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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대선 당시 <조선일보> 등 메이저 언론들과 한바탕 격전을 치렀던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경선 이전부터 <조선>에 대한 선제공격을 구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의 왜곡보도로 피해를 받고 있다고 판단한 노 대통령은 이같은 기선 제압이 대선 가도에도 유리하다는 계산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순형 부산일보 논설위원은 <미디어오늘>에 2일 기고한 '정치인과 기자'라는 칼럼에서 정치부장 시절에 만난 대통령에 얽힌 몇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2001년 여름 대선후보 출마를 준비하던 노 대통령은 정 위원을 만난 자리에서 "경선이 시작되면 <조선>에 선제 공격을 할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다음은 정 위원이 밝힌 대화내용의 일부이다.

노무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면 제일 먼저 조선일보부터 공격할 계획입니다."
필자 "정치인에게 언론과 싸우는 것은 금기 사항인데요."
노무현 "어차피 맞을 바엔 선제 공격으로 먼저 싸움을 거는 편이 낫지요."
필자 "그래도 위험부담이 많을 텐데요."
노무현 "조선일보가 노무현이와 싸운다는 소문이 난 후엔 (조선일보에서) 비판 기사가 나와도 타격이 적지요. 독자들은 조선일보가 또 감정적으로 노무현이를 때리는구나 할 것 아닙니까."


대화가 있은 지 몇 달 후인 2001년 11월 13일 노 대통령은 "<조선>의 장삿거리가 되기 싫다"며 대선주자 연쇄인터뷰를 거절했고, <조선> 기자에게 "선거캠프 출입을 자제해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조선>이 이인제 당시 민주당 경선후보의 말을 빌어 음모론, 색깔론 등을 거론하며 노 후보에 대해 공세를 펼치자 노 대통령은 '거대 독점 언론의 노무현 죽이기 공작'이라는 논리로 맞섰다. 2002년 4월 6일 인천지역 경선에서는 "<조선> <동아>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떼라"는 발언을 해 자신에 대한 두 신문의 적대적 보도를 쟁점으로 만들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이후에도 이같은 구상을 자신이 만나는 국회 출입기자들에게 수 차례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정 위원은 당사자인 <조선>을 비롯해 <중앙> <동아>에서도 노 대통령이 이런 말을 하고 다니는 것을 알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오히려 노 대통령을 키워줄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기사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조중동은 2002년 4월 노 대통령이 유력한 후보로 부상한 시점에서 '동아일보 국유화 발언' 논란이 불거지자 "사석의 발언을 문제삼아 말꼬리를 잡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이를 대서특필했다.

이러한 메이저신문들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대선에서 승리한 노 대통령에 대해 정 위원은 "사사건건 언론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자신을 부각시키는 독특한 언론 관리 스타일을 지닌 정치인"이라고 평했다.

노 대통령이 <조선>과의 대립구도를 선거전술의 일환으로 활용했다는 것은 정치권과 언론계에서 공공연히 알려진 얘기이지만, 후보시절 발언이 소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대통령의 후보시절 발언에 대해 지금 시점에서 문제될 게 아니라는 반응이다. 노무현 캠프의 공보팀장이었던 윤태영 대변인은 "<조선>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이 하도 왜곡보도를 하니 여기에 대해 방어를 하겠다는 심정으로 한 말일 것"이라고 말했다.

경선후보 시절 노 대통령의 '입'을 맡아 누구보다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유종필 민주당 대변인은 "예전에 모시던 분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며 언급을 피했다.

<오마이뉴스>는 <미디어오늘>의 양해를 얻어 정순형 부산일보 논설위원의 기고를 소개한다.

[정치인과 기자] '비판'을 '홍보'로 삼는 노무현

노무현은 사사건건 언론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자신을 부각시키는 독특한 언론 관리 스타일을 지닌 정치인이다. 기자들 주변을 맴돌면서 명절 때마다 선물을 보내고 민원을 해결해 주는 등 호감을 표하는 방식으로 소위 '장학생'을 키우는 언론인 관리 방식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불가근 불가원. 정가의 격언처럼 항상 부담스러운 존재로 자리 잡고 있는 언론을 거침없이 대하고 때로는 먼저 공격하는 좌충우돌형 정치인 노무현은 연구 대상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정치인들은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도한 기사를 최선으로 삼고 부정적인 기사를 낸 언론을 차선으로 생각한다. 아예 무관심한 언론을 최악으로 삼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지명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이 3가지 스타일중 두 번째 차선책을 택한 것 같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출마 채비를 하고 있던 시절, 노무현은 당시 서울지사 정치부장직을 맡고 있던 필자에게 경선이 시작되면 조선일보에게 선제 공격을 할 계획이라고 귀띔한 바 있다(노후보는 다른 자리에서도 이같은 발언을 계속하고 다녔다고 한다).

