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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오띠우아깐을 나와 멕시코시티로 다시 향합니다. 예술가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꼬요아깐 거리에 가기 위해서지요. 민생고를 먼저 해결해야겠기에, 그 유명한 멕시코 음식 '따꼬'를 사 먹기로 했습니다. 옥수수나 밀로 얇게 반죽을 한 '또르띠야'에 고기나 채소들을 넣고 살사 소스와 곁들여 먹는 음식입니다. 한국의 멕시코 음식점에서 먹어 본 적이 있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재료가 우리 나라 것과 많이 다르지는 않기 때문에 가볍게 달려들었다가 한 마디로 '매운 맛'을 보고 말았습니다. 음식마다에 넣어 먹는 살사 가운데 무지하게 매운 것이 있었는데, 준비 없이 입을 댔다가 씹는 시간보다 매워서 호호 거리는 시간이 훨씬 많았습니다.

혀 끝에 남아 있는 매운 맛을 없애느라 과일 음료수를 청해 마셨습니다. 역시 길거리에서 팔고 있는 것이었지요. 멕시코 사람들은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가볍게 식사를 해결하는 편인데,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값이 싼 까닭이었습니다. 우리가 먹은 따꼬도 한 개에 7페소, 우리 돈으로 하면 700원 정도밖에 안 되고, 하마이까라는 과일로 만든 음료수도 5페소밖에 안 했거든요. 음료수는 투명한 비닐 봉지에 절반 넘게 담아 주는데 봉지 입구에 빨대를 넣어 질끈 묶어 주었습니다. 몇 시간 동안 그 봉지를 들고 다니면서 빨대를 쪽쪽 대느라 나중에는 손바닥이 온통 과일 당분으로 끈적거렸습니다.

오후 시간의 나머지를 둘러 보기로 한 꼬요아깐은 식민 시대와 1910년 혁명 이전의 건축물들이 꽤 많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여행을 함께 간 성준이 녀석은 그 언저리에서 몇 달 동안 살기도 한 터라 꼬요아깐으로 향하는 마음이 각별해 보였습니다. 좋았던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은 누구에게라도 그렇지요. 버스를 타고 꼬요아깐으로 가는데 앞쪽에는 탈곳이 없어서 뒷문으로 타야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벌써 오래 전부터 아무리 복잡한 버스라도 뒤로 타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 되었고, 혹시 뒤로 탔더라도 내릴 때 손수 차비를 내고 내리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멕시코는 그렇지 않더군요. 우리가 뒷문으로 타자 우리 앞쪽에 서 있던 사람이 차비를 대신 받아 한 사람 한 사람씩 손으로 넘겨 주는 게 아닙니까. 차비가 운전수 아저씨에게 전달되기까지 그것을 바라보는 일 또한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버스 뒷문은 닫지도 않고, 뒤쪽 유리창은 금이 가서 곧 깨져 내릴 것 같은데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모습도 새로웠습니다. 다들 그런가 보다,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 꼬요아깐 광장에 있는 성당 앞
ⓒ 김은주
꼬요아깐은 멋진 까페들과 작은 서점들, 공연하는 이들과 구경하는 이들로 북적거리고 있었습니다. 광장 벤치에 앉아 있는 연인들은 누가 보거나 말거나 열심히 키스를 나누고 있고, 아이들은 좋아라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Al Jarocho'라는 가게에서 파는 커피 맛은 참말로 일품이었답니다. 1953년부터 장사를 했다는 이 유서 깊은 커피 집은 커피를 사 가려는 이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줄이 50미터도 넘게 늘어서 있었거든요. 값도 한 잔에 6페소밖에 안 하는데 어쩜 그렇게 부드럽고 감미로운지요. 꼬요아깐은 우리가 일본 사람인 줄 알고 '사요나라' 하고 인사하는 멕시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프리다 깔로 기념관이나 디에고 리베라 박물관, 트로츠키 기념관 들은 전부 문을 닫은 시간이어서 다음을 기약하면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산책 나온 개가 너무 이뻐서 털을 비비적비비적 한참이나 만졌다는 것도 잊고, 달콤한 시럽을 뿌린 츄러스 한 줄을 먹다가 손에 묻은 것을 쪽쪽 빨아 버렸다는 것 말고는 아주 가볍고 유쾌한 산책이었습니다.

집에 왔더니 손님들이 아주 많이 오셨네요. 아래층에 사는 마사노리의 친구들과 정훈 형 여자 친구의 룸메이트까지 집안이 시끌벅적합니다. 손짓 발짓 섞어서 데낄라 한 병이 끝장날 때까지 주거니 받거니 나눈 이야기가 아침에도 꿈결처럼 왕왕댑니다. 자, 이렇게 두 번째 밤이 가고 제 멕시코 여행의 최대 위기, 사흘째 아침을 맞이하는 참입니다.

