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천면과 고현면의 경계지역에 있는 해발 375m의 대국산 정상에 있는 대국산성은 최근까지는 삼국시대의 성으로 추정돼 왔으나 근래에 이루어진 지질조사 결과 발견된 연지(蓮池)와 출토된 자기와 토기 조각들로 미루어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성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대국산성을 내려오자 버스는 장량상동정마애비가 있는 선소마을로 머리를 돌린다. 장량상동정마애비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이여송과 진린이 왜군을 무찔렀다는 전승 내용을 새겨져 있다. 높이 5m 폭 1.5m의 자연석에 높이 2.5m 폭 1.5m 크기로 암각문을 새기고 테두리는 당초문으로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 마애비는 지난 여름 태풍 매미의 강풍에 아래로 굴러 떨어진 채 아직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선소리를 떠난 버스는 남해읍을 향해 달리다가 '성웅이충무공전몰유허'라고 쓰여진 곳에서 발길을 멈춘다.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맨 처음 육지로 옮겨진 곳이 바로 이곳이다. 계단을 따라 올라서면 "전방급 신물언아사(前方急 愼勿言我死)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충무공 유언비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길 양 쪽으로 배열하듯 늘어선 동백나무들을 뒤로한 채 이락사(李落祠)의 문을 들어서면 "대성운해"라는 현판이 보인다.'큰 별이 바다에 떨어졌다'라는 뜻이다. 이락사를 돌아 나와 500m 정도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瞻望臺(첨망대)라는 누각이 나온다. 임진전쟁 당시 싸움의 현장이었던 관음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잠시 동짓날의 새벽 추위에도 불구하고 갑옷조차 입지 않고 싸움을 독려하는 장군의 모습을 떠올렸다.
장군은 필생즉사, 사즉필생의 각오로 전투에 임하시다 결국 순국하고 만다. 육신은 그렇게 바다에 떨어졌으나 그는 지금도 불멸의 정신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살아 숨쉬고 있다.
갔던 길을 되돌아 내려오는 길에 제 철을 잊고 피어난 동백꽃 몇 송이를 만났다. 차나무과에 속하는 동백꽃은 떨어질 때 결코 꽃 이파리를 휘날리지 않는다. 단지 꽃봉오리째 뚝뚝 떨어질 뿐이다. 동백꽃은 인간이 죽음을 맞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일종의 경전(經典)인 셈이다.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이 경전의 내용에 걸맞는 장엄한 최후를 보여준다. 자신이 죽을 때와 장소를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영웅이 되는 것이다.
다시 노량 해변으로 돌아왔다.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충렬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내삼문에 들어선다. 이곳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충무공의 시신이 약 3개월 동안 안치된 사당이다. 이후 장군의 유해는 고금도를 거쳐 아산으로 운구되었다. 사당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잠시 묵념에 잠긴다. 사당 뒤편에 있는 가묘를 바라보았다.
"이통제는 소국의 인물이 아니라 만일에 명나라에 있었더라면 마땅히 천하장군이 되었을 것을 아깝게도 여기에 굴거하고 있다."
명나라 제독 진리의 이 말은 영웅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운 탄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에 구차스럽게 무슨 군더더기가 필요할 것인가.
충렬사를 나와 왼쪽으로 난 게단을 내려서서 몇 걸음을 더 가면 거기 자암 김구 선생 유허 추모비가 있다. 도학정치를 펼치려 했던 조광조의 측근이었던 조선 전기 4대 서예가였던 김구는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개령을 거쳐 이곳 남해로 유적와 13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낸다. 그는 이곳에서 경기체가인 <화전별곡(花田別曲)>을 지었다. 화전이란 남해의 별칭이다. <화전별곡> 6장에서 그는 이렇게 자족(自足)을 노래한다.
서울의 번화로움을 너는 부러워하느냐. 붉은 단청을 올린 지위 높은 벼슬아치집 대문안, 거기 있는 술과 고기를 너는 좋아하느냐. 돌무더기밭 가운데 있는 띠집에서나마, 사계절이 화순하여 오곡이 풍성하게 되면, 이 향촌에서 모여 사는 것을 나는 좋아하노라.
