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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인 수녀
ⓒ 이철용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라고 합니다."
이해인 수녀, 그의 해맑은 미소는 마치 10대 소녀의 수줍음과도 같았다. 지난 10월 16일(목) 저녁 대전시청 3층 대강당에서 열린 이해인 수녀의 시낭송회는 답답함과 절망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을 녹이는 그야말로 가을밤을 촉촉히 적시는 감동의 자리였다. 시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시에 선율을 붙인 노래가 곁들여져 참석자들에게 오랜만에 갈증을 해소해 주는 시간이었다.

이해인 수녀는 무대에 서며 "우리가 이 가을을 보내면서 마음이 따뜻하고 겸허해지고 부드러워지는, 눈길이 온유해지고 마음이 맑아지는 그런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라며 "차를 한 잔 마시는 마음으로 함께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해인 수녀는 대전방문의 단상을 말하며 한밭의 밭과 관련한 시들을 먼저 낭송했다.

밭도 아름답다

바다도 아름답지만
밭도 아름답다

바다는 멀리 있지만
밭은 가까이 있다
바다는 물의 시지만
밭은 흙의 시이다

상추, 쑥갓, 파, 마늘
무, 배추, 당근, 오이
흙냄새 나는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보면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새로움, 놀라움
고마움의 빛

나는 더없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열려있는
엄마밭이 되고 싶다
흙의 시가 되고 싶다.


'밭도 아름답다', '쌀의 노래', '단상' 3편의 시가 낭송되자 청중석은 숨소리만 간간히 들려올 뿐 시 속으로 끊임없이 빨려 들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시는 팝콘 튀기듯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익고 떨어지는 열매

시로 인사를 한 이해인 수녀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수녀의 모습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펼쳤다.

"우리나라 3대 방송사의 드라마에서 연예인들이 수녀복을 입고 가끔 등장하는데 그 역할이 대부분 남녀간의 사랑에 필요하지도 않은데 등장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3대 방송사에 나오는 수녀의 모습은 얼굴은 예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경향이 있다. 수녀의 역할이 봉사는 하는 듯 마는 듯 하는데 과연 저런 모습인가 하는 불만이 있다."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해서 수녀를 처음 보는 사람도 있고 방송을 통해 수녀의 모습이 다 저런 모습이겠거니 하면서 잘못 이해한 분들이 있는데 자신이 40년간 수도생활을 해보니까 "할 일 없어서, 실패해서 수도원에 모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고 했다. 그래서 일부러 가방이 무겁지만 여름 정복을 싸와서 입고 무대에 섰다며 "수도생활이 꽃밭을 거닐면서 달빛 향기에 취하면서 흰옷 입고 왔다갔다 하며 음악을 듣고 시상이 떠오를 때 시나 쓰는 낭만적인 삶은 아니다. 시라는 것은 삶에서 익고 떨어지는 열매이기 때문에 삶 속에서 성실하고 열심히 살 때 단어 한 단어 한 단어씩 생각나는 것이다"고 했다.

▲ 이해인 수녀의 시낭송과 김정식, 윤도영씨의 노래
ⓒ 이철용
그는 항상 주머니에 메모장과 몽당연필을 갖고 보름달을 보고 한 줄의 시상을 기록하고, 신발을 신다가 죽은 사람은 신발을 신지 못하지 하는 생각으로 그리움에 대한 한 줄의 단상을 기록했다가 나중에 한 줄씩 이어간다며, 시는 팝콘 튀기듯 국수를 빼듯 쓰는 것이 아닌 삶의 긴 여정에서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이해인 수녀는 인터넷시대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도 다양한 예를 들어가며 펼쳤다. 기존 교회의 주기도문을 페러디한 사이버 주기도문 "하드 디스크에 계시는 우리 프로그램이시여, 패스워드를 거룩히 빛나게 하시고 운영체제에 임하시며, 명령이 모니터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프린트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를 들려줄 때는 좌중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수녀님이 저런 말을 하는구나 하면서 그에게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면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는 컴퓨터를 업그레이드 시키듯 우리의 내면도 항상 업그레이드 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쁘다는 핑개로 영혼 안에 저장된 내면을 업그레이드를 시키지 않아서 나쁜 말, 생각, 이웃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는 마치 바이러스가 감염되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기계문명 속에서 살수록 한 줄의 애송시를 마음에 담아두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자신도 학창시절에 윤동주의 서시를 읽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며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충실하게 맑게 살려는 노력을 마음 안에 담아두고 살아왔다고 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그날 그날 가치의 우선순위를 잘 매겨서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지만 하지 않아야 할 것, 하기 싫지만 해야 할 일들을 혼돈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할 것을 먼저 하는 지혜를 구하고 살려고 노력하고 게으르고 나태할 때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 아니면 언제?"를 항상 생각하라고 했다.