사흘째 날에는 과나후아또라는 도시로 갈 작정이었습니다. 1988년에 유네스코 세계 유물 현장으로 지정된 도시로, 한때 세계 은 생산의 4분의 1을 공급했던 곳입니다. 아름다운 도시를 볼 작정에 들떠 있던 우리는 서둘러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술이 조금 과했던 성준이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뭐, 집에서 쉰다는 것이 그리 훌륭한 대안은 아닌 것 같아서 조금 무리해서라도 일정을 소화하기로 했습니다.

날이 밝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출근 시간이 되지는 않아서, 거리는 다소 한산한 편이었습니다. 지하철을 타려고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저만치 세 명의 남자 아이들이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많이 먹어 봐야 열댓살이 될까말까 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이른 시간이기도 했고, 학교 가는 아이들 차림은 아니고 해서 그냥 별탈 없이 지나가기만을 바랐지요. 가슴이 먼저 벌렁거리기 시작했는데, 무조건 그 곳 사람들을 불량스럽게 보려 하는 내 선입견이고 편견일 것이다, 속으로 자신을 달래던 참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우리 앞을 막아서면서 손을 내밀더군요. 돈을 달라는 것이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지갑을 열었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웃으면서 외면하고 가려고 하는데 성준이 가방을 붙들고 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명은 카메라 가방을 잡고, 한 명은 돈이 들어 있는 작은 소지품 가방을 잡고 늘어지고 한 명은 성준이 머리며 팔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반대쪽에서 성준이 배낭을 붙들고 늘어졌지요. 너무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우리 말로 "도와 주세요!"를 외쳤습니다. 저만치 어른들 몇이 그런 우리들을 구경하고 서 있었습니다. 도와 줄 생각도,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도 없는 무심한 표정들이었습니다. 성준이가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녀석들이 성준이 안경을 갑자기 잡아 채더니 들고 가 버렸습니다.

아이들이 가 버린 다음에야 두 명의 어른들이 와서 괜찮으냐고, 뭘 잃어버린 것이냐고 물어 보고는 자기들끼리 무어라 떠들다가는 가 버렸습니다. 멍해서 서 있다가 그 아이들을 찾으러 가야겠다는 성준이를 억지로 뜯어말리고, 그냥 액땜했다 생각하자고, 우선 빨리 여기를 떠나자고 얘기하는 중인데 그 녀석들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손에는 맥주 캔을 들고 있었지요. 저는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데 안경이 없어서 사람 얼굴도 제대로 안 보이는 성준이는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보더니 아이들 중 한 명이 우리에게 맥주가 들어 있는 맥주 캔을 내던졌고, 다른 아이들은 길을 가고 있는 택시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맥주 캔을 던져 대고 있었습니다. 택시 유리창이 깨져 나가는데도 택시 운전수 아저씨는 내려서 그 아이들에게 소리 한 번 지를 법도한데 그냥 서둘러 거리를 빠져 나갔습니다.

나중에 얘기를 전해 들은 정훈 형이 아마도 마리화나에 취해 있었을 거라고, 그나마 그 정도니 얼마나 다행인 거냐고 얘기합니다. 주인 아저씨한테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했더니, 대뜸 그러시더래요.
"에게, 겨우 안경이야?"

죽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말씀이셨지요. 그런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머물렀던 산또 도밍고 델 꼬요아깐의 꼬빨 거리는 말입니다. 그런 일을 겪고 보니 하루 종일 일이 꼬이지 않을 리가 없었습니다. 성준이가 난시였기 때문에 저녁이나 되어야 정훈 형과 함께 안경점에 가서 이런저런 설명을 스페인어로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요. 잘 보이지 않는 눈에, 아침에 겪은 일로 둘 다 기분이 엉망이었습니다. 게다가 토요일이라 여행자 수표의 환전까지 마음대로 안 되는 통에 몇 시간이나 낭비를 해야 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지치기만 했습니다.
"여기에도 동물원이 있겠지?"

제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세웠던 계획을 취소하고 차뿔떼뻭 공원으로 향했습니다. 동물들을 보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거든요.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 멀리 보이는 성이 차뿔떼뻭 성이다. 18세기 말에 건립되기 시작한 곳인데, 시께이로스의 벽화 '뽀르피리아또에서 혁명까지'라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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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장료가 공짜인 대신 소지품 검사를 일일이 받아야 한다
ⓒ 김은주
들어가는 입구부터 검문을 당한 것은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차뿔떼뻭 공원의 동물원은 우리 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훌륭한 개념의 동물원이었습니다. 다니는 내내 서울대공원이나 용인 에버랜드에 갇혀 있는 아름다운 존재들에 대한 연민이 마구 솟아났을 정도입니다.