노량 앞 바다에도 어느덧 노을이 밀려든다. 이십 년 전 나는 이 충렬사 계단에 앉아 소망했었다. 아무리 거칠고 억센 시대의 풍우(風雨)가 닥칠지라도 결코 노을 지지 않는 꿈으로 내 생애를 우뚝 세우리라. 그러나 모든 꿈은 결국 노을 지고만다는 어두운 숙명이 깃들어 있다. 노량 바닷가로 내려왔다.
길이 34.2m, 폭 10.3m의 대형 거북선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배 안에는 임진왜란 때 수군들이 사용하던 장비며 신호연, 생활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었다. 계단을 통해 배 밑바닥으로 내려서니 칸칸이 막아놓은 좁은 선실들이 이채로웠다.
밖으로 나오니 벌써 사방이 어둑어둑 했다. 안내자는 우리를 남해 척화비로 데려갔다. 이곳의 척화비는 운현궁에 전시된 척화비 보다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와는 크기와 규모가 컸다. 화강암으로 된 비의 크기는 높이 155㎝, 너비 49㎝, 두께 16㎝이다. 거북 등에 얹혀 있는 모습으로 가첨석(비석 위에 지붕 모양으로 만들어 얹는 돌)이 있어 다른 척화비와는 다른 형태라고 한다. 정면에 큰 글자로 주문(主文) 12자를 새겨 넣었다.
"양이침범비전즉화주화매국".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음은 즉 화친)하자는 것이며,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자는 것이라는 뜻이다. '세계화'라는 넘치는 화두와 담론 속에서 홀로 독야청청한 대원군의 척화비가 더욱 쓸쓸해 보였다.
숙소에 도착해서는 사암 정의연 선생의 남해 역사에 대한 열띤 강연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미 풀어질 대로 풀어진 일행들의 학구열을 달구기엔 역부족이었다. 저녁 식사 후 8시부터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무명가수인 황인철씨가 부르는 <누구라도 그러하듯이>라는 노래로 음악회는 막이 올랐다. 그 뒤를 국악인 박채란씨가 가야금 병창으로 <나를 두고 아리랑>, <타향살이> 등의 노래로 이어갔다.
마지막은 광주의 민중가요 가수 박문옥이 장식했다. 박문옥은 먼저 자신의 대표곡인 <직녀에게>를 불렀다. 다음 곡은 정태춘, 박은옥이 부른 <사랑하는 이에게>였다. 박문옥이 흉내내는 박은옥의 목소리가 너무나 그럴 듯해서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터뜨리고 어디선가 "오빠'사랑해" 소리가 들렸다.
이에 힘을 받은 탓일까. 그는 조용필이 되어 <일편단심 민들레야>를 부르는가 했더니 어느 새 심수봉이 되어 <그때 그 사람>을 찾는다. 그의 노래인 <누가 저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구할 것인가>를 듣고 싶었지만 그가 부른 앵콜송은 안치환의 노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였다. 정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긴 아름다운 것일까.
그렇게 하루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노량 바다의 파도들도 차츰 잠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이 다 잠들어도 나그네는 결코 잠이 들 줄 모른다. 서포 김만중 기념사업회 김성철 회장과 상감마마라는 닉네임을 가진 이와 셋이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눴다.
남해를 사랑하는 김 회장의 마음이 하나의 파도가 되어 넘실거린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 마음도 어느 결엔가 하나의 파도가 되어버린다. 세 개의 파도마루가 합쳐져 서로의 마음을 넘나든다. 파도가 깊이 잠들수록 사람의 마음은 점점 더 격랑을 이룬다.
이 밤이 지나면 우리가 나눈 이야기들은 전설이 되어 허허바다로 흘러갈 것이다. 내일은 남해 금산을 오를 것이다. 마음이 먼저 걸어서 금산을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