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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면 2년 후에 이사를 하게 생겼다. 생전 처음 '아파트 청약'이라는 것을 며칠 전에 했다. 이미 아파트 신축 공사는 시작되었는데, 2005년 12월 입주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니 17년째 살고 있는 지금의 비좁고 낡은 23평 연립주택에서 2년만 더 살면 32평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된다.
그런데 왠지 마음이 별로 흥겹지를 않다. 집 값 치를 걱정 때문만이 아니다. 올해 연세 팔순이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우울해진다. 사정만 허락된다면 지금 당장 이사를 하는 것이 옳을 터이다. 어머니께서 좀더 넓은 새 집에서 몇 년이라도 편케 사시다가 돌아가셔야 할 텐데 자칫 이사도 가기 전에 돌아가실 지도 모른다는 방정맞은 생각마저 든다.
새 아파트로 입주할 때쯤이면 이미 고등학생 시절부터 외지 유학생활을 하고 있는 딸아이는 대학교 진학 문턱으로 들어서게 되고, 올해 중1인 아들녀석도 외지로 고교 진학 준비를 하게 될지 모른다. 그리하여 종래에는 나와 아내만 새 집에서 생활하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지레 맥이 풀리는 노릇이다. 새 집 장만에도 불구하고 사는 게 별로 재미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아무튼 2년 후에 이사를 하게 되면 나로서는 평생 두 번째 이사를 하는 셈이다. 청년 시절 5년 동안 여기저기로 거처를 옳기며 산 경험이야 있지만 가정을 갖지 않은 홀몸이었고 노동판 유랑 성격이었으니….
첫 번째 이사는 1986년에 있었다. 내 선친께서 작고하신 해이다. 선친의 장례를 치르고 보니 부조금이 좀 남았다. 그 돈으로 당시 1200만원 정도였던 23평 연립주택,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계약할 수 있었다.
(첫 번 이사와 관련해서는 1987년 <신동아> 9월 호에 쓴 「옴팡집을 팔고 나서」라는 글에 슬프고도 부끄러운 이야기를 상세히 고백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아버님의 작고에 따른 부조금에 힘입어 23평 연립주택이나마 마련을 하고 이사를 할 수 있었던 덕에 나는 다음해인 1987년 마흔의 나이로 드디어 결혼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우리 부부가 늦은 신혼살림을 한 집이고 두 아이를 낳고 기른 집이다.
물론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지만 나로 하여금 결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신혼살림을 하고 두 아이를 낳아 기르게 해준 지금의 집을 나는 아끼고 사랑했다. 집 앞에 주차 공간이 있고, 새들이 날아와서 우짖고 김칫독도 여러 개 파묻을 수 있는 비교적 큰 화단을 거느린 이 연립주택에서 나는 천년만년 살고자 했다.
하지만 23평 주택은 비좁았다. 무엇보다도 책에 대한 학대 현상을 피할 수가 없었다. 내가 구입하는 책들과 우체국 집배원이 거의 매일같이 가져다주는 책 중의 저자 사인이 있는 책들까지도 여기저기 구석구석에 쌓아놓아야 하는 상황이니 밑에 깔려 신음하는 책은 형체가 틀어지기도 한다. 거실의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도 앞을 가로막은 두 대의 컴퓨터 때문에 상당수는 꼭 참고를 해야 할 경우에도 속수무책인 형편이다.
무엇보다도 큰 불편은 명절 치르기다. 어머니를 모시고 장남 노릇을 하고 살자니, 명절에는 동생 가족들이 모여든다. 음식을 장만하는 일, 차례를 지내는 일, 잠자는 일 모두 여간 불편하지 않다. 불편을 겪을 때마다 동생들에게 미안해지는 마음 또한 여간이 아니다.
명절을 지낼 때는, 그리고 참고해야 할 책을 하나 찾기 위해 특히 무더운 여름철에 땀을 뻘뻘 흘리며 공사를 할 때는 이미 거의 잊은 일인데도 1억 수천만 원의 '보증빚'을 갚느라 허덕이며 살아온 지난 세월을 다시 반추해야 하는 쓰라림을 겪기도 한다.
결국은 어떻게 해서든 좀더 큰집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삶의 주요 소망이 된 듯한 형국이었다. 물론 이 소망에는 어머니를 다만 몇 년이라도 큰집에서 편케 사시다가 돌아가시도록 해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그래서 실은 조급한 마음이기도 했다.
