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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 이매진
이 책의 지은이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민주주의와 독재가 정반대의 체제라는 생각이 오해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그것은 서로 걸쳐 있기에 민주주의는 쉽게 독재로 변한다.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방식이라는 보통선거, 비밀 선거는 '익명'을 보장받은 대중들이 자신들을 '대변'할 '대표'를 뽑는 과정이다. 그런 익명성이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대표자가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에게 책임을 질 필요가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투표한 사람은 누구도 자신이 그 사람에게 투표했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정치가가 자신들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또는 배신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치가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120쪽).

하지만 고진이 보기에 그것은 대의제에 대한 '배반'이 아니라 대의제의 '본질'이다.

지은이소개

가라타니 고진은 1941년 일본 효고현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도쿄대학 대학원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1969년에 [나츠메 소세키론]으로 {군상}(群像) 신인문학상을 받고, 1978년에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으로 가메이 가츠이치로상을 받았다. 현재 긴키대학 문예학부와 미국 컬럼비아대학 동아시아학과 객원교수다. 저서로 <의미라는 병>,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은유로서의 건축>, <탐구 1,2>, <언어와 비극>, <차이로서의 장소>, <유머로서의 유물론>, <트랜스크리틱> 등이 있다.
옮긴이 송태욱은 연세대학교 국문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에 도쿄외국어대학 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연세대에 출강하고 있다. [김승옥과 '고백'의 문학] 등의 논문이 있으며, 옮긴 책에 <탐구 1>, <형태의 탄생>, <윤리 21>, <근대 일본의 비평>, <현대 일본의 비평>, <포스트 콜로니얼> 등이 있다.
배반했다고 여기고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을 '직접 대변'할 새로운 인물을 찾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독재권력을 환영한다. 그리고 그런 권력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방식은 '국민투표'다. 국민투표는 지도자가 자신을 직접 대변한다는 환상을 국민에게 심는다. 그래서 독재자들은 국민투표를 좋아했고 그것에 의해 모든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려 했다.

"더욱이 그런 상황이 극한에 이르면 대표자는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자를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 역전마저 생겨난다"(123쪽).

그래서 국민투표를 바라보는 고진의 관점은 아주 냉정하다.

"인민을 진정으로 대표할 장치로서 상정한 국민투표는 필연적으로 인민을 배반하는 결과로 끝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국민투표에 의한 결정이 실패로 끝난 경우,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일까? 잘못된 판단을 한 사람들 자신이자 '민의' 자체다. 그러면 그 결과는 사람들이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한 것을 포기하고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혹은 관료 조직에 판단과 결정을 맡겨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따라서 이러한 '직접성'에 의해 대의제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도리어 대표자(주인)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끝난다"(131쪽).

그래서 대의제에 대한 비판이 독재권력으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 고진은 '제비뽑기'를 제안한다.

"제비뽑기란 권력이 집중되는 곳에 우연성을 도입하는 것이며, 우연성에 의해 권력의 고정화를 저지하는 것이다"(133쪽).

제비뽑기는 한 세력이 오랫동안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는다. 그리고 제비뽑기는 누구라도 사회 속에서 역할을 맡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시민이 준비하고 공부하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시민은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는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실제로 가능할까, 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렇기에 고진은 선거가 가진 장점(능력 있는 대표자 선출)과 제비뽑기가 가진 장점(권력의 집중을 방지)을 결합하는, 예를 들어 세 명을 기입하는 투표로 세 명을 뽑고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추첨하는 '선거+추첨'이라는 새로운 정치실험을 제안한다. 국민투표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한국사회가 한번쯤 고민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이 책에서 고진은 언어와 국가, 일본정신분석, 투표와 제비뽑기, 시민통화의 작은 왕국이라는 여러 가지 다른 주제들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하나의 주제를 관통하고 있다. 즉 자본제=내이션=스테이트라는 틀(교환 원리)과 다른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이라는 대안의 틀을 만드는 것이다. 그 대안의 틀은 선거+추첨이라는 정치형식과 시민통화라는 경제형식으로 짜여진다.

왜 철학자인 고진이 이런 대안의 틀을 만드는 데 열중하고 있을까?

"인간성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실현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사항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권력욕 같은 것이 그렇다. 그러나 제3장 투표와 제비뽑기에서도 썼지만, 인간성을 바꿀 필요는 없다. 그러한 인간성이 나올 여지가 없는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176쪽).

이 말에서 우리는 고진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철학자의 과제는 세계를 해석하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일본정신의 기원 - 언어, 국가, 대의제, 그리고 통화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이매진(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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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어서 가입을 했습니다.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기자라는 거창한(?) 호칭은 싫어합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지라 주로 책동네에 글을 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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