노무현 :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면 제일 먼저 조선일보부터 공격할 계획입니다.
필자 : 정치인에게 언론과 싸우는 것은 금기 사항인데요.
노무현 : 어차피 맞을 바엔 선제 공격으로 먼저 싸움을 거는 편이 낫지요.
필자 : 그래도 위험부담이 많을텐데요.
노무현 : 조선일보가 노무현이와 싸운다는 소문이 난 후엔 (조선일보에서) 비판 기사가 나와도 타격이 적지요. 독자들은 조선일보가 또 감정적으로 노무현이를 때리는구나 할 것 아닙니까.

아니나 다를까 노무현은 민주당 대권후보 경선에 나서자마자 조선일보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데 이어 조선일보 기자는 선거 캠프 출입을 자제해 달라고 공식 요구하는 등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 조선일보가 색깔론 등을 거론하며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자 노무현은 '거대 독점 언론의 노무현 죽이기 공작'이라는 논리로 맞섰다.

정치인 노무현의 대 언론 공격은 조선일보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해양수산부 장관시절 청와대 출입기자 출신 언론인들의 모임에 초청돼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당시 노장관은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건이 큰 이슈로 등장한데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노무현 : 지방분권도 좋지만 정부 부처는 서울에 있어야 청와대 로비가 쉬운 등 업무에 효율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부산지역의 대표적인 언론 매체인 부산일보가 말도 안되는 논리로 해양수산부 이전을 요구하는 등 여론을 호도해서야 되겠습니까.
필자 : 장관님의 생각도 옳습니다. 그러나 해양수산부가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듣고 봉사하는 행정을 하려면 실무의 90% 이상이 이뤄지는 부산에 있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그리고 해양부 장관 입장에서 견해를 밝히시는 것은 좋지만 특정 신문의 논조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은 태도인 것 같습니다.
노무현 : 지방 언론의 무책임한 지역 이기주의를 보고만 있으라는 말입니까. 그리고 서울 부산간은 (비행기를 타면) 1시간이면 가는 거리입니다. 현장과 부처간 거리가 멀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습니다.
필자 : 서울 부산간이 1시간 거리라면 해양수산부가 서울에 있어야만 청와대 로비가 가능하다는 논리에도 배치되는 것 아닙니까. (열기를 더해가던 노 장관과 필자간 설전은 이기명 후원회장과 여타 지방 언론인들의 중재로 간신히 중단이 되고 화제를 바꾸기로 합의가 되는 순간 노무현은 또 한번 튀는 발언으로 좌중을 집중시켰다.)
노무현 : 사실 어제도 새만금 문제로 전북에 갔다가 현지 언론인들과 대판 언쟁을 벌이고 왔습니다. 도발적인 성격은 노무현이의 전매특허 아닙니까(노무현의 실토가 나오는 순간 좌중은 폭소로 웃음 바다가 됐다).

노무현은 이처럼 언론과 좌충우돌 대립하며 상처투성이로 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처럼 언론 덕을 많이 본 정치인도 드물다. 노무현이라는 이름 석자가 전 국민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6월 항쟁 직후인 87년 8월 대우 옥포조선소 파업 현장에 인권 변호사 자격으로 참여했다가 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되면서부터였다.

노무현의 구속은 일간지 사회면에 대서 특필됐고 그에 따른 유명세는 불과 8개월여 후인 88년 13대 총선 출마로 이어졌다.

