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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代議) 민주주의 체제에 몸담고 있는 정치인들의 일과가 '정쟁'인데 이 단어를 독수리 타법으로 치다 보면 왕왕 '전쟁'으로 찍혀 웃음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 정치판에서 두 단어를 비슷한 이미지로 착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토론을 입으로 할 때 '정쟁'은 긍정적인 단어로 다가오지만 몸으로 할 때는 부정적인 '전쟁'이라는 단어 외에 달리 규정할 용어가 마땅치 않을 때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의회정치 현실을 구경할 때, 멱살 잡는 국회의원들의 정쟁이나 머리끄덩이를 잡히는 정쟁이 전쟁인지 아닌지 구분이 잘 안 될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패거리 당론이나 비이성적인 감정싸움, 이데올로기 망령 등에 사로잡힌 선량들이 로봇처럼 일사불란하게 몽니와 오기를 부려오던 풍토가 드디어 '국민투표 정국'을 빚어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헝클어진 실타래를 인내로 풀어가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싹둑 잘라버리고 새로 시작하겠다는 것은 쿠데타나 혁명적인 발상일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온 것은? '독재'가 아니면 '권위주의' 외에 없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그래서 당적도 없는 대통령의 입으로 '국민투표를 하겠다'고 했을 때, 첫 느낌은 착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치를 끝내 '전쟁'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거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멀리 뛰기 위해서 짐짓 몇 발짝 뒤로 물러서는 동작이 분명해 보이지만 어떤 이유에도 불구하고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대통령의 고유 권한을 내세워 '실타래 풀기'를 너무 쉽게 포기하고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그 목적과 동기가 설득력이 약해서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직접적인 동기가 대통령의 '20년 집사'가 저지른 뇌물수수 사건이었다는 점은 난해한 수순으로 비칩니다.

민주당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국민경선'이라는 '백색혁명'으로 노무현 후보를 뽑았을 때, 우여곡절은 거쳤으면서도 결국 청와대 입주자로 유권자가 최종 선택한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수구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낡은 정당과 그 후보보다 개혁을 기치로 내걸었던 진보적이고 젊은 후보가 좀 더 많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남북 화해협력 정책 추진에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보다 더 적극적으로 앞장 설 것이라는 신념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찍었고, 그렇게 당선됐는데 막상 정권을 잡고 보니 집권자의 복심은 그것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집권 민주당은 대통령 취임식이 끝나기가 바쁘게 격심한 내분으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보이지 않은 손에 의해 움직여온 신당 창당은 '새로운 지역정당'이라느니 '대통령 당'이라는 심각한 오해(?)를 받으면서도, 마치 정해진 시간표를 따르듯 착착 진행되어 40여 명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말았습니다.

급기야 대통령이 자신을 당선시켜준 정당을 쪼개버리고 '배신'하여 자진 탈당하는, 헌정사 초유의 해괴한 사태를 빚어내고야 말았습니다. 이런 과정이 노무현 대통령 임기 시작 6개월 만에 구체화되었다는 전광석화 같은 속도감에 우선 경악할 뿐입니다. 과거 쿠데타 정권이나 군사독재 시절을 제외하고 우리 정치판, 시스템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돌변한 적이 없었습니다.

