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지난 97년 대선에서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YS 밑에서 권력의 단맛에 심취한 그의 경남고(慶南高) 후배들을 주축으로 한 권력기관의 PK(부산-경남) 인사들은, 경기고(京畿高)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정권을 재창출하려는 여당 후보(이회창 총재)의 고교 후배들과 손을 잡았다.
그런 점에서 국세청의 징세권을 무기로 기업인들에게서 정치자금을 불법 모금한 이른바 '세풍'의 본질은 '경(京)-경(慶) 야합'이라고 할 수 있다.
무려 5년 여를 끌다가 최근 1심 재판에서 관련자 8명이 전부 유죄를 선고받은 '세풍(稅風)' 사건의 검찰 수사기록과 공판기록을 검토한 결과가 그랬다.
경남고 출신 PK 핵심인사들에게 DJ 당선은 곧 구속을 의미했다
YS의 중립 지시를 따르지 않고 선거에 개입할 수밖에 없을 만큼 그들은 이미 반DJ 정치공작에 깊숙이 발이 빠져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DJ 당선은 곧, 구속을 의미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거가 다가올수록 더 적극적으로 '반DJ연대'에 가담했다.
97년 10월 당시 강삼재 신한국당(한나라당 전신) 사무총장이 기자회견 형식으로 폭로한 'DJ 비자금 의혹' 사건이 그 첫번째이다. DJ 비자금 관련 자료는 청와대 사직동팀이 94년 불법적인 계좌추적을 통해 취득한 것으로 이를 지휘한 민정수석실의 배재욱 사정비서관이 97년 대선 전에 신한국당에 건네준 것이다.
사정비서관은 말 그대로 권력 주변의 비리나 부패를 단속하는 곳이다. 그런데 그는 97년 당시 여당인 한나라당이 국세청을 동원해 정치자금을 불법 모금하는 사실을 알고서도 이를 막지 않았을 뿐 아니라, 초기에는 모금을 꺼려했던 임채주 국세청장을 '격려'해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이 더 많은 돈을 걷도록 기여했다. 배재욱 비서관은 경남고-서울대를 졸업한 YS의 직계 후배이다.
안기부의 'DJ 죽이기' 정치공작은 더 치열했다. 권영해 안기부장과 박일룡 차장은 '윤홍준 기자회견' 같은 북풍(北風) 공작과 한국중공업 같은 공기업을 동원한 정치자금 지원공작을 직접 지시했거나 그 지휘선상에 있었다. 권영해 안기부장은 경주고-육사 출신이고, 박일룡 차장은 경남고-서울대 출신이다. 박 차장 역시 YS의 직계 후배이다.
YS의 차남인 김현철씨 인맥으로 분류된 권영해 부장은 YS의 중립 지시를 어기고 안기부의 '협조자'인 재미교포 윤홍준씨를 시켜 김대중 후보의 대북 연계 의혹을 제기하는 이른바 '아말렉 공작'을 수행했으며, 경찰 총수 출신으로 안기부의 국내담당 업무를 총괄한 박일룡 차장은 경남고-서울대 동문인 배재욱 비서관·정형근 한나라당 의원과 함께 정기적으로 3인 조찬회동을 갖고 대선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대책을 논의했다.
안기부 예산을 담당한 김기섭 운영차장은 이미 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96년 총선 당시에 안기부 예산 1000억원을 빼돌려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에게 전달한 전력이 있다. 이 안풍(安風) 사건 또한 한나라당의 '방탄국회'와 재판부 기피신청 등으로 5년여를 끈 끝에 최근 열린 결심공판에서 강삼재 의원에게 징역 9년형이 구형되었다. 신라호텔 상무로 재직하다가 YS 비서관으로 정계 입문한 김기섭 차장은 영남고와 서울대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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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고 동문의식은 언론인 본연의 감시기능까지 마비시켰다
'숭어가 뛰니 망둥어도 뛴다'는 말이 있듯이, 대선 당시 '장진호 진로그룹 회장 고문'과 '이회창 총재 특별보좌역' 명함을 사용하고 다닌 정치 브로커 한성기씨는 베이징에서 북측 인사들을 접촉해 '대선 직전에 판문점에서 1개 소대병력을 동원해 무력시위를 벌여달라'고 부탁하는 엽기적인 총풍(銃風) 사건을 모의하기에 이른다. 징역형을 선고받은 한씨는 경상남도 고성 출신으로 마산에서 상고를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석희 국세청 차장은 이미 92년 민자당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김영삼 후보에게 맞선 이종찬 후보를 '동문(同門)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발벗고 뛴 전력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97년 대선에서 드러난 그의 행동은 92년에도 노출된 잘못된 동문의식의 확대·연장인 것이다.
