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출신의 서울지검 특수부 김진태 검사(현 서울지검 형사8부장)를 인터뷰한 것은 그가 소설 <즐거운 사라>를 쓴 마광수 교수(연세대 국문학)를 구속했을 때의 일이다.
문단에서는 '칼잡이'(검사)가 감히 문인들의 '표현의 자유'를 마음대로 재단할 수 있냐고 항의가 대단했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당시 지검장인가 차장검사인가가 나서서 김 검사가 수만여 권의 장서가라고 소개하면서 그의 인문학적 사유체계를 옹호한 적이 있었다.
과연 그때의 옹호가 허투루 뱉은 말은 아니었다. 한국은행에 근무하다가 뜻한 바 있어 검찰에 입문한 그는 '흉적'(凶賊)을 죽여야 하는 '칼잡이'이면서도 상생의 불교에 심취해 수월(水月) 큰스님(1855∼1928)의 일대기 <달을 듣는 강물>을 써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공판에서는 단호했다. 김 검사의 논고 요지는 이러했다.
"인간의 교육을 책임지는 교수의 신분에 그것도 유명 대학의 교수가 공동체 존립을 저해하고 성적 쾌락이라는 개인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무책임한 소행이다. 피고인측에서는 <즐거운 사라>는 음란 서적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음란 서적 기준은 작가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서는 안되고 도서 그 자체에 대한 판단에 따라야 한다.
<즐거운 사라> 사건의 보도와 관련하여 일반 언론들의 입장도 대체로 음란서의 범주에 드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법정은 단순 음란의 단죄 차원이 아닌 위기적 상황에 처한 정신적 문화적 흐름에 대한 경고적 의미도 담고 있다. 따라서 피고인에 대해 징역 1년에 처해주기를 바란다."
1심 재판부는 마 교수에게 유죄를 인정하면서도 대학 교수 봉직 및 노모 봉양 책임 등의 사유를 들어 양형을 참작해 징역 8월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92년 12월의 일이니 인터넷에서 온갖 음란 동영상이 넘쳐나는 지금 와서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얘기로 들린다.
그는 여전히 '칼잡이'로서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특수수사통으로 김홍업 사건 등을 수사했던 김진태 부장검사는 지난해 11월 대검 중수2과장 시절에 당시 고문치사사건으로 구속된 후배 홍경령 전 검사를 위로하는 한시(漢詩) '슬픈 칼잡이 이야기(哀憐劍士說)'를 검찰 내부통신망에 올려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가을밤에 홀로 강월헌에 올라(秋夜獨上江月軒), 가슴 아프게 떠나간 칼잡이 한 사람을 떠올린다(回憶恨去一劍士)"는 도입부에는 시를 쓴 계기가 잘 담겨 있고, "칼청엔 안타까움과 근심만 가득하고(嘆聲憂慮滿劍廳), 초겨울 하늘엔 궂은 비만 내리오(寒天烟雨倍沈沈)"라는 끝나는 구절에는 검찰이 처한 어려운 상황이 담겨 있다.
마치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책을 든 채, 늘 '흉적'(凶賊)들과 목숨을 걸고 대적하면서도 '남아수독 오거서'(男兒須讀 五車書)를 실천하는 그의 선비다움과 풍류가 존경스럽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주임검사로 한나라당 의원 된 안상수
마산 출신의 안상수 검사와 창녕 출신의 홍준표 검사는 두 사람 모두 국회의원이 되었다. 대개 호흡이 긴 인터뷰를 하게 되면 끝자락에 "혹시 정치하실 뜻은 없냐"는 질문을 의례적 혹은 개인적 호기심으로 걸치게 되는데, 대개 백이면 백, 손사래를 친다.(하긴 S목사는 두 번 인터뷰할 때마다 '정치는 무슨 정치냐'고 오히려 묻는 이가 실례되고 무안할 만큼 강한 부정을 했으나 잘도 출마하곤 했다. 정치가 나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처녀가 시집 안가겠다는 식의 빤한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두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사람은 "성격이 무던하지 못해서 정치와는 적성에 안맞다"고 한 것 같고, 다른 한 사람은 "정치하려면 낯이 두꺼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정치를 못한다"고 했던 것 같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정치를 '안한다'고 아니고 '못한다'고 했던 점이다.
아무튼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주임검사로 유명한 안상수 변호사는 처음에는 '적성'대로 민주당(국민회의)에 입당할 것처럼 해서 몸값이 오르더니, 끝내는 한나라당(민자당)에 들어가 15대부터 과천·의왕에서 재선 의원이 되었다.
