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초 예산에 또 하나의 명소가 탄생할 전망이다.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출생의 독립운동가 일우 김한종 의사의 생가와 사당, 기념관 공사가 마무리 작업에 한창이다. 김한종 의사의 손자인 김경식씨가 자신의 전공을 살려 직접 설계해 지난해 10월 공사를 시작, 건축을 마무리하고 기념관 내부 전시를 끝낸 뒤 내년 초에 문을 열 예정이다.
연건평 120평에 이르는 기념관은 국가보훈처로부터 지난해와 올해 각각 1억5000만원, 2억원을 지원받고 사당과 지난해 4월 산불로 전소된 생가 건축에는 군·도비 3억원이 들어갔다. 사당 삼문과 주변 정리에는 1억5000만원의 예산이 투입됐으며, 자비 1억5000만원이 쓰였다.
김한종 의사 사적지 사업은 (사)예산모현사업회(회장 황길수)가 적극 나서서 가능했다. 4500평에 이르는 사적지의 구성은 사당과 생가, 기념관, 제례당으로 이뤄져 있다. 사적지 전체 설계를 맡은 김경식씨는 "사당은 정신적 지주로, 생가는 현실적 생활 공간으로, 기념관은 과거 독립 투쟁의 기억을 의미해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곳으로 표현했다"고 소개했다.
김씨는 학생들이 과거 독립지사들의 뜻을 막연히 주입받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체험하고 느끼고 또 편히 쉴 수도 있는 장소로 활용됐으면 한다고 소망했다. 30도 정도 경사진 자연 지형을 해치지 않고 그대로 살리면서 전체 건물이 있어 사적지를 따라 돌다보면 자연스레 생각거리를 던져 줄 수 있으리라는 얘기다.
설계 과정에서 무엇보다 지형 해석에 공을 많이 들여 전면에 백월산을 배경으로 사당과 생가, 기념관 등을 북두칠성의 형태로 배치했다. 빛의 처리를 중시한 기념관은 독특한 체험 공간으로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바닥과 천정, 벽면의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빛은 마치 옛 감옥과 같은 공간을 걷는 느낌을 갖게 한다는 것.
4개의 전시실은 다리를 거쳐 다른 공간으로 갈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일제 시대 지하 감옥에서 독립 투사들이 탄압받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설계했다. 콘크리트와 목재만 사용하고 외벽 처리를 하지 않아 색깔 없는 기념관으로 그 느낌을 살릴 계획이다. 제1전시실은 대한광복회, 제2전시실은 김한종 의사, 제3전시실은 대한광복회 충청지부, 제4전시실은 예산모현사업회와 자료실로 구상하고 있다.
김씨는 형태보다는 독립 투사의 정신적인 부분을 재현하려 했다며 건축물 자체만으로 전시물이 될 수 있도록 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묘소와 사당 마당에서는 학생들이 쉬며 글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공간으로 활용도 가능하다. 김씨는 "독립 지사들의 뜻을 요즘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며 "이곳이 농촌과 충효 정신을 체험하는 청소년 교육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 | 일우 김한종 의사 | | | | 김한종 의사는 대한광복회 충청지부장으로 활동했다.
1883년 1월 14일 광시면 신흥리에서 태어난 김한종은 일제가 조선을 강제로 점령한 뒤 충청도지역에서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사방으로 동지들을 규합하던 중 1916년 7월에 김경태, 김재창과 함께 부여 이철영 집에서 조선 총독과 고관들의 암살을 모의했다. 때마침 조선 총독이 부여 지방을 시찰한다는 정보를 입수해 조선 총독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를 수상히 여긴 일본 경찰이 그의 집을 수색하기에 이르렀고, 그를 비롯해 이 계획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각자 피신하게 되었다.
드디어 1917년 7월 보름날 대구 달성공원에서 박상진, 채기중, 김좌진, 노백린, 임세규 등 전국에서 남 모르게 모인 2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우리는 대한독립광복을 위해 우리의 목숨을 바침은 물론 우리 생애에 뜻을 이루지 못할 때는 자자손손이 뜻을 이어 원수 일본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맹세한다'고 피로써 하늘에 다짐하고 대한광복회를 조직, 그 지도자로 책임을 맡게 된다.
충효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집안에서 자란 김한종은 성품이 강직하고 과감했으며 대한광복회 내에서도 격정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충청도 지부장으로서뿐만아니라, 대한광복회 내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유창순과 함께 장승원 처단 사건에 관여했으며, 서울의 연락 거점에서 박상진·채기중 등과 자주 회합을 갖기도 했다. 그는 광복군을 기를 목적으로 김좌진을 만주로 파견했다. 또 국내외의 힘을 모으기 위해 중국으로 노백린을 보내기도 했다. 군자금 조달의 총책임을 지고 귀향한 의사는 모든 재산을 팔아 광복군의 연락 장소를 마련했다. 목숨을 걸고 국내 부호들을 대상으로 막대한 군자금을 거둬 해외 동지들에게 보냈다.
빛나는 활동을 하던 의사는 1918년 천안지방 한 동지 가족의 실수로 왜경에게 붙잡혀 1921년 7월 6일 대구 감옥에서 사형당해 순국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