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요청한 한국군 전투병 파병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정치권에서 유엔 결의를 거친 다국적군 형태의 파병은 추진할 수 있다는 의견이 연일 나오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채택을 추진하고 있는 유엔 결의안과 이에 바탕을 둔 다국적군은 '유엔의 고깔은 쓰되 미국의 기득권은 유지하겠다'는 내용이어서 이를 근거로 파병을 추진한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다.
즉, 유엔이 미국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유엔 결의안과 다국적군 구성으로는 미국의 침략전쟁 및 강압적인 점령에 국제적인 정당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유혈사태로 얼룩지고 있는 이라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부시 행정부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으로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를 상대해왔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를 철저하게 무시해온 부시 행정부가 유엔과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한 것은, 이라크 반미 세력의 격렬한 저항으로 미군 등 사망자가 속출하고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전후 비용이 폭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내년 11월로 예정된 재선에서도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부시 행정부는 유엔 결의안을 통과시켜 유엔의 고깔을 쓰고 이라크 점령을 마무리하되 미국이 치르고 있는 인적, 물적 부담을 줄인다는 복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어떠한 형태이든 유엔을 통해 다국적군을 구성하고 한국 등 동맹 및 우방국들의 군대를 여기에 포함시키고자 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무력에 의한 이라크 통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병력 파병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그러나 지난 5월 1일 전쟁 승리 선언이후 미군 사망자 수가 전시 때를 능가하고, 미영 연합군과 이라크 반미 세력간의 유혈충돌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군의 추가 파병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부담이 따르는 일이다.
미국 정치가 본격적인 대선전에 진입하고 있고, 경기침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추가적인 미군 파병은 '정치적 자살골'이 될 것임을 부시 행정부는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왜 미국은 유엔의 고깔을 쓰려고 하는가?
이에 따라 부시 대통령은 지난 5월 1일 전쟁 승리를 선언하면서 보였던 당당한 모습과는 달리, 9월 7일 대국민 연설에서는 870억달러에 달하는 '테러와의 전쟁' 추가 비용 지출을 의회에 요청하고, 유엔과 다른 나라들에게도 이라크 재건 계획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게 된 것이다.
부시 행정부 추진하고 있는 다국적군은 어떠한 형태이든 '유엔'의 고깔을 씌우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현재 이라크 주둔 미군을 13만명 수준으로 '동결'시키고 추가 병력은 유엔 다국적군의 모양새를 갖춘 동맹·우방국 군대로 채운다는 계획을 세우고 적극적인 외교전을 벌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라크 주둔 연합군의 지휘체계도 재조정해 성조기를 유엔기로 대체하거나, 미군과 유엔군이 '병립형'으로 지휘권을 행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러나 설사 미군이 유엔평화유지군으로 통합되더라도, 사령관을 미군으로 임명함으로써 유엔군을 '펜타곤'의 영향력하에 묶어두려고 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가 창피함을 무릅쓰고 굳이 '유엔'의 고깔을 쓰려고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미국'보다는 '유엔'이라는 이름이 각국의 파병 및 전후 비용 분담 유도에 훨씬 효과적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라크 침공 과정 및 그 이후에 국제사회의 반전 여론의 힘을 톡톡히 지켜본 부시 행정부는 '미국'의 이름으로는 파병 및 비용 분담에 대한 각국의 비판 여론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 관리들이 유엔 결의안을 "정치적 보호막(political cover)"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유엔을 미국은 물론이고 파병을 결정하려는 정부들에 대한 비판 여론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패막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전략은 벌써부터 실효를 거두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물론이고 정치권에서도 '유엔이 요청한다면…'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바로 이 지점에 함정이 있는 것이다.
썰렁한 국제사회의 반응
부시 대통령이 9월 7일 연설에서 이라크 문제 해결에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면서, 이라크 전후 재건과 자유 이라크 건설을 향한 3가지 전략적 목표를 제시한 것은 향후 미국 외교의 기본 방향을 밝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은 3가지 전략적 목표로 ▲이라크 국민과 자유수호를 위한 테러리스트의 분쇄 및 척결 ▲이라크 재건을 위한 다른 나라들의 지원 확보 ▲이라크 안보와 자립을 위한 이라크 국민 지원을 꼽았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미국 국민의 지지, 이라크 전후 비용의 추가 지출, 유엔의 다국적군 이라크 배치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유엔 등 국제사회의 분위기는 여전히 냉랭하다. "우리편에 서든지, 테러리스트편에 서든지 양자택일하라"며 극단적인 일방주의를 보였던 모습이 엊그제인데, 상황이 어려워지자 손을 벌리는 부시 행정부의 모습이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침공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정보를 왜곡시킨 것이 사후에 확인되면서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바라보는 국제사회의 시각은 더욱더 비판적으로 흐르고 있다.
특히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문제 해결에 대한 국제사회의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면서 '리스크'를 함께 부담할 것을 요청하면서도, 이라크의 석유와 정부 구성 등 향후 이라크 문제를 좌우할 핵심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여전히 통제권을 놓지 않으려 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동참 및 지지를 확보하는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파병을 요청한 국가들 가운데 다수 국가들이 곤란하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것은 이를 반증하고 있다.
9.11 테러이후 '애국주의'에 밀려 잔뜩 주눅이 들어있던 미국 내 비판 세력의 '부활'도 부시 행정부의 발목을 잡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민주당 경선 후보를 비롯한 비판 세력은 최근 들어 이라크에서 미군 사상자가 속출하고 전비가 폭등해 재정적자가 경제 불안의 핵심 요인으로 부상하면서, 부시 행정부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고 있다.
또한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정보와 전후 이라크의 무력항쟁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왜곡·은폐한 것이 확인되면서 '부시 때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와 때를 같이해 최근 부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처음으로 50% 밑으로 폭락하는 등 부시 행정부는 집권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맡고 있다.
미국을 '대체'하는 유엔이 되어야
유엔 결의안 채택 및 이에 따른 다국적군 구성과 관련해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유엔 다국적군이 미군과 영국군이 주축이 된 이라크 점령군의 '보조적' 위치에 머무르게 될지, 아니면 점령군을 실질적으로 대체하는 유엔 평화유지군이 될 것인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미국은 전자를 원하고 있고,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 등은 이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미국이 작성한 유엔 결의안이 통과되고 이를 바탕으로 다국적군이 구성될 경우, 미영연합군의 이라크 점령은 국제적인 정당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이 추가적인 병력을, 그것도 사실상의 전투병을 파병할 것인가의 여부를 유엔 결의안 통과 여부에 맞추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있다. 유엔 다국적군이 실질적으로 미영 점령군을 대체하지 않는 상태에서 파병할 경우, 미국과 영국의 전쟁주의자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고 이라크 내 반미세력의 공격 표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과정이 그랬듯이 미국이 대(對)이라크 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해 이라크 재건 및 신정부 수립을 유엔과 이라크인들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군대를 투입해도 이라크의 유혈사태는 종식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점령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파병시 가장 중대한 문제가 될 한국군의 안전문제가 유엔의 고깔을 쓰더라도 결코 해소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군의 추가 파병 여부를 고려할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유엔 결의안 통과 '여부'가 아니라 '어떤' 결의안이 통과되느냐, 즉 유엔이 미국의 역할을 실질적으로 대체한다는 조건하에서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즉, 파병 문제를 한반도 문제와 연계시켜 '국익론'을 내세우기 이전에, 우리가 이라크의 비극을 종식시키는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익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이라크 사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노력은 도외시하면서 편협한 국익론에 매몰된 나머지, 이라크인의 피눈물에 무감각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