안상수 의원은 지난 95년에 쓴 <이제야 마침표를 찍는다>(의원에 당선된 뒤에 <안검사의 일기>로 책이름을 바꾸었음)에서 "이 책을 통해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중략)… 이 책에서 나는 박군 사건에 대해 내가 아는 사실, 내 주변에서 있었던 일과 내가 했던 고민을 모두 기록했다. 그래야 올바른 역사가 씌어져 후세에 교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안 검사는 자신이 아는 진실을 모두 밝히지는 않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박종철 사건 수사와 관련해 안 검사에게 사건 처리방안(축소은폐)을 제시하고, 고문 경찰관의 구형량을 낮추도록 요구한 '정형근 안기부 수사단장' 관련 부분이다. 안 검사의 일기에는 다만, '안기부 J단장'이라는 영문 이니셜로 등장한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두 사람은 64년 서울대 법대 입학동기로 66년 3학년 때는 법대 학생회 선거에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회장(정형근)·부회장(안상수)을 지낼 만큼 막역한 사이였다.
또 당시 안상수·조영래군(작고한 인권변호사)이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 성토대회' 사회를 보다가 함께 유기정학(1개월)을 당하자, 정형근 회장은 이에 항의하는 집회를 주관했다가 무기정학을 받았고, 안 부회장은 정회장 대신 직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지금 두 사람은 나란히 한나라당 재선의원이다.
한때 '한국의 피에트로 검사'로 통한 검사 홍준표
오늘 '톺아보기'의 주인공격인 홍준표 검사 역시 15대 때 검사직을 던지고 정계에 화끈하게 입문했으나 부정선거 혐의로 의원직을 박탈당해 미국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 '컴백'한 한나라당 재선의원이다. 그 또한 정형근 의원과 '인연'이 있다.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 홍준표를 인터뷰한 것은 김영삼 정부 집권 첫해인 93년 봄여름 어간이었다. '개혁사령탑'을 자처한 YS가 질풍노도와 같은 기세로 사정정국을 이끌 때였다. 그때 홍준표 검사는 개혁을 빙자한 사정의 최전선에서 부정부패와 싸웠다.
그는 때마침 80년대 이후 급속도로 부패한 이탈리아 정계의 부패 고리를 파헤친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 운동의 기수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 검사에 빗대어 언론에서 '한국판 피에트로 검사'로 통했다.
그러나 역대 총리 두 명을 부패혐의로 기소한 개혁(마니 풀리테) 돌풍에 위기감을 느낀 극우세력과 기득권층, 그리고 쿠데타를 우려할 정도의 공황상태에 빠진 일부 시민들은 94년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이탈리아 최대의 '정경복합세력'인 극우파 베를루스코니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베를루스코니는 검찰 사정의 칼끝이 총리인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자기 소유의 TV 네트워크와 막강한 권력을 총동원해 결국 마니 풀리테의 기수인 피에트로 검사를 뇌물수수 혐의로 사임하게 했다.
거악과 싸운 '너무 멋진 오빠' 홍준표 검사
한국판 피에트로 검사 또한 '슬롯 머신' 사건을 통해 '거악'과 싸우며 박철언 의원과 이건개 고검장을 구속하는 개가를 올렸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검사 출신이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의 '황태자'로 통했던 YS의 정적 박철언 의원과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던 이건개 고검장은 나중에 각각 아내와 본인이 명예회복을 걸고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앞뒤 안보고 거악에 돌진했던 돈키호테 검사'의 수사결과는 빛이 바랬다).
그때 검사 홍준표의 대중적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와 함께 서초동 검찰청 앞의 H한정식 집에 가면 종업원 아가씨들이 '너무 멋진 오빠'라며 '사인'을 해달라고 매달릴 만큼 스타였다. 이처럼 그가 '상종가'일 때 필자는 그를 단독으로 인터뷰했다.
토요일 밤 사진부 선배와 함께 그의 개포동 17평짜리 아파트 앞에서 야간 잠복근무를 하다가 퇴근길에 수사팀과 술 한잔을 기울이고 들어오는 그를 엘리베이터에 밀치고 들어가 '파파라치'처럼 사진을 찍고 집안에까지 들어가 인터뷰하는 데 성공했다.