대의정치를 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무당적, 무당파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뽑아 든 '국민투표'라는 카드를 어떤 각도에서 바라봐야 정서가 안정된 시민, 정신이 똑바로 박힌 백성이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을 지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민주주의가 우중(愚衆)의 정치라고 해도 선지자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어서, 국민들은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식의 비리로 치명상을 입었던 지도자를 자주 보아온 터여서 권력 측근의 못 된 짓에는 면역이 되어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측근 비리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이는데 '최 집사' 사건 하나로 국민투표를 치르자면 앞으로 몇 번을 더하게 될지, 혼탁하고 암담한 시류에 유권자들은 망연자실 표류하는 느낌입니다. 반대자나 지지자나 실로 착잡한 심경을 가눌 길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청와대에 입주한 지 몇 개월이나 되었다고, 오랜 세월 노무현 변호사의 통장 입출금 관리를 맡아왔던 '최 집사'가 벌써 교도소 행이란 말입니까. 결코 정치인이라고 볼 수 없는 '집사'가 SK 손길승 회장에게 해괴한 축의금(?)을 전달받은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께서 이 사건을 보고 받고 "모른다고 외면할 수 없어" 모종의 결단이 필요했다면 최소한 9월 초순(강 법무장관이 직보했다는 시점)이나 중순에 읍참마속이라도 하고 넘어갔어야 통수권자의 도덕성이고 순리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무슨 말못할 사정으로 미루다가 이제 와서 삼경에 봉창 뚫는 홍두깨를 들이밀고 느닷없이 결과가 뻔한 국민투표를 하겠다니… 그리하여 대통령 측근 스캔들을 어차피 개인비리로 격하 시킬 수밖에 없는 '재신임(최근 여론조사 추세)'을 통해 일종의 '면죄부'까지 챙겨 새로운 대통령으로 거듭나겠다고 하니… 극단적으로 박상천 민주당 대표에게 '검찰을 협박하려는 술수' 정도로 과장된 오해까지 받는 것 아닐까요.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은 계속 하향곡선을 그려왔는데 '국민투표 발표' 이후 벌써부터 '재신임' 선행지수는 상승추세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유권자는 아마 많지 않을 것입니다. 언론 등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되고 있듯이 '국민들의 정국불안 심리'를 반영하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투표의 모순'을 이용하여 '재신임'이 명약관화한 국민투표를 강행해서 체면을 세운다고 국회 의석이 늘어나겠습니까, 아니면 이리 떼 같은 야당이 고분고분한 양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입니까.

'나홀로 대통령'이 국회라는 정쟁의 마당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직접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것인지, '포퓰리즘'에 기대서 신춘 총선 정국에서 입지를 확보하겠다는 것인지 저의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투표일을 공고하게 되면 어차피 패가 갈려 찬반 유세로 전국이 정치 변사들의 유세장으로 바뀌고, 이런 분위기는 내낸 4월 총선 열기만 몇 개월 앞당길 뿐인데, 이런 무모한 국력낭비를 왜 강행하려는 것인지 정녕 알 수 없습니다. IMF 때보다 먹고 살기가 더 어렵다는 국민들의 신음 어린 원성에 귀를 막은 것입니까. 제발 좀 먹고 살기 바쁜데 정치인들은 그 잘난 '주둥이' 닫고 가만히 좀 있으라는 절규가 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여론을 외면하고 국민투표 불필요론이나 헌법 불일치를 거론하는 야당을 향해 '개혁 저항세력'으로 비난하고 몰아붙이는 통합신당 인사들과 청와대 참모들의 행위는 온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과거 못된 권위주의 정권의 악몽까지 떠올리게 해서 보기에 몹시 거북합니다. "대통령이 결단하면 우리는 따른다"는 과거의 '악랄한 들쥐들'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까, 아니면 일사불란을 민주주의로 착각하는 것입니까.

그런가 하면 야당의 비판을 아전인수 식으로 번안하여 "신 야3당 공조로 개혁정권을 흔들려는 불순한 동기가 있다"고 발언한 통합신당 김근태 대표의원의 국회발언은 어떻습니까. 왜곡, 오도의 새로운 시범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말꼬리 잡기나 침소봉대 수법은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조중동의 상투적인 헐뜯기, 왜곡 수법과 방법 면에서 다르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측근, 참모들의 이구동성 '코드'가 너무 성급하다거나 치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부도덕한 돈을 마구 뿌린 SK의 비자금을 명백하게 악(惡)으로 규정한다면 사회정의를 향한 개혁의 실타래는 자연스럽게 풀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자금을 최돈웅(한나라당)이 받으면 '정치자금'이고, 이상수(전 민주당, 현 통합신당)가 받으면 '편법'인데, 왜 하필이면 최도술 '집사'가 받은 것만 '뇌물'로 인식해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소위 변호사 출신이라는 이상수 의원의 '편법' 이론은 '국민의 정부' 책임입니까 '참여정부' 책임입니까.