조급한 마음 가운데서도 2년 후에나 입주가 가능한 새 아파트를 청약한 것에는 우선적으로 내 경제 사정이 결부된다. 그리고 이왕 '고향을 지키는 작가'라는 별칭까지 얻었으니 끝까지 고장을 지키는 '태안사람'으로 살고 싶고, 집 값이 좀 비싸더라도 지금의 동네에서 멀지 않은, 입지 조건이 좋은 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 탓이었다.
태안군청 바로 옆에 자리를 잡은 신축 아파트는 23평형 116세대, 32평형 216세대, 44평형 53세대, 총 385세대를 5개 동으로 짓고 있는데, 나는 32평형을 선택했다. 지난달 21일 청약 신청을 한데 이어 24일 추첨을 했다. 나는 회사 사람들로부터 '국가유공자 예우차원'이라는 (당첨 확률이 크다나…) 말을 들으면서 32평형 중에서는 맨 먼저 추첨을 했는데 기피하고 싶었던 가운데 동의 804호를 받게 되었다.
32평형 3개 동 중에서 101동은 태안 시내와 백화산을 볼 수 있고, 105동은 장명수라는 바다와 산과 들을 볼 수 있는데, 하필이면 그 사이에 낀 103동을 받은 것이다. 8층은 사람들이 '로얄층'이라고 하니 그런가보다 싶은데 동은 섭섭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비교적 조용하리라는 자기위안을 안고 29일 계약을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는 나로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우스운 일들이 있었다.
3년 전 주공아파트 분양 때와는 사뭇 다른 아파트 건설회사의 엄청난 홍보 전략을 보면서 나는 절로 청약 욕구와 함께 과도한 청약 경쟁으로 인해서 아파트 구입을 하지 못할 수도 있으리라는 불안감 같은 것을 갖게 되었다. 쉽게 분양이 되지 않을 것 같으니까 회사에서 안간힘을 쓰는 거라는 말도 들을 수 있었지만 신축 아파트에 대한 주변의 관심은 점점 고조되는 것만 같았다.
모델 하우스를 여는 날에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렸다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다음날 저녁 나는 어머니와 아내와 함께 모델 하우스를 구경했다. 32평형을 구석구석 살폈는데, 3년 전에 분양을 받아 두 사촌형님이 살고 있는 주공아파트에 비해 좁은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선뜻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일단 청약 신청을 하기로 하고, 10월 21일 청약 신청금 100만원을 준비한 다음 한 시간 일찍 퇴근해 온 아내와 함께 모델 하우스 안의 분양사무소로 가서 내 평생 처음의 아파트 청약 신청이라는 것을 했다.
그리고 24일 오후의 추첨 때는 어머니와 함께 갔다. 추첨 경쟁률이 3대1 정도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언뜻 보기에는 사람들이 무척 많이 온 것 같았지만 그 경쟁률을 대비해 보면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 중에는 청약 신청을 하지 않고서도 경품 추첨을 목적하고 온 이들도 꽤 있는 것 같았다.
3대1이라는 경쟁률에 비해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 이유를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나의 순진함과 고지식함을 그대로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했다. 나처럼 단돈 100만원만 걸고 청약 신청서를 단 한 장 제출한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당첨 확률을 높이기 위해 두 장이나 세 장씩 제출한 사람이 흔했고, 무려 다섯 장이나 제출한 사람들도 있었다.
더 놀라운 일은 이른바 '떴다방'이라는 사람들이 덤벼들어 수십 채씩 청약 신청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도시에서나 있는 그런 일이 우리 고장 같은 시골의 작은 읍단위 동네에서도 있나 싶어 긴가민가했지만,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았다. 추첨에 떨어져서 실망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좋은 동 좋은 층을 은근슬쩍 권유하면서 300만원 프리미엄 금액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즉시 등장을 했다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국가유공자 우대라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특별 배려라는 말을 들으면서 32평 중에서는 맨 먼저 추첨을 했다. 내가 직접 제비를 뽑은 것이 아니라 회사 직원 아가씨가 뽑은 결과 가운데 동인 103동 804호로 당첨이 되었다. 당첨 발표 순간 진행자가 큰소리로 "축하합니다!"라는 말을 했고, 회사 직원 아가씨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지만 나는 시큰둥한 마음이었다.