필자는 나중에 홍준표 검사를 대중의 스타로 뜨게 한 <모래시계> 김종학 PD가 그에게 질문했던 것처럼 "어떻게 그 거대한 권력과 부패 앞에 당당히 맞설 수 있었습니까?"라고 물었고, 그는 김종학 PD를 반하게 만들었던 답변처럼 "나에게는 가진 것이 없다. 따라서 잃을 것도 없다. 잃을 것이 없는 나는 두려운 게 없다"고 말했었다.(홍준표 검사는 <모래시계> 극중 주인공 검사의 모델이었다)
그러나 '거악' 앞에서 당당했던 그는, 사냥을 할 때는 신명이 나서 날뛰다가도 사냥감이 죽고나면 흥미를 잃은 사냥개 신세가 되었는지, 박철언 의원 공판에 나가 신성한 법정에서 코를 후비다가 판사에게 '경고'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는 그 뒤로는 본업인 '흉적'(凶賊)들과의 진검승부에도 흥미를 잃는 듯하더니 한때는 '멋진 오빠'로 사인공세에 시달렸던 그 H한정식 집에서 여종업원들을 붙들고 토사구팽(兎死狗烹) 타령을 하다가, 우연히 거기서 만난 검사 출신의 정형근 안기부 차장의 손에 이끌려 안기부의 마약수사 지도검사로 파견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정치공작 전문가'로 알려진 정형근 검사와 함께 15대 국회에 입성했다.
정치공작과 면책특권의 '달인' 정형근 닮는 홍준표
정치공작의 ABC는 대중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 정치공작의 '달인'은 아마 홍준표 검사를 안기부로 이끈 정형근 의원이 아닌가 싶다.
정치인 정형근의 트레이드마크는 잊을 만하면 들고 나오는 DJ(김대중)에 대한 '색깔 공세'였다. 지난 97년 대선 때도 정 의원은 월북한 전 천도교 교령 오익제씨에 대한 안기부의 수사 결과를 자세히 거론하며 '색깔공세'를 폈다.
문제는 정 의원의 당시 국감 질의 자료가 안기부 수사자료에 상당 부분 의존했다는 사실이다. 정 의원도 당시 "안기부가 오씨 집에서 입수한 자료에는 국민회의 관련 자료 7종 51건이 포함돼 있었다"며 안기부의 수사자료를 기초로 삼아 국감 질의자료를 준비했음을 숨기지 않았다.
아울러 정 의원은 법무부 국감장에서 안기부의 수사 자료를 근거로 들이대며 "그럼에도 안기부는 김대중 총재에 대한 수사를 서면 조사로 그친 만큼 검찰이 직접 수사에 나서도록 지시하라"고 검찰을 압박했다. 이른바 김대중 비자금 의혹 폭로에 대해 당시 검찰이 차가운 반응을 보이자 '색깔'로 불을 지펴보려는 정치 공세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 의원의 또 다른 트레이드마크인 면책특권을 이용한 폭로였다.
김대중 후보의 집권으로 그 전모가 드러난 안기부의 북풍공작에서 드러나듯, 지난 97년 대선에서 정형근 의원이 오익제 월북사건과 편지 사건 등에서 김대중 후보를 공격한 포인트는 정보기관의 수사자료였다. 그 수사자료는 대개 수많은 '팩트'를 기초로 약간의 '거짓'으로 가공한 것이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팩트의 순도가 높을수록, 즉 99%의 팩트와 1%의 거짓의 조합일수록 그 공작은 신뢰도가 높기 마련이다.
그런데 '거악이라는 풍차에 돌진한 우직한 돈키호테' 검사 홍준표는 갈수록 정치공작과 면책특권의 달인 정형근 의원을 닮는 느낌이다. 이번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폭로한 노무현 대통령 '집사'였던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의 '300억원 수수설'이 그것이다.
최도술 관련 소문은 부산에서 오래 전부터 파다
이번 정기국회 정책질의를 보좌한 홍 의원 보좌관의 말대로 그런 소문은 "부산지역에서는 다 아는 얘기"일 수 있다. 그러나 부산지역에서 다 아는 얘기라고 해서 그 내용이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최도술 비서관이 부산지역에서 기업인 등 '사람'들을 만나고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다는 소문은 홍 의원측 주장대로 오래 전부터 있었다. 지난 9월 중순께 발간된 '증권가 정보지'에도 "권양숙 여사,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을 평소에도 달가워하지 않다가 청와대 근무 시절 이권 청탁 잡음에 휘말리자 노 대통령에게 사표를 받으라고 종용한 것으로 알려져"라는 제목의 첩보가 기재되어 있다.