국민과 유권자를 한없이 우롱하고 능멸하는 정치인들의 해괴한 말장난을 보고 있으면, 국민투표가 마치 눈에 보이지도 않은 적군을 앞에 놓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고 독전하는 '카미카제' 특공대 지휘관의 비감 어린 결의로 느껴져서 매우 안타깝고 심기가 불편할 뿐입니다. 그러다가 국민투표라는 요식 절차를 거쳐 진짜 적군(불신임)이라도 만나면 어쩔지 진정으로 묻고 싶습니다.

불신임을 받았을 때, 드골이 꼴롱베 고향 마을로 내려가듯 진정 김해로 내려가겠다는 말이 참인가요. 시저 이후 나폴레옹, 히틀러, 아옌데, 박정희 등이 국민투표를 애용했지만 유일하게 그리고 우연하게도 가장 나이가 많았던 드골만 '적군을 만났을 때' 낙향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 집사'의 수치스러운 행위에 자책감으로 몸 둘 곳을 몰라 낙향을 각오하면서까지 최후의 카드로 승부수를 던진 것입니까. 여기에 대의명분을 갖추기 위해 의회와 언론까지 반 개혁 세력으로 추가한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1년도 못해 먹을 대통령이 되기 위해 그 많은 수고와 수모와 투쟁과 간난을 감수할 필요가 있었는지 거듭 엄숙하게 묻고 싶습니다.

언필칭 노 대통령이 꿈꾸는 '국민투표'란 무엇입니까. 신임을 받기 전부터 이미 선수(先手)를 잡고 난국을 탈출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고, 불신임을 받는다고 해도 지엄한 헌법을 준수하자면 사임하는 행위 자체가 불법이 되는 투표이니 잃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닙니까.

한 마디로 '의미 없는 투표'에 정책을 연계할 경우, 불필요하고도 비생산적인 정쟁은 격화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노릇입니다. 그래서 투표에 참여하는 행위 자체가 불의(不義)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기권이 양심적이고 정당화되는 상황도 가정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투표의 모순'에 따라 신임을 받는다고 해도 표정관리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할, 빼도 박도 못할, 진퇴양난의 입장에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이라도 일어나 불신임을 받는다면 이 나라 정치발전의 천세 만세를 위해 대통령직을 미련 없이 떠나겠다고 천명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인기가 30% 이하로 떨어지더라도 정치적 혼란을 우려하는 국민들은 "지금은 '불신임'할 때가 아니다"고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대통령을 국수(國手)에 비유해 봅니다. 요즘 같은 시국을 두고 취임 초부터 누적된 개혁저항에 불만이 겹쳐 고전 끝에 선택한 '카드'라는 외신의 지적이 터무니없는 왜곡일까요. 그래서 선수(先數)를 잡은 국수의 '꽃놀이 패' 정국이라고 표현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까요? 새삼 인류 정치사에 희생을 100% 무릅쓴 지도자가 국민투표를 자청해서 자기 무덤으로 들어간 경우는 없었다는 역사적 경험을 떠올려 봅니다.

비장한 각오로 단안을 내렸다는 국민투표 의지는, 이제 국민들의 절절한 염원이 담긴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면밀히 살펴서 다시 한 번 비장하고 엄숙한 각오로 정중히 접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얼킨 실타래를 풀어가는 일, 그것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정치가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권위주의 유혹을 느껴서 국민투표 카드를 꺼냈다면 그런 서커스는 당장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통합신당 의원들이 주장하는 청와대, 정부 개혁촉구는 만시지탄이지만 늦지 않았다고 봅니다. 국민투표는 철회하고 대통령은 정당을 선택한 다음, 4월 총선 결과를 통해 스스로 신임 여부를 알아보면 될 것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환호했던 이들이, 얼굴을 찌푸렸던 이들이, 오로지 생계 걱정 속에서 정국 안정을 염원하며 "재신임하겠다"는 여론이 날마다 너무 크게 들리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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