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웅--
어디선가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가 별도봉을 흔든다. ' 멀리 보며 즐겁게 걷는 길' 이라는 표지판을 벗어나자 확 트인 바다가 열린다. 이제 막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여객선 한 척이 그리움을 싣고 부두를 떠나려 한다.
제주시 화북동 바닷가 오현고등학교 뒤에 위치한 별도봉. 별도봉은 사라봉과 알오름이 기슭 자락에 맞대어 이어져 있다. 또 별도봉은 화산쇄설성퇴적암(화강암 포획)과 용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별도봉 정상봉에서 북측사면의 등성이가 바다 쪽으로 뻗은 벼랑이 속칭 '자살바위'며, 벼랑밑 해안단애에는 '고래굴'과 '애기업은 돌'이라 불리우는 기암이 있다. 특히 별도봉 바다쪽의 산허리를 끼고 정상을 잇는 1.8km의 산책로가 개설되어 이곳을 '별도봉 장수산 산책로'라 한다. 이 산책로에는 아침 저녁 많은 사람들이 조깅과 산책을 즐기기 위해 몰려 든다.
산책로 계단을 타고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니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며 걸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한발자국 걷고 바다를 쳐다보고, 또 한발자국 떼고 바다 한번 바라보고. 바다는 왜 이렇게도 항상 나를 사로잡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바다보다 더 예쁜 가을 풍경이 이곳에 펼쳐진다. 노랑, 보라, 하얀색을 띤 가을 꽃 위에 호랑나비 한 마리가 살며시 내려앉는다. 살금살금 다가갔으나 나래를 펴고 꿀을 따먹는 것이, 긴 여행에서 지쳐 잠시 낮잠을 자는 것 같다.
우-와-
바다를 옆에 낀 산책로가 한눈에 보인다. 저 만치 먼저 간 이가 뒤를 돌아다 본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한다. 나도 덩달아 발걸음을 멈춘다. 망망대해로 이어지는 바다에 길이 나 있다. 마치 금방 누군가 바다 길을 밟고서 걸어온 것처럼.
가을 햇빛이 쏟아진다. 살며시 옷을 걷어올리고 팔뚝을 내민다. 시커멓게 그을린 팔뚝에 햇빛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금빛 출렁이며 반짝이는 바다와 가을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풀 사이에서 귀뚜라미가 울어댄다. 어디에 있을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산길을 따라서 잘 정비된 산책로는 마치 도미노를 연상하듯 꼬불꼬불 곡선을 그어 놓았다.
산책로 끝에는 아스라이 걸터앉은 바위가 보인다. 금방이라도 바다 속으로 풍덩 떨어질 것만 같으면서도 산책로를 지키고 있다. 사람들은 그 바위 이름을 자살바위라 말한다. 이따금 이곳에서 세상을 비관하여 자살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지만, 이 아름다운 풍경을 뒤로 했다니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벼랑끝에서 바위를 붙잡고 있는 것은 돌과 나무. 그리고 이름 모를 들꽃이었다. 하찮고 힘없는 식물이 그 바위덩어리를 부둥켜 안고 있고 있는 것을 보고 세상 살아가는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고개를 넘어가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멀리 화북포구가 보이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해안 마을이 전설처럼 내려다 보인다.
그 전설 사이엔 매연과 오염, 그리고 무질서가 있고 그곳을 빠져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나 자신이 있다.
두둥실 흘러가는 뭉게구름 바로 밑에 원당봉이 보인다. 그리고 그 원당봉 뒤에는 아마 또 다른 세상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하늘이 어디까지인지 바다가 어디인지 온 세상이 쪽빛이다. 며칠을 굶어도 이 풍경에 취해서 실컷 포만감에 쌓일 것 같은 '빈곤 속의 풍요', '풍요 속 빈곤'에서 허덕이다 이곳에 달려오면 부자가 된 것 같아서 좋다.
가을 꽃 위에 잠자리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 차마 꽃잎 위에 냉큼 앉지 못하고 서성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만경창파. 하늘 끝이 바다 끝인 풍경에 넋을 잃는다. 이름 모를 가을꽃. 그 사이로 피어나는 억새가 또 다른 가을을 준비한다.
자연은 이렇게 그 색깔이 다른데도 서로 부둥켜안고 제 모습을 과시하는데, 인간은 왜 서로가 색깔 자랑을 하며 시기하고 헐뜯기만 하는 것인지. 그러나 가을 속 산책로는 말이 없었다.
산책로를 걸어가면 발바닥에 탄력이 있다. 별도봉 산기슭에서 피어오르는 흙 냄새와 꽃향기. 바다 냄새를 맡으며 걸으면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다.
나지막이 내려앉은 산기슭에 강아지풀이 자기 세상을 만난 듯 도토리 키 재기를 한다. 바람에 넘실대는 풍경이 꼭 이제 막 익어 가는 가을 벌판을 연상케 한다.
"지금쯤 가을이 내 고향 들녁을 지나가면 좋겠네요. 이렇게 맑은 가을 햇살이 내 고향 들판에 쏟아질 때 곡식들이 알알이 익어 가면 참 좋겠네요." 시인이 되어본다.
터를 잡고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며 정답게 살아가는 식물들 모습을 보니,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줄달음 치던 내가 걸어왔던 세상이 조금은 씁쓸해 보인다.
가을 속으로 떠난 아침 산책. 1.8km의 산책로에는 가을 풍경만이 담겨진 것은 아니었다. 그 속에 비쳐지는 내 자신. 그리고 식물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무수히 많다는 걸 깨닫게 한다.
그리고 그 산책로 끝에는 아직도 다 버리지 못하고 떠나온 지난 여름의 모습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산책로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하늘을 보니, 나무 사이로 흘러내리는 여름 햇빛이 아직 나무 끝에 걸려 있었다.
그 햇빛은 지루한 장마 끝에 찾아온 햇빛이 아니라, 풍요와 감사. 그리고 결실을 싹틔울 그런 햇빛이었다. 그런데도 어찌 여름 다음에 가을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여기까지 걸어온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