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떨군 어머니는
그 이후
여윈 팔을 내리지 못하는
성녀였다.
-강상기 시 <헐벗은 나무3> 전문
작년 겨울 강상기 시인이 <철새들도 집을 짓는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보내 주셨다. 35년 전에 보았던 곱슬곱슬한 라면 머리에 약간 냉소적인 얼굴을 머금고 중학교 교정을 돌아 다니던 그의 얼굴이 내 기억의 수면 위로 붕붕 떠 다녔다. 벌써 35년 전 일이었다. 그러나 시집 표지에 실린 시인의 사진은 낯설음을 넘어서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안경을 쓰고 미끈하게 세련된 신사가 덧없는 세월에 대한 알리바이를 역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1982년 군산제일고등학교 전현직 교사 9명이 줄줄이 엮이게 된 <오송회>라는 매우 서정적인 제목의 용공조작사건으로 몇 년 동안 옥고를 치른 바 있었다. 오장환 시인의 <병든서울>이라는 시집을 복사해 돌려가며 읽었다는 것. 그래서였을까. 미처 시집의 첫장을 열기도 전에 정체모를 슬픔 하나가 황급히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난 광주에서 다니던 중학을 3개월만에 때려치우고 시골집에서 할아버지의 농사 일을 도왔다. 산에 가서 나무나 퇴비로 썩힐 풀짐을 해오고 논두렁에 터진 물꼬나 막으면서 이따금 산 속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새들이 우는 내력이나 알아보면 되는 싱거운 일이었다. 추석이었다. 사업에 실패하고 광주를 뜨셨던 아버지가 내려 오셨다.
"그래도 공부는 해야지. 아는 것이 힘이란다."
1961년 군사 쿠데타가 나던 그 해 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들의 단독 등교는 금지 되었다. "재건 재건 만나면 인사" 어쩌고 하면서 줄을 지어 등교해야 했으며 "아는 것이 힘이다" 따위의 구호가 마을을 긴장시켰다.
나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닌 아버지의 힘에 이끌려 군산이라는 낯선 항구에 닻을 내렸다. 다시 중학교에 가기 위해서였다. 아침이면 금강을 스물스물 기어오르는 안개떼들이 비린내와 합동 작전을 펼쳐 이 인구 15만의 음산한 도시를 에워싸곤 했다. 강 건너편 장항제련소에서는 멀리 인천 앞바다까지 간다는 시꺼먼 연기가 쑥대머리처럼 흩날리곤 했다.
내가 자란 고향의 빛깔이 초록이라면 이 낯선 항구의 빛깔은 갈색이었다. 나는 그 갈색에 쉬 동화되지 못하고 점점 절망하기 시작했다. 절망은 그 뿌리까지 닿으려고 안달하는 반면 희망은 불가능한 높이조차도 뛰어넘으려고 몸부림을 치기 마련이다. 새로 들어간 중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다. 훨씬 후에서야 알게 된 일이지만 고은 시인은 군산 중학 중퇴의 학력에다 불과 열 일곱의 살의 나이로 내가 들어간 중학교의 국어 선생 노릇을 했다고 한다. 강상기 시인 역시 이 학교의 국어 선생이었다. 그러나 난 그에게 직접 공부를 배우지는 않았다.
강상기 시인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편력>이라는 시로 당선된 것은 1971년의 일이었으며 그 해 <이색풍토>라는 최학규, 채규판 시인과 함께 낸 3인 사화집이 나왔다. 나는 고등학교 때 친구네 집에 놀러가서 우연히 이 시집을 읽었다. 그 중 짧은 몇 개의 시를 용케도 내 마음의 서랍에 넣어 두기도 했다. 그 중에는
돼지떼여.
돼지떼여.
저 무수한 돼지떼여.
검정 돼지떼여.
서로들 몸을 비벼대면서
비벼대면서
꿈틀꿈틀 기어가는
돼지떼여
<파도>라는 제목을 가진 간결한 시였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즉흥에 가까워 보였다. <철새들도 집을 짓는다>라는 강상기 시인의 시집 속에서 삼십 몇 년만에 <헐벗은 나무3>이라는 시를 다시 읽었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품안에서 자식을 내려놓지 못하는 어머니의 숙명이 간결한 몇 구절 안에서 극명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자식을 애물단지라고 부른다. 잘못 내려 놓으면 이내 깨져버릴 것 같은 위태로움. 그러나 어머니라는 존재는 위태롭지 않은가. 다만 어머니는 자식의 위태로움 때문에 자신이 처한 위태로움을 망각할 뿐인 것이다.
내가 쓰는 글에는 어머니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도 일종의 아득한 수평선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 나이 일곱 살 무렵에 처음으로 겪은 아득함이었다. 그 대신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이 위태로운 땅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내 존재를 오래도록 끌어 안고 계셨다.
그리고 할머니 역시 끝내 내 삶의 수평선이 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