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피난민촌 사람들 집에는 구청에서 달아준 주소표시만 빼놓고 멀쩡한 살림살이가 별로 없다
피난민촌 사람들 집에는 구청에서 달아준 주소표시만 빼놓고 멀쩡한 살림살이가 별로 없다 ⓒ 오마이뉴스 안현주

올해도 어김없이 울 옆에는 감이 익어간다. 고향 삼아 정이나 붙이자고 심은 감이 가을 햇빛을 받아 더욱 붉다. 어느 고운 이의 마음씨였을까. 아이들의 인기척도 없건만 골목길 한 쪽에는 봉숭아 무더기가 한창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진곡동 산 31-2번지에는 아직 가을 햇빛이 따사로웠다.

진곡동 산 31-2번지를 두고 사람들은 '피난민촌'이라 부른다. 흡사 60년대 영화배경이나 흑백 사진을 꺼내 보는 것 같은 이 마을이 행정구역상 광주시라는 사실이 좀체 믿기지 않을 뿐이다.

담장이랄 것도 사립문이랄 것도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형제자매로 아짐, 아재로 그렇게 살아왔었다. 마을 이름도 내력도 없는 손바닥만한 이 마을엔 이제 불과 토담조 10여채 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곳에 사람이 찾아 든 것은 54년. 이승만은 한국전쟁이 끝나자 월남 피난민들의 구조대책으로 국유지에 무상으로 토담조 초가집 1칸을 마련해줬다. 방 두 칸에 부엌 한 칸. 진곡동 산 31-2번지는 54년 정부에서 정해준 피난민들의 자활촌이었다.

피난민촌은 이곳 이외에 지금의 광산구 오선동에 성산 피난촌이 한 곳 더 있었으나 하남공단이 조성되면서 공장부지로 편입돼 없어졌다. 피난민촌은 당시 26가구 정도. 세월이 지나면서 죽은 사람도 있고 일부는 돈 벌러 간다며 서울이나 평택으로 떠나갔다.

피난민들이 떠난 집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국유지였던 이곳은 당시 건물 값으로 나락 값 어느 정도만 주고 사고파는 식이었다.

2003년 현재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가난한 그때 그시절 그렇게 이곳에 찾아든 사람들이다. 남의 집 살이도 할 형편이 못 됐던 맨 주먹 사람들이었다. 올해도 울 옆 감나무는 13평 남짓한 토담조 집 한 칸에 의지해 살아온 이들의 세월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수심에 잠겨있던 동네 사람들이 마을앞으로 모였다. 사연을 풀어놓던 박진규씨가 말끝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고 있다
수심에 잠겨있던 동네 사람들이 마을앞으로 모였다. 사연을 풀어놓던 박진규씨가 말끝을 잇지 못하고 울먹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안현주

동네 초입에 위치한 심복순 할머니집. 누렁이는 할머니의 어려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간만에 본 외지인을 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동네 초입에 위치한 심복순 할머니집. 누렁이는 할머니의 어려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간만에 본 외지인을 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 오마이뉴스 안현주

박정희 정권, 62년 민간인한테 불하

피난민들의 삶처럼 이 토지에 얽힌 내력도 기구하다. 이 토지는 62년 당시까지 '하야시'라는 일본인 소유로 돼 있었다. 해방후 귀속재산 처리법에 따라 일본인 소유나 적산토지, 문화재 등은 대부분 정부에 귀속됐으나 일부 토지는 그때까지만 해도 신한공사나 일본인 소유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정부는 62년 10월 12일 이 땅을 대한민국으로 귀속시킨 뒤, 바로 그 날짜로 한 민간인한테 불하했다. 당시 이 땅을 불하받은 사람은 광주에서 초대 국회의원을 지낸 박모씨의 집안이었다.

이 토지가 한 민간인한테 넘어갔다는 사실을 당시 이 사람들이 알리 없었다. 사실을 알게 될 때는 이미 다른 소유주로 바뀐 뒤였다.

토지 관리대장은 이때까지 조선총독부, 미군정청, 관재청(48년), 국세청(66년)을 거쳐 78년에서야 지방자치단체로 관리권이 넘어오게 됐다. 피난민들에게 삶의 터전을 일구도록 배려해 준 정부는 정작 몇 년이 지나 피난민들에게 어떤 통보 한마디 없이 이 토지를 넘겨버린 것이다.

이때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뒤다. 박정희는 정권초기 돈이 부족하자 국유지의 일부를 민간에게 매각하는 방법을 통해 재원을 조달했다. 피난민은 이 과정에서 버림받았다.

집이 작고 허름해 가스렌지, 세탁기도 밖에 나와 있다.
집이 작고 허름해 가스렌지, 세탁기도 밖에 나와 있다. ⓒ 오마이뉴스 안현주

"추접스럽고 더러운 세상 살았소"

말썽이 심해진 건 2년여 전부터다. 소유주가 집을 뜯어내라며 마을을 둘러 울타리를 치는가하면, 포크레인을 동원에 통행로에 고랑을 파놓기도 했다. 급기야 올해 경매로 이 땅을 인수하게 된 새 주인은 얼마 전 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점유이전금지 가처분을 한데 이어 명도소송까지 제기했다. 소유자 승낙 없이 불법 건축물을 지어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낯선 사람이 찾아들자 수심에 잠겨있던 어르신들이 마을 앞으로 모여들었다. 요즘엔 마을에 낯선 사람이 들어서는 것 하나에도 겁이 난다. 한 칠순 할머니가 콩깍지를 들고와 사람들 옆에 자리를 폈다. 손은 바삐 움직이면서도 얘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들어 볼 심산이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그때 땅이 민간인한테 넘어간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사람이 살고 있는데 통보는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결국 배우고 있는 사람이 챙긴 것 아닙니까."

