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론의 대표적 석학인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지난 8월 27일 고려대 법학관에서 있었던 '제3회 한국민주주의 특강' 여섯 번째 강의에서 "한국 정당구조가 어떻게 변화해야 한다고 보느냐"는 권오을 한나라당 의원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으로 대변되는 강고한 보수 양당 체제가 외부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최 교수의 이같은 발언은 우리가 곱씹어봐야 할 여러가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우선 '정당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최 교수는 정당과 정당의 역할에 대해 "사회적 갈등과 균열을 표출하고 대변하며, 공익과 공공선(公共善)에 대한 여러 경쟁적인 논의와 이슈들을 정책 대안으로 조직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당이 국민의 이해와 갈등을 조정, 대안을 제시하는 '대리 조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 양당 체제는 국민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노동자와 서민을 대변하지 않고 있고, 이로 인해 이들의 이해가 국회라는 제도적 공간 내에서 심도있게 다뤄지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한나라당도 민주당도 노동자·서민의 이해와 기대를 대변하는 조직과는 거리가 멀다.
한나라당은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이름으로 재벌 편향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고,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이라는 민주당은 국민연금법 개정을 통해 서민의 부담을 늘리는데 앞장서는 한편, 노동계를 압박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노동계 파업에 양당은 한 목소리로 "파업 자제"를 외치고 있지만, 정작 열악한 수백만 노동자 삶의 질 개선에 관해서는 어떤 대안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동일한 계층의 이해를 대변한다
이는 곧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현상 유지'를 지향하는 보수적 유권자 그룹만을 대변하는 협소한 대리 체제에 머물러 있음을 뜻한다. 대북관계를 접근하는 이념적 스펙트럼에 따라 '냉전세력이냐 탈냉전세력이냐'가 다를 뿐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통한 경제체제 개편을 양당이 모두 수용한다는 점에서 두 당은 동일한 계층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최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냉전·탈냉전의 갈등이 햇볕정책을 둘러싸고 좁은 범위에서나마 표출되고 있는레 반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져온 갈등구조는 정치적으로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최 교수는 한국민주주의 발전은 기존 보수 독점적 양당 체제를 해체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수 양당 체제 해체의 필요성이 여기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최 교수의 '보수 양당 체제 해체론'을 민주당으로 범위를 좁혀 살펴보자. 민주당이 한나라당에 비해 먼저 '발전적 해체론'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최근 민주당 신·구주류는 신당에 대한 현격한 입장 차로 육박전에 가까운 싸움을 벌이는 추태를 재연했다. 일찌감치 '이혼'해야 할 양쪽이 중도파의 중재로 억지로 한 이불 속에 동거하고 있으니, 이런 비상식적 행태가 발생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신주류가 주장한 '민주당 해체론'은 여전히 상당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주류의 반발로 신주류 스스로 민주당 해체론을 철회하고 말았지만,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는 한국 정당 발전에 커다란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ADTOP@
신주류의 발전적 해체 방침 철회는 구주류쪽 박상천 최고위원이 제기한 '민주당 정통성론'에 대한 반박 부재에 기인한 점도 있다. 사실 민주당의 뿌리는 해방 공간에서 지주 세력의 이익을 대변했던 '한국민주당'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이다. 한국민주당이 민주국민당을 거쳐 신익희·조병옥 등이 참여한 민주당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으니 기실 타당성이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박상천 최고위원은 민주당 해체 반대론을 펴면서 "새천년민주당은 신익희·조병옥 등이 참여했던 민주당을 뿌리로 하기 때문에 결코 지역 정당으로 볼 수 없다"고 역설한다. 이어 그는 "이 때문에 지역주의 극복, 전국 정당화를 위해 민주당을 해체할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의문스러운 것은 왜 하필 새천년민주당의 뿌리를 한민당이 아닌 민주당으로 규정하는가의 문제다. 인적 구성도 대변 대상도 다르지 않고, 간판만 바꿔 단 사실상의 동일 정당임에도 박 최고위원은 그 뿌리를 한민당까지 소급하지 않았다.
기자의 추측으로는 '아마도 한민당의 구성 인자에 상당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판단된다. 한민당의 주축 세력에는 이른바 친일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인촌 김성수 등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토지개혁을 밀어붙이면서 지주세력 중심의 한민당의 반발을 사기 전까지는 여당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보다 전략적으로는 새천년민주당에서 중도파로 분류되는 조순형 고문, 정대철 대표의 선친인 조병옥·정일형 박사가 민주당 창당의 주축 세력이었다는 점도 고려됐을 것이다. 선친이 만든 당을 해체하는데 두 정치인 2세가 적극 나설 수 없도록 발목을 잡기 위함이 아니었나하는 생각도 든다.
새천년민주당의 뿌리가 왜 조병옥·정일형의 민주당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리지 않는 점은 왜 하필 '민주당'이냐는 것이다. 민주당은 처음부터 '북진통일'과 '친미'를 표방하고 있었던 극우정당이었다. 조병옥의 경우 지난 56년 진보당 당수인 조봉암의 야당 통합 제의에 대해 "대한민국 국시를 도끼로 찍어 내리는 것", "소련의 적화정책에 호응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평화통일론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민주당을 새천년민주당의 뿌리로 규정하는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근본부터 뒤엎는 위험한 발상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민주당 뿌리론'을 거부하고 나면 결국 8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신민당을 뛰쳐나와 창당한 평화민주당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경우 해체론에 빌미를 제공할 수 있는 '논리의 박약함'에 직면하게 된다.
한나라당은 민주당보다 더욱 강고한 기득권 체제와 지역주의 구도에 편승해 정치를 해왔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런 점에서 비쳐본다면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지역정당 체제가 해체되는 것이 진정 국민을 위한 정치가 된다'는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정당 스스로 자발적인 변화 노력을 보이지 않을 경우, 최 교수의 예측대로 민주당은 외부 충격에 의해 해체되는 수모를 겪을 지도 모른다.
지금 호남은 계급적·계층적 이해에 따라 분화되는 과정에 있다. 과거와 같은 지역적 삶의 공동체로서 '호남은 하나'라는 인식이 해체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 만큼 호남민의 대변자임을 자인하며 별다른 노력 없이 특권을 향유할 수 있었던 동시에, 지역감정의 최대 수혜자였던 적잖은 호남 정치인들은 스스로 기득권을 벗어 던지고 같은 출발선상에 서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물론 민주당이 햇볕정책이라는 탈(脫)냉전적인 이해를 대변하고 군부독재세력으로 철저히 배제당한 호남이라는 소외된 지역의 울분을 대표한 정당이라는 정통성은 긍정적으로 기억돼야 할 것이다. 이는 호남 정치인들 스스로 호남을 지역주의로부터 자유롭게 할 때 더욱 그 역사적인 의미가 빛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