부산 동구에서 당시 6공의 실세였던 허삼수 전 청와대 사정 수석과 노무현이 맞붙은 선거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묘사됐다. 막강한 자금력과 조직력을 갖춘 정권의 실세 허삼수 후보와 인권 변호사 출신의 정치 신인 노무현 후보. 애초부터 상대가 안되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부산지역 언론사의 소장파 기자들 사이에선 12.12사태의 주역인 허삼수 후보를 낙선시키자는 여론이 형성됐다. 그 덕에 부산 동구는 전국적인 격전지로 부상됐고 노무현은 부산시 전역에 불어닥친 야당 바람에 힘입어 1000여표 차이로 신승, 정계에 입문했다.

노무현은 그러나 국회의원 당선 직후 부산대학생회 초청 강연회에서 제도권 언론 ×××들이란 표현을 사용해 부산지역 소장파 기자들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다. 특유의 튀는 끼가 또 발발한 것이다.

노무현이 폭발적인 유명세를 탄 것은 88년 말에 실시된 5공 청문회에서였다. TV로 전국에 생방송된 청문회 질문자로 나선 노무현은 당시 증인으로 나온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정치자금 제공 행위를 질타하면서 일약 청문회 스타로 발돋움 했다. TV 화면이 배출한 첫번째 정치 스타가 된 셈이다. 이후 노무현은 2차례에 걸쳐 국회의원직 사퇴 소동을 빚는 등 항상 언론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1999년 12월 31일 백담사에 유배간 전두환 전 대통령을 국회로 불러낸 자리에서 국회의원 명패를 집어 던지는 장면이 생중계 되는 등 노무현의 거침없는 행보는 '너무 가볍다'는 비난 여론과 함께 언론의 스포트 라이트를 받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거칠지만 담백하다'는 대 언론 이미지를 굳혀가던 노무현은 1991년부터 조선일보와 극한적인 대립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노무현은 당시 김정길 의원 등과 함께 3당 합당을 거부하고 남아 있던 꼬마 민주당과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간 합당으로 탄생한 통합 민주당의 대변인이 됐다.

당시 조선일보는 통합 야당의 대변인 노무현의 이력을 보도하면서 '요트를 즐기는 재력가'로 표현했다. 노무현이 이에 반발하는 보도 자료를 돌리자 조선일보는 월간 조선 등을 통해 형님인 노건평씨 앞으로 등기된 토지 등 '부동산 목록'을 공개했다. '건평씨 앞으로 등기된 재산의 실제 소유주는 노무현일 가능성이 높다'는 논조였다.

노무현은 이에 대해 조선일보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는 등 강력하게 대응했고 그 결과 양자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이후 노무현은 2000년 당시 재야 단체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안티 조선운동'에도 힘을 보태는 등 일관되게 반 조선일보 노선을 걸으면서 메이저 언론 전반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된 것 같다.

노무현은 2000년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 출입기자들과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비보도'를 전제로 김중권 민주당 대표를 기회주의자로 몰아붙인 사실이 보도돼 곤욕을 치른 일도 있다. 노무현은 그때도 "기자들이 비보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액면 그대로 기사화 하는 바람에 난처하게 됐다"며 언론탓을 했다.

이처럼 사사건건 보수 언론과 대립각을 세워온 노무현의 이력은 결정적인 순간에 빛을 보게된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있기 전인 2001년 김대중 정권은 조선, 동아 등 메이저 언론사를 상대로 세무조사를 실시한 후 사주들을 탈세 혐의로 구속시켰다.

조중동 3사 등은 이에 반발, 결사적으로 정부 여당을 공격하는 기사를 써댔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예비주자들은 이같은 상황에 대해 함구로 일관했다. 메이저 언론과 청와대 양쪽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중 유일하게 메이저 언론사주 구속 조치에 대해 지지 의사를 표명한 예비후보가 노무현이었다. 노무현은 이 때문에 조중동 등 메이저 언론에 집중 포화를 받았지만, 역으로 국민들로부턴 폭발적인 지지를 받는 계기가 됐다. 당시 국민 정서는 조중동 등 메이저 신문사들의 독점적 횡포에 대해 반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은 자연스레 소신있는 정치인으로 부각이 됐다. 민주당이 실시한 국민 경선에도 노무현 바람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노풍은 2002년말 대선까지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인터넷과 핸드폰을 이용한 대체 언론 매체가 등장했다. 메이저 신문에 거부감을 가진 젊은 세대들이 주축이 된 이들 대체 언론들은 당연히 노무현의 손을 들어줬다.

정치적 이단아 노무현 시대는 이렇게 막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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