들 글도 천 가지여야 할 텐데, 아이들이 써낸 글이라는 게 하나같이 똑같다면 어떠할까요. 아이들이 쓴 시가, 일기가, 감상문이, 독후감이 모두 똑같다면 그건 교육이 잘된 것일까요?

여기서 이오덕 선생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깨움 하나가 솟아납니다. 그건 바로 '일하는 아이들', '자기 삶을 사랑하고 가꾸어 나가는 주체가 되는 아이들'입니다.

"나는 교육자가 진짜 교육자가 되려면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머리만 쓰는 노동뿐 아니라 몸도 열심히 쓰는 노동을 해야 참교육을 할 수 있다. 몸과 마음을 고루 다 쓰기에 교원이란 좋은 직업이고 교사들은 행복하다. 머리만 쓰는 사람은 불행하다. 몸만 쓰는 사람도 불행하지만, 머리만 쓰는 사람은 더 불행하다. 더구나 교육자가 머리만 쓸 때 그 자신만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가 가르친다고 하고 있는 아이들까지 불행하게 만든다."
<참 교육으로 가는 길>(한길사, 1990) 29~30쪽


'일하는 아이들'이란 자기 삶을 사랑하는 아이들입니다. 자기 집 형편을, 식구들 모습을, 이웃사람을, 이웃 동무를, 자기가 살아가는 동네를, 자기가 사는 동네 자연 환경을, 자기 집에 있는 집짐승을,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만나는 온갖 목숨붙이들 생명을 사랑하는 아이들입니다.

자기가 신은 신발을 자기 손으로 빨 줄 알고, 자기가 입은 옷을 빨고 널고 갤 줄 알며, 자기 가방은 자기가 챙기고, 자기 숙제와 공부는 자기 힘으로 하며, 자기가 먹은 빈그릇은 자기가 설거지할 줄도 아는 아이들입니다. 부모가 주는 대로 받아먹기만 하거나, 부모가 모든 것을 다해 주는 아이가 아닙니다. 신문팔이로 용돈을 벌기도 하고, 산에 가서 나물을 캐기도 하며,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기도 하고, 겨울엔 땔감나무를 해오기도 하는 아이들입니다.

학원과 과외로 온갖 지식만 머릿속에 잔뜩 집어넣으며 많은 것을 아는 요즘 아이들이지요? 그러나 이 아이들은 부모가 무슨 일을 하며 돈을 버는지, 돈 버느라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 형제자매들과 동무들은 어떤 형편에서 살고 있는지, 우리 이웃은 어떻게 지내는지, 꽃과 나무와 벌과 나비와 개와 고양이와 소와 물고기와 새들 같은 생명은 어떻게 어우러지는지는 모릅니다.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을 줄은 알지만, 밥그릇에 밥이 담기기까지 어떤 징검돌을 거치는지, 부모는 어떻게 밥을 해서 밥상에 얹는지도 모르지요.

이오덕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또 부모님들에게, 또 학교 현장 선생님들에게 '일하는 아이들'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일과 놀이를 하나로 모두어 사랑하고 즐길 줄 아는 아이들로 키우며 우리 사는 삶을 가꾸려고 했습니다.

"쉬는 시간에도 점심 시간에도 놀게 해 주십시오. 아이들은 놀면서 자라납니다. 아이들은 놀 권리가 있습니다. 놀고 있는 동안에 서로 돕는 삶을 배우고, 어려움을 이겨내는 슬기를 배우고, 정을 나누게 되고, 살아 있는 말을 배웁니다. 놀아 보지 못한 아이들은 병신이 됩니다. 아이들의 놀 권리를 빼앗는 것은 교욱이 아니요, 어른의 폭행입니다.

유년시절과 소년시절에 운동장에서, 골목에서, 산과 들에서 냇물과 바닷가에서 동무들끼리 즐겁게 놀아본 기억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고향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애국교육은 지긋지긋한 국기 그리기나 무궁화 그리기의 되풀이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이들이 즐겁게 놀 때 선생님들도 함께 놀아주십시오. 그러면 그 놀이가 아이들도 모르게 저절로 공부가 될 것입니다. 그 밖의 다른 실습이나 작업을 할 때도 놀이가 연장된 상태에서 할 수 있다면 이보다 훌륭한 교육이 없겠습니다."

