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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고향집에는 여름이 되면 많은 꽃이 피었다. 꽃이라고 해야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등이라 요즘 기준으로 보면 품위 있는 꽃은 없지만, 담벼락 아래나 마당 구석구석에 꽃이 피었다.
장독대 옆에는 채송화와 맨드라미가 피어 있었고, 담장 밑에는 봉숭아가 피었다. 이렇게 꽃이 피는 것은 일부러 꽃밭을 가꾸어 심는 것이 아니었다. 작년에 떨어진 씨앗이 동면을 하고 봄이 되면 새싹이 돋아서 꽃이 피었다. 다소 무질서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자연스런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런 꽃들의 무리 속에 '꽈리꽃'이 빠지지 않았다. 꽃말이 수줍음인 꽈리꽃은 채송화처럼 앙증맞지도 않고 맨드라미처럼 시원함을 주지도 않는 큰 잎사귀에 가려 꽃이 잘 보이지도 않는, 꽃말 그대로 작고 볼품 없는 꽃이다. 볼품 없는 꽈리 꽃을 가꾼 이유는 마땅한 장난감이나 놀이가 없던 누나들이 꽈리를 불고 다니기 위함이었다.
당시 여학생들은 고무로 만든 탄력 좋은 꽈리를 불고 다녔지만 그것을 살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은 꽈리나무에 달린 꽈리를 따서 대신 불고 다녔다. 여름이 되어 큰 잎사귀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던 꽃이 떨어지고 봉지처럼 생긴 열매가 생기는데 꽈리는 이 봉지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누나는 매일 봉지를 더듬어 꽈리가 얼마나 자랐는지 만지다 그것이 작은 포도송이 정도 자랐다는 것을 확인하면 조심스럽게 봉지를 벌리고 꽈리 열매만 살짝 따낸다. 이렇게 열매만 따면 봉지는 그대로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살피지 않으면 열매를 따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것을 따서 손가락으로 계속 주물러 주면 열매 속의 씨들이 빠져 나오는데 급하게 빼려고 하면 꽈리가 찢어지기 때문에 끈질기게 조금씩 이것을 빼내야 한다.
씨를 다 빼내면 껍질만 남은 꽈리를 입에 넣고 바람을 불어 넣은 다음 혀로 누르면 '꽈르륵 꽈르륵…'하는 소리가 나게 되는데, 고무로 만든 탄력 좋은 인공 꽈리에 비해서 불기도 어렵고 잘 찢어지기도 하지만 시골 소녀들에게는 좋은 장난감이 되었다.
이 꽈리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올해처럼 태풍의 피해가 심했던 몇해 전의 일이었다. 그 해 늦가을 태풍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은 들길을 걸어가다 무너진 밭두렁 흙더미에 반쯤 묻힌 꽈리를 발견했는데, 꽈리는 그 흙더미 속에서도 빨갛게 변해 있었다.
흙더미를 파헤치니 흙에 묻힌 꽈리의 껍질은 썩어 내리면서 망사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고 열매는 빨갛게 익어 있었다. 그 색깔이 너무 고와 흙을 씻어 내고 햇볕에 말리고 있으려니 가을 하늘을 날던 고추잠자리들이 지친 날개를 잠시 접고 쉬어 갔고, 꽈리는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가면 갈수록 더욱 영롱하게 빛을 발했다.
요즘 꽃집에서도 꽃꽂이용으로 꽈리를 팔고 있는 것을 많이 봤지만 전에 태풍에 무너진 밭두렁에서 발견한 것과 비교할 수가 없다. 꽈리는 채송화와 맨드라미처럼 꽃 자체는 화려하지 않지만 수줍음을 머금고 끈질기게 내적 성숙을 이뤄 마지막에 아름다운 열매를 영글게 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