이해인 수녀는 혼자 시를 낭송하고 함께 노래함과 동시에 청중들과 함께 자신의 시를 주고 받으며 읽기도 했다. 그는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시를 함께 읽으면서 우리들에게 감사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게 했다.

감사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은 깨끗한 마음입니다.
투명한 유리창처럼 마음을 갈고 닦는
선함과 순수함으로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어다 보는 습관을 충실히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다 보면 매일 매일 감사할 일들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 올라
맑은 물 한 동이씩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어 이해인 수녀는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시로 지은 "부끄러운 고백"을 읽어 나갔다.

부끄러운 고백

이러면 안되는데
늘 이렇게만 하다가
한 생애가 끝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자주합니다.

하느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내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
나 자신과의 곡선의 관계

시원하고 투명하길 바라지만
살아갈수록 메마르고
살아갈수록 복잡하고
그래서 참 부끄럽습니다.

좀더 높이 비상할 수 없는지
좀더 넓게 트일 수 없는지
좀더 밝게 웃을 수는 없는지

나는 스스로 답답하여
자주 한숨쉬고
남몰래 운답니다.

그러나 이 일 또한
기도의 일부로 받아주신다면
부끄러운 중에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위로가 될 것 같다고

내 탓이요, 내 탓이요
가슴을 치는 이 시간은
눈물 속에도 행복하다고
바람 속에 홀로 서서
하늘을 봅니다.


시낭송에 이어 아름다운 시를 선율에 담아 노래한 김정식씨와 윤도영씨는 시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들의 노래는 전자악기에 길들여진 청중들에게 새로운 옹달샘을 만나는 신선함을 선사했다. 통기타에 실려 하늘거리는 듯한 노래는 아름다운 이해인 수녀의 시어와 결합되어 한폭의 그림같은 영혼을 맑게 해 주는 노래였다.

▲ 노래하는 김정식, 윤도영씨
ⓒ 이철용
"바다처럼 넓게 살겠습니다."

이해인 수녀의 본명은 '명숙'이다. 그는 오랫동안 부산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광안리 바다를 바라보다 바다가 좋아 바다 해(海)자와 공자의 어진 인(仁) 사상의 어질 인(仁)자를 써서 "해인"으로 필명을 사용했다고 이름에 대한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바다를 떠나서도 바다처럼 살겠다고 하는 마음, 일상생활에서 이기적으로 살지않고 바다처럼 넓게 살겠다는 약속도 이름에 담겨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기 위해 모두가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웃을 바라보면서도 상대방에 대해 완벽한 상을 기대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피하라며 그런 기대치 때문에 실망하고 상처를 주고 받는다며 자신도 시에서는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말하지만 삶에서 그것을 적용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고백했다.

이러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 고운말을 사용하기 위한 연습이 생활에서부터 필요하다고 말했다. 때와 장소, 대상에 맞는 말을 사용해야 하는데 이것은 평소에 훈련을 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 휠체어를 이용한 장애인들도 한마음
ⓒ 이철용

▲ 즉석에서 마련된 청중들의 시낭송
ⓒ 이철용
시와 노래, 청중과 하나된 '시낭송회'

이날 낭송회는 출연자만이 시를 낭송하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과 함께 읽고 노래하는 함께 만들어가는 자리였다. 그것뿐 아니라 이해인 수녀는 즉석에서 청중 가운데 일부의 신청을 받아 단상에서 시를 낭송할 기회를 가졌다. 6명의 성인과 2명의 학생들이 즉석에서 객석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이해인 수녀의 시를 읽었다.

모두들 시가 좋아 이 자리에 참가했다는 사람들은 잔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시를 낭송했다. 예정에 없던 순서지만 처음으로 무대에 서는 사람들이 읽는 시는 여느 성우 못지 않은 감동을 주었다. 손과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떨림이 더 감동을 주었다.

