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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군 토지면 오미동 전경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 전경 ⓒ 오창석
지리산의 능선을 등뼈로 삼은 거대한 용이 꿈틀거리며 강물을 마시러 내려왔다. 그것은 왕시루봉을 타고 내려와 청룡이 되고 반대편 병풍산으로 흘러내린 산줄기는 백호가 되었으니 말 그대로 좌청룡 우백호요, ‘금환락지(金環落地 - 지리산에서 선녀가 목욕을 하고 올라가다 금가락지를 떨어뜨렸다는 곳)’라 불리는 천하명당이었다.

풍수지리에 관한 지식이 별반 없는 사람이라도 너른 들과 그 앞을 굽이 도는 섬진강, 그리고 지리산 자락의 봉우리들이 뒷편에서 마을을 포근하게 감싼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보노라면 “아! 정말 사람이 살만한 곳이었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00여 칸의 대저택이었으나 현재 73칸이 남아 있는 운조루
100여 칸의 대저택이었으나 현재 73칸이 남아 있는 운조루 ⓒ 오창석
예로부터 조선의 3대 명당으로 불려왔던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五美洞)은 ‘정감록’에서부터 이중환의 ‘택리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의 주장과 문헌을 통해 후세에 복을 주며 현세에 살기 좋은 땅으로 손꼽혀 왔는데, 그 중심에 운조루(雲鳥樓 - 중요민속자료 제8호)가 있다.

운조루의 사랑채
운조루의 사랑채 ⓒ 오창석
200년의 역사가 넘는 이 곳은 1776년 류이주(柳爾胄, 1726~1797)에 의해 창건 되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73칸이지만 1782년 완공 당시의 규모는 100여 칸의 대저택이었다. 본디 대구 사람이었던 류이주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 곳에 터를 잡게 되었는데 “하늘이 이 땅을 아껴 두고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린 것”이라며 기뻐했다고 전한다.

집터를 닦는 과정에서도 이 땅이 ‘금구몰니(金龜沒泥 - 금 거북이 묻힌 곳)’로 불리는 명당임을 증명 해주듯 돌 거북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런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발복(發福)을 원하며 ‘오미동’으로 이주해 왔는데 기대와는 달리 명당이 준 복을 받아 집안이 크게 융성한 예는 찾아 보기 힘들었고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산을 탕진하고 이곳을 떠나야 했다.

통나무 속을 파내 만든 쌀독. 아래 쪽 구멍 마개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를 써 놓았다.
통나무 속을 파내 만든 쌀독. 아래 쪽 구멍 마개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를 써 놓았다. ⓒ 오창석
그렇다면 이곳은 명당이나 길지(吉地)가 아니라 오히려 흉지(兇地)란 말인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는 격언처럼 요행수나 바라고 이곳으로 온 이들에게 땅이 부귀영화를 가져다 주었을 리 만무하다. 노력과 정성을 통해 인재를 키우고 훌륭한 가풍(家風)을 만들어 간 이들을 통해 그들이 자리잡은 터 또한 빛나게 된다는 것이 자명한 이치임을 확인해 준 셈이다.

운조루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이름의 나무로 만든 쌀독이 남아 있는데 뜻을 풀이하면 ‘다른 사람도 이 쌀독을 풀 수 있다’는 내용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들에게 이 쌀독을 열어 구제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또 춘궁기에는 생선 따위를 굽는 일이 없도록 가족들에게 엄명을 내렸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인도주의적 가풍이야 말로 류씨 집안이 200여년 동안이나 운조루를 지키고 살아온 힘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운조루(雲鳥樓) 누마루의 난간. 투각 문양은 구름. 세로 기둥의 양각 문양은 새를 상징
운조루(雲鳥樓) 누마루의 난간. 투각 문양은 구름. 세로 기둥의 양각 문양은 새를 상징 ⓒ 오창석
또 류씨 가문에는 다른 가문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훌륭한 역사 기록들이 전해 왔는데 여기에는 가도(家圖)라 하여 다른 고가(古家)에서는 찾아 보기 힘든 건물배치도와 중수, 보수기록, 그리고 누대로 소장한 수많은 서적에 대한 정리 기록을 3~40년 간격으로 남겼다.

이외에도 류이주의 5대손 ‘제양’으로부터 손자 ‘형업’에까지 100여년 기록된 생활일기는 조선후기 생활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최고의 자료로 꼽힌다. 류씨 가문의 후손들은 관계에 진출하거나 저명한 문인으로 선대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그들은 명당에 자리 잡은 가문에 머물지 않고 선조들의 유품과 정신을 보존하고 계승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로써 오미동 ‘금환락지(金環落地)’는 류씨 가문의 후손들에 의해 진정한 명당이 되었다고 할 만 하다.

큰 사랑채와 맞붙어 있는 누마루. 아래에는 황소 두 마리가 끌었다는 마차 바퀴가 탈색된 채 널부러져 있다.
큰 사랑채와 맞붙어 있는 누마루. 아래에는 황소 두 마리가 끌었다는 마차 바퀴가 탈색된 채 널부러져 있다. ⓒ 오창석
그러나 지금 ‘시집 갈 때 꽃가마 타고 들어가서 상여 타고 나온다’고 했을 만큼 규모와 위세가 컸던 류씨 가문도 이제는 시간의 퇴적 속에 스러지고 쇠락한 모습이 역력하기만 하다. 누마루 아래에는 소 두 마리가 끌었다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창백하게 탈색된 채 널브러져 있고, 겨우 살림집 한 칸 건사하며 살고 있는 후손에게 운조루의 무게는 버겁게만 느껴진다.

저 들판도, 땀을 식혀주는 서늘한 바람도 옛날의 바람은 아닐 것이니, 영속하는 것이 없다 해서 서글퍼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부귀영화를 얻고자 ‘금환락지’라는 신기루에 미혹된 이들을 떠올리며, 퇴락한 빛깔의 운조루 홍살문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월의 허망함에 마음이 쓸쓸해진다.

근처 1~20분 거리에는 5대손 류제양과 교유한 매천 황현이 세거(世居)하였던 곳에 후학들이 세운 ‘매천사’가 있고, 백제유민들의 도일 길목이자 왜구, 왜병들이 경남지역에서 전라도로 넘어오는 관문이었던 석주관(성)과 그곳에서 왜병을 맞아 산화한 ‘석주관 칠의사묘’가 있다.

석주관(사진 오른 쪽)과 칠의사묘
석주관(사진 오른 쪽)과 칠의사묘 ⓒ 오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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