경품 추첨이나 기다리자는 마음으로 앉아 있는데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로부터 추첨 결과 보고를 받은 아내는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내가 놀라운 일이라도 되는 듯이 사람들 중에는 청약 신청 번호를 여러 개씩 갖고 있는 사람도 많더라는 말을 하니, 아내는 "여태 그걸 몰랐어요?"라는 말로 나를 핀잔했다.
"그런 일을 내가 진작에 알았고, 내가 보통예금 통장 안에 몇 백만 원 정도는 늘 넣어두고 사는 형편이라 해도, 나도 그럴 수 있을까? 그게 양심 문제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일까?"
나는 아내에게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하며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 '양심'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양심과는 상관이 없다 해도 당신은 그렇게 못해요. 그런 줄 아시고 전화 끊어요."
아내는 나를 면박하는 건지 두둔하는 건지 모를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래, 마누라 말이 맞아. 나는 그런 짓 못해. 생각하니 괜히 한숨이 나왔다.
103동도 차지하지 못하고 추첨에 떨어진 사람들도 많을 테니 그냥 계약을 하자고 작심을 하고 29일 오후에 분양 사무소를 찾았다. 590만원을 내고 일단 계약을 했다. 32평형은 전용면적 금액이 1억1700만원이었다. 3년 전의 주공아파트보다 3천만 원 정도 비싼 금액이었다. 중도금 7천만 원을 국민은행이 2년 동안 무이자로 대출을 해준다고 했다. 잔금 4천여 만원은 입주할 때 낸다고 하는데, 입주한 다음부터는(그러니까 등기와 함께 근저당 설정을 한 다음부터는) 중도금 7천만 원에 대한 이자 지불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거야 미리 알고 있는 사항이지만, 전용 면적 외 서비스 면적의 인테리어 선택 사항에 대한 별도 계약은 내가 미리 자세히 알지 못한 것으로써 번거로움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샤시 같은 것이야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지만, 원형을 바꾸는 여러 가지 확장이나 설치 권유에는 짜증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는 샤시 외로 두 개의 문짝 설치와 서재로 만들어 큰 책장을 들여놓고 싶은 방 하나에 대한 확장 계약을 하고, 시멘트 해독 방지와 보온 효과에 좋다는 신소재 '세라믹' 착용 계약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단 계약을 마치고 다시 모델하우스를 둘러보는데, 한 사람이 내게 와서 동을 바꾸실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다. 내가 분양사무소에서 계약을 할 때 가운데 동이라서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 말을 했는데,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사람인 것 같았다. 그는 장명수 바다가 훤히 보이는 105동의 중간층과 함께 프리미엄 금액 300만원을 제시했다.
나는 도리질을 했다. 내가 300만원 정도는 푼돈으로 여길 정도로 팔자가 늘어진 형편이라도 해도 그런 짓은 못한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냥 외면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아파트 건설회사에서 제시한 3일 동안의 계약 기간이 지난 후 한 친구로부터 부러운 말을 들었다. 청약 신청을 세 개나 했지만, 두 개는 떨어지고 겨우 한 개 당첨된 것이 105동 301호, 동은 맘에 들지만 3층에다가 맨 가장자리 집이어서 계약을 하지 않았는데, 회사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101동의 8층집으로 계약을 했다는 얘기였다.
그는 내가 고지식하게 너무 일찍 계약을 했다는 말을 했다. 나는 내가 고지식한 것을 지나 너무 어리숙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아파트 하나 구입하는 일에도 이런저런 일이 참 많다는 생각도 하며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간 이러저러해서 나는 난생 처음 아파트 청약이라는 것을 했고, 2년 후에는 생애 두 번째 이사를 하게 생겼다. 이제부터는 아파트 값에다가 여러 가지 이사 비용을 생각하면서 더욱 근검 절약을 해야 할 판이다. 이 나이에 이르도록 제대로 돈을 벌고 모으지를 못했는데, 내가 지금에 와서 무슨 수를 대겠는가. 그저 마누라의 교사 월급과 내 알량한 고료 수입, 그 빤하고 정직한 돈을 아껴서 모으는 수밖에….
다행히 '보증빚'은 다 갚았으니, 그리고 2년이라는 기간이 남았으니 잘하면 사정이 괜찮아질 것도 같다. 그래서 원하고 또 바라는 것은, 2년 후 이사를 하여 좀더 넓은 새 집에서 사는 편안함을 내 어머니께서 부디 오래 누리셨으면 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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