한 남성은 장애를 갖고 있는 부인의 요청으로 무대에 올라와 장모님과 부인이 함께 왔는데 부인이 결혼기념일 선물 대신 오늘 시를 읽어달라고 해서 나왔다며 자신의 지난날 삶과 결혼을 간결히 소개하고 "저희 부부가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제 아내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라고 말해 모든 청중으로부터 열띤 박수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는 인터넷과 편지로 이해인 수녀에게 전해진 편지들도 소개됐다. 이다솔이라는 학생은 "이해인 수녀님의 시는 제가 읽은 시 가운데서 가장 좋아요. 바쁘신줄 알지만 시 한 편 메일로 보내주세요"하고 요청했고 교도소에서 보내온 한 재소자의 편지는 한편의 감동적인 시였다.

▲ 곳곳에서 가족단위의 청중들이 보인다.
ⓒ 이철용
노래와 율동, 열광하는 청중

마무리 시간이 되자 김정식씨는 이해인 수녀에게 청중의 박수를 모아 노래를 요청했다. 청중들은 과연 이해인 수녀가 노래를 할까 하는 눈초리를 무대의 이해인 수녀에게 보냈는데 잠시 머뭇거리던 이해인 수녀는 마이크를 잡고 '초록빛 바닷물에'를 열창했고 앵콜이 이어졌다.

노래 뿐만 아니라 이어 김정식씨는 율동을 요청했고 이해인 수녀는 익숙한 솜씨로 '사랑'을 온 몸으로 보여주었다. 잠시 후 대강당은 이해인 수녀의 율동을 따라 모든 청중이 노래와 율동이 이어져 사랑의 메아리가 넘쳐났다.

3시간여에 걸쳐 진행된 시 낭송회는 시와 노래, 함께함이 어우러져 지루함은 찾아 볼 수 없었고 모두의 얼굴에는 흥분과 감동,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밤 10시 20분경 모든 순서를 마칠 시간이지만 모두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밤 11시, 심야 사인회

▲ 장애아동의 어머니 민지현씨
ⓒ 이철용
이해인 수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도 청중들에게 약속한 사인을 참석자 모두에게 정성스런 해주었다. 연예인처럼 순식간에 휘두르는 사인이 아니라 한 자, 한 자 또박 또박 정성을 들여 찾아온 사람들의 성의에 보답했다. 사인회는 1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기념촬영 요청도 마다하지 않았다. 모든 순서를 마쳤지만 청중들은 자리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언제 만날지 모를 이해인 수녀를 잠시라도 더 보려고 몸과 얼굴이 반대 방향을 향했다.

300여 참가자들은 모처럼 가을밤을 값지게 보낼 수 있었다. 안타까움과 절망, 희망을 접하기 어려운 시기에 이들의 마음은 그간 담아두었던 시름을 다 해소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특히 편의시설 등의 부재로 인해 문화에 갈증을 느끼던 장애인들에게 또다른 새로운 선물이 되었다.

▲ 모두사랑 장애인야간학교 오용균 교장
ⓒ 이철용
이날 행사에 대해 정신지체장애 딸을 둔 민지현(47)씨는 "이해인 수녀의 팬으로 글에서만 만나다가 직접 만나니 감격스럽다"며 특히 "시낭송만 할 줄 알고 왔는데 시낭송과 더불어 자신의 생각들을 펼치며 구체적이고 적절한 예까지 들며 제안해 주는 말들은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게 했다"고 말했다. "긴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래가 곁들여지고 무엇보다 프로그램상으로는 지루할 수도 있었는데 노래, 율동을 보여줬다는 것에 놀랐다. 시인인줄 알았는데 만능 엔터테이너다. 우리만 보기에는 아쉽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모두사랑 장애인야간학교 오용균 교장은 이번 행사에 대해 "오늘의 행사가 있기까지 3년동안 요청을 했다. 3년만에 허락을 받고 특유의 웃음 짓는 모습으로 손을 잡아 주는 이해인 수녀의 손은 따뜻한 호떡봉지를 쥐는 듯한 느낌이었다"고 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한 이번 시낭송회는 깊어가는 가을에 이웃의 허물을 지탄하는 세상에 자신을 돌아보는 필요성을 말해주었고, 동시에 우리가 조금만 훈련하고 노력하면 시와 같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도 제시한 가을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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