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라는 먼 이국 땅으로 떠나기 전날 밤, 잠이 오지 않는다. 몇 번이나 쌌던 짐을 확인해본다. 내가 머물렀던 방을 떠나, 내가 몸 담았던 생활구역을 떠나 더 큰 세계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서기로 한 결정이 비로소 내 마음에 현실로 와닿는다.
군대에 가기 위해 영장을 받았던 시절, 친구들과 송별회를 가지면서도 ‘정말 군대에 가기는 가는 걸까’ 실감하지 못하다가 군대로 떠나는 전날 밤이 되어서야 ‘이제 정말 가는구나’ 느꼈던 그 밤처럼, 유럽 배낭여행 전날 밤은 내게 기묘한 설레임과 두려움을 선사한다.
내 마음 속에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대결한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을 직접 보고, 경험하고 싶다는 욕망과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인다. 여행의 묘미는 바로 이러한 호기심과 두려움의 대결에서 생겨난다. 더 강력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은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반면에 두려움이나 번거로움으로 여행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좀처럼 자신의 생활구역을 벗어나기 힘들다.
쇼펜 하우어는 ‘사람들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곳까지가 세상의 전부라고 인식한다’ 고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매일 가는 길로만 다니고, 단골로 이용하는 상점만 이용하고, 매일 즐겨 먹던 음식만을 먹으며, 몇몇 친한 친구들만 만나며 산다. 그리고 그들은 그게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세상은 넓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지만 그들의 여행의 의미는 모두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오락과 휴식을 위해, 어떤 사람들은 고행과 깨달음을 위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내 여행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명백한 답이 필요하다. 내게 유럽여행은 인생의 어떤 결전을 치르기 위한 각오와 다짐의 의식(儀式)이다.
반복되는 일상과 꼬여만 가는 현실의 문제들, 자고 나면 하루에 한 뼘씩 점점 멀어져만 가는 내 꿈들. 나는 지쳐있었다. 고장 난 카세트 테잎을 틀 때처럼 나의 일상은 늘어지고 있었고, 뽀얗게 먼지가 쌓인 나의 정신을 말끔히 청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내겐 일정량의 육체적 고난과 자극이 필요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국의 거리에서 불연듯 느낄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나를 깨우고 싶었다. 거리에 줄지어 늘어선 레스토랑을 지나치며 배고픔과 싸워보고도 싶었다. 거리에서 담요를 덮고 잠을 자보고도 싶었고, 육체의 고단함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정신을 가져보고 싶었다.
안락한 기차 좌석에 앉아 창 밖으로 보이는 낯선 이국의 풍경에 감탄하고, 녹음기처럼 반복될게 뻔한 가이드의 설명에 귀 기울이는 그런 여행은 싫다. 처음으로 겪을 경험에 미리 보호장치를 해두고,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떠나는 그런 여행도 싫다. 나는 내 안에서 나를 자유롭게 만들지 못하는 두려움과 싸워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유럽 배낭여행을 결정했다.
이제 내게 닥칠 문제들과 경험들은 온전히 나의 몫이며, 나의 책임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나는 출발한다. 내일 아침이 밝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