<참 교육으로 가는 길>(한길사, 1990) 82~83쪽


<3>

그런 이오덕 선생님은 살아 살아 씻지 못한 아픔 하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건 일제 강점기 때 교사로 있는 몇 해 동안 `일본말'을 `국어'로 가르쳤던 일. 그때 일을 놓고 뉘우치는 교사가 많지 않습니다. 보통은 버젓이 탈바꿈해서 아이들 앞에 선다지요. 하지만 이오덕 선생님은 `일본말'을 `나랏말'인 듯 가르친 일을 잊지 못하고 늘 그때 일을 돌아보면서 평생을 `거짓말'을 가르치지 않는 교사로 살고자 다짐했습니다.

이오덕 시 - '앞집' <개구리 울던 마을>(창작과비평사, 1981)

오늘 아침에도 굴뚝에 연기가 안 난다.
아버지는 공장 일을 한 달째 쉬고
일곱 식구에 계집애가 다섯.
이제 조금만 더 자라면 언니를 따라
서울로 식모살이 가고 싶다는 은정이는
동생들을 달래면서 봄을 기다리는가?

어서 쑥아, 돋아나거라.
어서 달래야, 냉이야, 돋아나거라.


교사로서 마땅히 걸어가야 할 '참된 교육'을 하는 일. 먼저 이 교육을 '학교 안'에서 했습니다. 1986년에 교직을 떠난 뒤에는 '학교 밖'에서 했고요.

올해는 2003년. 이오덕 선생님은 교직을 떠난 뒤 열일곱 해 동안 학교 밖에서 '글쓰기 운동'과 '우리 말 운동'으로 교육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1925년에 나서 2003년이 되기까지 일흔여덟 해입니다. 일흔여덟 해 살아오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걸어온 교육자의 길이 이제는 멈췄습니다. 하지만 '이오덕 한 사람' 걸음이 멈췄다고 우리들이 걸어가야 할 '참' 길은 멈출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오덕 선생님 바람도, 또 이오덕 선생님에게 배운 사람들의 바람도 저마다 자기가 일하는 곳, 자리한 곳에서 온힘을 다해서 힘써 살아가는 삶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못 다 이룬 꿈은 제자들이 이루고, 못 다 펼친 생각도 제자들이 펼치면서 살아야지요. 이오덕 선생님과 얽힌 자료를 뒤지다가 <참 삶을 가꾸는 글쓰기교육> 회보 가운데 1985년 제7호를 보았습니다. 회보 첫머리에 실은 글을 조금 옮기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지난 1월 초순, 안동 모임 마지막 대화의 시간에서 한 회원이 아이들과 사귀는 방법을 말하면서 "아이들의 발을 씻어 주거나 업어 주면 곧 친해집니다"고 하던 것이 생각난다. 그분은 교직에 있는 분이 아니었다. 꼭 교직에 있어야 할 분 같았고, 교직에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그 아이들을 눈물과 땀과 피로써 지키고 가꾸는 것이 글쓰기 교육이요, 글쓰기 교육을 하는 교육자들의 길이다.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이러한 글쓰기 교육 동지들과는 너무나 잘 대조가 되는, 또 다른 '교육자'들을 우리는 본다. 글짓기 지도로 상을 타고 표창을 받고 점수를 따는 이들, 아이들에게 잔꾀와 비뚤어진 생각과 거짓을 가르치는 사이비 교육자들이 많다.

우리는 이런 장사꾼이 된 교육자들에게 연민의 정을 보낸다. 생각하면 어느 시대고 이런 무리들은 있었지. 쭉정이가 있기에 알곡은 더욱 소중하고, 어둠이 깊을수록 등불은 빛나는 것이지만, 다만 우리는 아이들의 불행을 애통히 여길 뿐, 아이들을 병들게 하는 장사꾼들의 말로가 준엄한 역사의 심판대 앞으로 직행하게 되어 있음을 알 뿐이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아이들의 삶을 가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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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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