경기고의 마당발인 이석희 차장은 경남고 출신인 주정중 국세청 조사국장에게 '100대그룹 기본사항' 문건을 작성케 해 기업 규모, 재정상태, 기업주와의 친소관계를 고려하여 지원요구 대상업체와 요구 액수의 대강을 정하여 주로 경기고 동문 출신 기업인들에게 전화를 해 정치자금을 모금했다. 공교롭게도 경기고 출신 경제인 모임의 이름 또한 '경경회'(京經會)였다.
이석희 차장은 국세청을 동원해 모금한 정치자금을 금융계에 종사하는 경기고 동문들에게 부탁해 차명(借名)으로 관리하게 했다. 이처럼 세풍의 작동 메커니즘 속에는 모금에서 자금관리까지 경기고 동문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히 엮여 있었던 것이다.
세풍 사건은 97년 대선 당시에 폭로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동아일보 정치부 차장이었던 이도성 기자는 국세청을 동원한 정치자금 모금 사실을 알면서도 보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세풍을 적극 지원했으며 세풍으로 모금한 돈을 받기까지 했다. 그 역시 경기고-서울대 출신으로 이석희 차장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동문의식은 언론인 본연의 역할인 감시기능까지 마비시켰던 것이다.
97년 정권교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골품계 동문공화국' 되었을 것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는 지난 97년 대선에서 '반듯한 나라'를 구호로 내세웠다. 그러나 그 구호 밑은 슬쩍만 들춰도 '경-경 야합'의 연줄로 얼키설키 엮이고 삐뚤삐뚤 구부러져 있었다. 게다가 비겁하기까지 했다.
김대중 정부는 정권교체를 하고서도 핵심 주범의 도피와 거대야당의 '방탄국회' 및 체포영장 동의안 부결로 이들을 사법처리하지 못했다. 또 한번 정권이 바뀌어 5년만에 최근 1심 선고와 결심공판이 이뤄진 세풍, 안풍 사건은 정권교체가 되지 않았다면 다 묻혔을 대형 국기문란(國基紊亂) 사건들이다.
50년만의 선거에 의한 여야 정권교체가 없었다면, 정경유착의 고리와 4대 권력기관의 정치 개입 사슬도 끊지 못했을 것이고, 4대 권력기관의 '제자리 찾기'를 추진하는 현재의 노무현 정권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동문공화국'을 개국(開國)한 일등공신 경기고 출신들과 2등공신 경남고 출신들이 성골(聖骨)-진골(眞骨)로 군림하는 '골품계(骨品階) 동문공화국'이 되었을 것이다.
'세풍' 사건은 한 마디로 말해 '경기고 출신들에 의한, 경기고 출신들을 위한, 경기고 출신들의 국기문란 사건이었다. 그리고 경남고 출신들이 주축이 된 권력기관의 PK 인사들이 이들과 손잡고 적극 지원했다.
| | 97년 대선 '5대 국기문란 의혹' 사건 계통도 | | | 경기고-경남고 출신의 '야합' 구도 | | | | ■ DJ 비자금 의혹 폭로 사건
배재욱(청와대 사정비서관·경남고) → 강삼재(신한국당 사무총장·마산고)
* 배재욱 별건 구속
■ 세풍(稅風) 사건
이석희(국세청 차장·경기고) → 서상목(신한국당 기획본부장·경기고)/이회성(이회창 후보 동생·경기고)
* 이석희·서상목 등 징역형 선고(1심)
■ 안풍(安風) 사건
김기섭(안기부 기조실장·영남고) → 강삼재(신한국당 사무총장·마산고)
* 김기섭 구속, 강삼재 의원 징역 9년(구형)
■ 북풍(北風) 사건
권영해(안기부장·경주고)/박일룡(안기부 차장·경남고) → 정형근(신한국당 정세분석위원장·경남고)
* 권영해 등 관련자 6명 징역형 선고
■ 총풍(銃風) 사건
한성기(이회창 후보 특보·마산상고) → 이회성(이회창 후보 동생·경기고)
* 한성기 등 징역형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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