멕시코의 동물원은 내국인과 외국인을 막론하고 모두가 공짜입니다. 게다가 동물들이 좁디 좁은 우리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녀석들이 쾌적하게 생활할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을 주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기린 우리에서는 오히려 사람들이 기린의 구경거리가 될 정도였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도 조용한 태도로 조심조심 동물들을 만나게 해 주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 비하면 동물 숫자가 넘쳐 나게 많은 나라인데도 자신과 다른 존재를 대하는 태도가 훌륭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한 가지, 꼬맹이들을 데리고 온 어른들이 하나같이 아이들 허리에 끈을 묶어 데리고 다닌다는 것이 아주 신기했는데요, 덕분에 아이를 잃어버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호랑이를 그렇게 가까이 본 것도 처음이고, 하얀 사자를 본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한국의 동물원에는 갈 때마다 번번히 잠만 자고 있던 코뿔소도, 표범도 이 곳에서는 생기발랄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지요. 우아한 뿔을 자랑하는 산양도, 우스꽝스럽게 물을 먹던 멧돼지도 이 곳에서는 편안해 보였습니다. 갇혀 사는 신세인 것이야 매한가지겠습니다만, 그래도 우리 나라 동물원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셈이지요.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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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아서 잘 안 보이지만, 하마 얼굴 옆에 새 한 마리가 살포시 앉아 있다
ⓒ 김은주

차뿔떼뻭 공원은 16세기부터 멕시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공원입니다. 잘 사는 사람들이야 카리브 해가 푸르게 펼쳐진 남부 휴양 도시로 떠나기 마련이지만, 가난하게 사는 시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좋은 쉼터가 되어 주고 있는 곳이지요. 유난히 가족애가 강하고, 무엇을 하든 가족과 더불어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 곳 사람들에게 입장료 없는 이 곳은 훌륭한 숨통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 차뿔떼뻭 호수에서 배를 타는 사람들, 한가한 풍경이다.
ⓒ 김은주
시티로 돌아가 중앙 광장을 잠깐 둘러보고 나오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집니다. 웬만한 비는 별 신경도 쓰지 않고 그냥 맞고 돌아다니는 것이 멕시코 사람들입니다. 우기인데도 준비 없이 그냥 다니는 것도 어쩌면 비의 신을 숭상했던 과거의 마음의 그대로 전해 내려져 온 때문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요.

빗줄기가 거세지면서 거리에 펼쳐 놓았던 노점상들의 물건에는 순식간에 비닐 장막이 덮혔고, 사람들도 건물 처마 끝에 들어가 무심히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같은 처마 밑에 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힘겹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지요. 남루한 옷차림, 별로 튼실해 보이지 않는 신발, 비닐 봉지에 대충 구겨넣은 짐들. 비를 맞으면서 인력거를 몰고 도로를 누비는 사람들, 그 처마 밑에서 힘들여 스페인어를 외우고 있는 사람들, 모자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데도 아랑곳없이 수세미를 팔러 가게마다 들러 보고 있는 아저씨……. 아침에 겪은 일 때문인지 괜시리 그 속에서 풍겨나는 가난의 냄새가 저를 많이 우울하게 했습니다.

희망 없이 태어나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범죄 속에 자라나 결국 총부림이나 칼부림으로, 혹은 교도소로 흘러갈 그 아이들의 인생을 생각해 보니 한없이 막막해지더군요. 멕시코 인디언들, 그러니까 마야와 아즈텍의 사람으로 계속 살 수만 있었다면, 스페인의 침략으로 이 풍요로운 땅 전체가 식민지의 처참한 시기를 지나오지 않았다면, 멕시코 혁명 이후에 약속한 대로 토지 개혁이 이루어졌다면, 신자유주의 때문에 멕시코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 죄없는 아이들의 불행한 오늘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대안도 없이, 뚜렷한 대상도 없이 마구 화가 났습니다.

저녁에 정훈 형과 성준이가 시티 월마트에 있는 안경점에 다녀왔습니다. 제일 싸다는 안경테가 우리 돈으로 6만 원이 넘더랍니다. 멕시코에서 그 돈은 엄청난 액수지요. 거리를 다니는 멕시코 사람 가운데 안경을 쓴 사람이 왜 그렇게 없나, 했더니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냥 이 나라 사람들은 다 시력이 좋은가 보다, 했더니 안경이 너무 비싸서였더라구요. 정훈 형도 안경을 바꿔야 하는데 엄두가 안 나서 참고 있다고 했습니다. 외국인이라고 더 부르는 것이기도 했고, 성준이는 게다가 난시 교정까지 해야 하니, 차라리 그냥 없는 채로 지내 보자고 하고 돌아왔습니다. 며칠만 렌즈로 버텨 보자고요. 다행히 이틀 뒤에 멕시코에 들어온 을근이의 안경 도수가 성준이에게 얼추 맞아서 나머지 날들은 남의 안경으로 버티고 살았습니다.

다음 날은 과나후아또 대신 역시 은 세공으로 유명한 딱스꼬에 가기로 하고 잠을 청합니다. 김영하의 소설 <검은 꽃>을 읽다가 잠이 듭니다. 100년 전, 멕시코에 끌려가 강제 노역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지요. 곧 가게 될 유까딴 반도 곳곳에서 소설 속의 역사를 만나게 될 참입니다. 강제로 옮겨 왔지만, 자의로 멕시코에 남은 한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쩌면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오랫동안 뒤척인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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