이 정보지에 따르면 권양숙 여사는 최 전 비서관이 총선 출마차 사표를 내기 전에 부산지역 건설업체로부터 이권 청탁을 받았다는 소문이 나돌자 노 대통령에게 사표를 받을 것을 종용했고, 최 전 비서관에 대한 부산지역 여론이 좋지 않자 민정수석실을 통해 최씨가 연루된 잡음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또 노 대통령을 후원해온 부산의 기업인 강금원씨는 지난 6월초 이기명 전 후원회장의 용인 땅이 문제되었을 때 기자회견을 자청해 이른바 '부산파'인 문재인 민정수석과 최도술 비서관, 송기인 신부, 조성래 부산정치개혁추진위원장 등을 싸잡아 비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때도 지난 3월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강씨는 당시 기자들이 "정치인은 도둑놈이다는 발언의 저의가 뭐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까 맨날 개혁하자는데 방향도, 추진력도, 깨끗한 사람도 없다.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 이기명씨, 최도술 비서관 등이 너무 설친다. 특히 대통령을 잘못 보필하고 문제를 확산시킨 문 수석은 물러나야 한다. 모두 자숙해야 한다. 신부가 나서서, 깡패 같은 놈이 나서서 정치한다고 설치니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나. 노 대통령 측근에 있는 문제 인물들에게 보내는 경고 메시지로 봐달라. 실제 정치인 중에 도둑놈이 많지 않나."
9월 20일 부산경제인 청와대 오찬을 계기로 '루머' 확대재생산
강씨가 사실상 '깡패 같은 놈'이라고 지칭한 최도술 비서관을 둘러싼 부산지역의 이런저런 소문이 언론보도를 통해 '기정사실화'된 것은 9월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부산지역 경제인들과의 '비공식 만남'이 그 계기가 되었다. <부산일보>가 9월 22일자에서 이날 '비공식 간담회' 참석자들을 취재해 "노(盧), 부산경제인과 청와대 오찬…당선 이후 첫 회동 배경·대화내용 관심" 제목으로 보도하면서부터이다.
노 대통령이 당선 이후 처음으로 김성철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등 지난 선거 때 혹은 선거 이후 노 대통령을 후원한 것으로 '소문난'(혹은 스스로 '소문을 낸') 부산지역 경제인들을 청와대 오찬에 초청해 만났기 때문에 그 배경과 대화 내용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이 예정에 없던 비공식 오찬 모임은 사나흘 전에 갑자기 잡힌 것으로 알려졌다. 주선자는 최도술 전 비서관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 신문은 이 자리에 배석한 '청와대 한 핵심 관계자'의 입을 빌어 "순수한 경제 관련 만남"이라며 "태풍 피해가 심한 부산지역의 경제인들을 만나 피해 복구에 만전을 기해줄 것을 당부했다"고 말했다고 전하기도 했다.(이 배석한 핵심 관계자가 이호철 민정1비서관인데, 이 비서관은 필자에게도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라며 똑같이 답변했다)
그러면서도 이 신문은 "한편 이번 모임에 대해 일부에서는 신당 태동과 관련된 것이 아니냐는 정치적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면서 "부산상의 관계자도 '부산상의의 공식 방문이 아닌 경제인의 비공식행사여서 청와대에서 보안을 요청했다'며 공식적인 대화 내용 및 방문자 명단 공개를 거부했다"고 보도해 '여운'을 남겼다.
그런데 이 1%의 '여운'은 얼마 뒤에 국정감사와 한나라당 대선자금 수사를 계기로 눈덩이처럼 불어나 '300억 수수설'로 확대 재생산되었다. 홍준표 의원이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노 대통령의 집사인 최도술 전 비서관이 부산상고 선배인 이영노씨를 통해 300억원을 받았다"고 폭로하고 나선 것이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더라도 부산경제인 초청 오찬이 300억원 지원에 대한 반대급부를 촉구하는 '항의방문'이라는 데는 쓴웃음이 절로 난다. 노무현 대통령의 후보 시절 부산후원회장은 부산상고 동문인 신상우 민주평통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다. 신 부의장의 한 측근은 신 부의장의 말이라며 이렇게 전했다.
"노무현 후보가 민주당 경선에서 후보로 선출되어 동문 기업인들에게 십시일반으로 도와달라고 요청하니 말로는 다들 '도와주겠다'면서도 대부분 '좀 지켜보자'는 쪽이었고, 실제 도움준 사람은 극소수다.
그러나 얼마 안가 지지율이 떨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전화하면 다들 '해외출장중'이거나 '부재중'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선거 막판에 한나라당 국책자문위원으로 간 사람도 있었다. 청와대 오찬에 참석한 부산경제인 면면을 볼 때 300억원은커녕 3억원이라도 낸 사람이 있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99%의 팩트와 1%의 거짓의 조합일수록 정치공작은 신뢰도가 높기 마련이다. 필자는 홍준표 의원이 '순도'가 떨어지는 어설픈 팩트의 조합으로 '정치공작의 달인' 정형근 의원을 흉내내지 말고, 차라리 '거악이라는 풍차에 돌진한 우직한 돈키호테' 검사 시절로 돌아오길 바란다. 적어도 '모래시계 검사'가 허상이 아니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