한탄과 원성은 계속됐다.

"70이 다 되도록 남의 집 소작이나 짓고 몸 품팔이하고 살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추접스럽고 더러운 세상 살았소."

박진규(63)씨는 말끝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적셨다. 작은 아들로 태어난 박씨는 결혼을 했지만 분가할 형편이 되지 못하다가 애 하나를 낳고 엉덩이라도 붙여볼 작정으로 이곳에 왔다고 한다.

70년 당시 나락 한섬에 3000원 할 무렵 한섬 반을 주고 들어왔단다. 스스로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어 이런 곳에 왔다"고 말한다. 박씨는 "국가 땅인 줄 알고 들어왔지, 땅 주인이 따로 있는 줄 알았으면 왜 건물만 사고 왔겠느냐"며 대책 없이 길거리로 내 모는 정부에 원망을 쏟았다.

막막할 뿐이다. 신복순(71)할머니는 억울한 사정을 말하며 끝내 눈물을 보이셨다.
막막할 뿐이다. 신복순(71)할머니는 억울한 사정을 말하며 끝내 눈물을 보이셨다. ⓒ 오마이뉴스 안현주

"저 지붕을 좀 보시오, 이것이 사람 사는 집입니까"

박씨는 무엇보다 이곳에 산다는 이유로 버린 자식처럼 취급받아 온 것에 억울해 했다.

"비가 오면 사방에서 비가 들이쳐도 손 하나 대지 못하게 했습니다. 구청은 주인 허락을 얻어오라고 하는데 주인은 오히려 무너져 내리기만을 기다리지 허락을 해 주겠습니까.

몰래 손 좀 봤다가 주인이 고발하기라도 하면 어느새 구청 망치부대가 와 다 두드려 깼습니다. 저 집 지붕을 좀 보시오. 처마 용머리를 하다가 저대로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 사는 집입니까?"


지붕뿐 아니었다. 창고는 창고대로 얼기설기 양철판을 이은 것이 전부였다. 구청이 벽돌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너져 내리면 그만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 뿐…. 26호였던 마을은 그렇게 차츰 가구수가 줄어갔다.

"그래도 우리는 무서워 불불불 기었습니다. 돼지막도 아니고 화장실보다 못한 집이라고 웃고 가도 아무 소리 못하고 살았습니다."

19살 때 이곳으로 시집을 와 43년 살았다는 김안순(61)씨는 "평생 억눌림 속에 살았는데 지금도 저녁이면 잠이 안 온다"고 긴 숨을 몰아쉬었다.

한때는 여섯 식구를 이루고 살던 안씨는 "자식 4남매는 그리저리 떠나고 영감하고 나하고 살고 있다"며 "그때는 어디로 뜰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다"고 지난 시절을 꺼내놓았다.

피난민촌 신복순(71세)할머니집 당시 모습과 거의 변화가 없다. 왼편 용마루가 없고 기와장이 떨어져 나간곳에는 양철로 임시막음을 해 놨다.
피난민촌 신복순(71세)할머니집 당시 모습과 거의 변화가 없다. 왼편 용마루가 없고 기와장이 떨어져 나간곳에는 양철로 임시막음을 해 놨다. ⓒ 오마이뉴스 안현주

그들은 묻는다 "어디로 가란 말이냐"

이제 이 마을에 유일한 피난민은 김성춘(81) 할머니네 가족이다. 김 할머니의 고향은 황해도 옹진.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남으로 내려오고 내려오다 보니 목포였다. 전쟁이 끝나고 살 곳을 찾아 열차를 타고 올라온 곳은 지금의 광산구 임곡. 당시 송정리나 임곡에는 피난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문수복(58)씨는 "친인척이 없다보니 이곳에 살게 됐다"며 "남이 이 땅을 차지했다는 것을 알고 피난민들이 진정서를 올렸지만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씨는 "우리가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올 한해는 어느 때보다 힘겨운 한해가 될 듯하다. 법적으로 개인 사유지에 살게 된 꼴인 이들은 어쩌면 강제 퇴거를 당해야 할지도 모른다. 날품 노동을 하거나 소작으로 살아온 이들은 한 순간에 노숙자 신세가 돼야 할지도 모른다. 어디 가서 새로 집을 지을 형편도 아니기 때문이다.

박의규(36)씨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한테 여기서 나가라고 하면 어디로 가란 말이냐"며 "깊은 산골짜기라도 좋으니 집단 이주지를 마련해주거나 다른 구제책을 찾아줘야 한다"고 말한다.

가을햇빛에 피난민 김 할머니가 마당까지 나섰다. 울 옆 감나무와 함께 조용히 마을의 역사를 지켜봐 온 김 할머니는 이 날도 무표정이었다.

피난민 50년 세월에 할머니도 어느새 말을 잃었다.

기자가 만능 해결사인것 처럼 생각하시는지…. 잘 좀 부탁드린다는 말을 몇 번이나 건네고 인사하는 주민들을 보면서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기자가 만능 해결사인것 처럼 생각하시는지…. 잘 좀 부탁드린다는 말을 몇 번이나 건네고 인사하는 주민들을 보면서 마음이 무척 무거웠다. ⓒ 오마이뉴스 안현주

광주시 광산구 진곡동 피난민촌, 환하게 핀 봉숭아 꽃처럼 언제쯤 활짝 웃어 볼 수 있을지...
광주시 광산구 진곡동 피난민촌, 환하게 핀 봉숭아 꽃처럼 언제쯤 활짝 웃어 볼 수 있을지... ⓒ 오마이뉴스 안현주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