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글동글 정감 넘치는 돌담길 끝에는 가을 꽃이 붉게 타들어 가고 있다. 세상에는 때묻지 않은 것이 없다지만, 그래도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아직 한편의 서정시 같은 곳이 감춰져 있다.
복원되지 않아서 더욱 아름다운 곳.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서 한적한 곳. 별은 아늑한 산골짜기에만 내리는 줄 알았는데, 바닷가 어촌마을에도 별이 내린다.
서귀포 칠십리 길을 하루에 다 걸으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잠시 발길을 멈추고 중문민속박물관에서 쉬어 가면 어떠리. 중문민속박물관은 중문관광단지를 중심으로 천제연 폭포의 맑은 물이 만나는 포구에 자리잡고 있다. 또 '베릿내'라는 옛 어촌 마을을 원형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곳이기도 하다.
베릿내. 듣기만 해도 예쁜 이름이다. 때문에 베릿내에 가려거든 세상을 색안경으로 보는 선글래스 대신, 어린 시절 수수깡으로 만들었던 장난감 안경을 끼고 떠나면 더욱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올 수도 있다.
베릿내라는 말은 '별이 내리는 내'라는 말로 수 백년 동안 자생되어온 포구마을이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야트막한 28채의 초가지붕. 정감 넘치는 돌담길 등이 대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어민들의 끈끈한 삶의 체취가 풍겨진다.
중문민속박물관 입구에 들어섰으나 들어가는 곳을 찾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얼마나 내 눈에 때가 많이 끼었으면 별이 내리는 내를 찾지 못할까?
"어디로 들어 가야되지?"
1시간동안 아스팔트를 달려온 친구와 나는 오래된 초가집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원형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을 잘 닦아 놓은 빌딩 숲만 생각했던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술렁술렁 뚫린 창호지 문. 오랜 풍우에 시달린 초가 앞에는 중문민속박물관이라는 표지가 있었다. 낡은 창살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니 훤히 보였다. 이곳이 중문민속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성천포구의 베릿내 어촌에는 제주 어민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각종 생활용품, 해초를 자를 때 쓰는 낫과 물고기를 담는 도구 등 유물 3천여점을 비치하여 조상의 끈질긴 삶의 숨결을 전해주었다. 베릿내로 들어가는 길은 혼자 걸을 수 있을 만큼 길이 좁았다.
흙덩이와 돌멩이. 바닷바람에도 끈질기게 살아온 잡초 등을 밟으며 걷는 기분도 이곳에서만 느껴보는 특별한 혜택이다. 그러나 초가와 어우러져 있는 풍경은 한마디로 페허나 다름이 없다.
"누구네 집이지?"
"집 주인은 어디로 떠났을까?"
아무리 도둑이 없다는 제주도이지만 정낭(대문)마저 없으니 인기척이라도 내고 들어가야지. 가을꽃 두 송이가 우리를 반간다. 목청을 가다듬고 헛기침을 냈으나 인기척이 있을 리가 없다. 집 주인은 이미 마을을 떠났고 이 마을 전체가 민속박물관이 되어버렸으니 길손들만 찾아온다.
초가집 옆에 있는 통시(재래식화장실)에서 "꿀꿀꿀" 거리면서 금방이라도 도새기(돼지)가 뛰어 나올 것만 같았다. 20년 전, 처음 방문한 종가집 화장실에서 겁을 먹은 나는 아직도 통시의 도새기 생각만 하면 겁이 난다.
마당에 서 있는 곡식창고를 보니 이번 태풍에 날아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이렇게 수많은 세월을 흘러 모진 비바람을 맞아가면서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곡식 창고를 보니 예전에 우리 조상님들의 우직함을 느껴졌다.
사실 '억겁의 세월'이라는 말을 많이 썼지만, 얼마만큼의 지나간 시간이 억겁의 세월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만난 곡식창고에서 그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작고 초라한 곡식창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곳에 무엇을, 얼마만큼 담았을까? 사계절 저온 냉장고와 냉동고, 김치 냉장고까지 사용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마당 가운데 서 있는 곡식창고는 그저 동화 속 이야기 같다.
겨울바람을 막기 위해 돌과 흙으로 쌓아올린 토담집은 따뜻함을 준다. 마치 시루떡을 쌓아올린 것처럼 흙 한 켠 쌓아 놓고 그 위에 다시 돌 한 켠 쌓아 놓고….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든 토담집인가? 그 토담집의 겨울은 얼마나 따뜻했을까?
모진 태풍에도 날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꽁꽁 묶어 놓은 초가집.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동여맨 밧줄이 처마 밑에 대롱댄다. 항상 제주는 태풍의 길목에 있었으니 이렇게 촘촘히 묶어 놓아야 안심을 할 수 있겠지?
아랫목도 없이 사는 우리들. 갑자기 따뜻한 아랫목이 생각난다. 지금은 황토방이다 찜질방이다 해서 숨이 막히는 공간에서 향수를 즐기고 있지만 중문민속박물관에는 황토집이 곧 황토방이다.
툇마루 위에 걸려 있는 망태도 중문민속박물관에서 초대한 손님이다. 그 속에 이것저것을 담았을 생각을 하니 작은 물건이지만 무겁게만 느껴진다. 어디 그 뿐이랴? 시장 갈 때도 망태 하나만 어깨에 둘러메고 있으면 그곳에 주섬주섬 물건을 담을 수 있으니 요술쟁이가 아닌가?
마당 끝에는 허드레 부엌이 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항아리. 그리고 많은 식솔을 데리고 생활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비록 세월의 흔적으로 색깔은 변했으나, 그곳에서 불을 지피고 손님을 맞았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조롱박에는 하얗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벽이 훼손되어 헐어진 틈새로 짚과 흙으로 기초를 다진 흔적이 보인다.
"참 단단하게도 엮었지?"
친구와 툇마루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주먹으로 벽을 쿵쿵 쳐보기도 한다. 매스컴을 통해 터지는 부실공사를 생각하면서 얼마나 단단하게 지어졌는지 실험을 해 보는 찰나다. 어림잡아 아직도 몇 백년은 더 버틸 수 있을 것만 같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 곳은 바로 이웃집이다. 누가 살았는지 농기구들이 꽤 많이 보관돼 있다. 이 집 주인은 마을에서 큰소리 깨나 치면서 살았던 집 같다. 마당도 넓고 초가도 안 거리(안채). 밖 거리(바깥채) 두 채나 되니 말이다. 덩치가 큰 민구들도 아직까지 그대로 보관 돼 있는 걸로 봐서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마을 사람들이 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바닷가 마지막 집에서 바다를 보니 포구 끝 호텔 지붕에 술 취한 해가 걸려 있다. 바다향기가 더욱 그리워지는 중문민속박물관. 그 곳에는 저녁 무렵 아물아물 피어오르는 굴뚝의 연기와 아련하고. 정겨운 고향이 있다. 그리고 이제 막 물질을 끝내고 돌아온 해녀들이 바다 속 전설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