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은 밤을 꼬박 지샌 자에게만 온다"라고 어느 시인이 그랬던가. 어느 결에 날이 밝았다. 오늘은 남해 금산을 오르기로 한 날이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 詩 <남해금산 > 전문
사랑은 운동의 일종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동화되려고 하거나 같아지려고 하는 부단한 운동인 것이다. 시 속의 화자(話者)는 돌 속에 들어간 여자를 따라서 돌 속에 들어간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온 어느 여름 날 여자는 돌 속에서 떠나간다. 그의 운동은 끝내 허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렇게 떠나가는 여자를 해와 달이 끌어 준다. 해와 달이라는 아득한 물체를 매개로 삼은 이 사랑의 설화는 물씬한 슬픔을 자아낸다. 도대체 남해 금산의 어떤 풍경이 시인에게 슬픈 사랑의 모티프를 떠오르게 했을까. 그것은 내가 이성복의 시 <남해금산>을 읽은 1986년 이래 오래된 숙원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남해대교 근처를 출발한 버스는 한 시간을 달려 복곡 저수지 주차장에 사람들을 쏟아놓는다. 해발 681m의 금산이 한눈에 밟힌다.
금산의 원래 이름은 보광산(普光山)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말 이성계가 백두산과 지리산에 들어가 왕이 되게 해 달라고 산신에게 빌었으나 들어주지 않자, 마지막으로 이곳에 와 빌면서 만약 산신령에게 왕이 되면 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둘러 주겠노라고 약속했단다.
그러나 막상 왕이 된 그는 고민에 빠졌다. 나라의 비단을 다 모은들 산을 두를 수 없을 뿐 더러 설령 두른다 쳐도 비단이 썩으면 산이 더럽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신하 하나가 산의 이름을 '비단 금'자에 '뫼 산'자를 써서 금산(錦山)으로 고치면 영원히 비단에 싸인 산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럴 듯하게 여긴 이성계가 보광산을 금산으로 고쳐 부르도록 해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의 말은 한낱 구두선(口頭禪)에 지나지 않음을 탓해 무엇할 것인가.
복곡 저수지 주차장에서 보리암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고 가다 8부 능선쯤에서 하차했다. 20여분쯤 산길을 걸었을까. 멀리 아담한 절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바로 보리암이다.
보리암은 신라 신문왕 3년(683)에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고찰로서 낙산사 홍연암, 강화도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관음 신앙의 성지로 꼽힌다. 남해의 푸른 파도에 홍진을 씻으며 대장봉 벼랑 아래 결가부좌를 틀고 앉은 보리암의 '보리'는 '깨달아 도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대장봉 왼쪽으로는 화엄봉, 일월봉, 제석봉 등이 보리를 이루기 위해 절차탁마 중에 있다.
보리암 앞에는 상주해수욕장을 바라보고 있는 삼층석탑이 있다. 김수로왕 비 허태후가 인도에서 싣고 온 파사석으로 원효대사가 지었다고 전해오는 이 탑은 기이하다. 김성철 회장이 호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내 올려 았는데 나침반의 바늘은 북쪽을 북쪽이라 가리키지 않은 채 위치에 따라 나침반의 N극이 동서남북을 돌아가며 가리킨다. 어떤 사람들은 대장봉에서 뻗어 내려온 기가 흐르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탑 안에 사리가 있기 때문이라고도 하는 모양이다.
석탑 바로 앞에는 해수관음 보살상 감로수를 들고 남해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보리암은 낙산사 홍련암,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도량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기도를 올리면 평생동안 한가지 소원은 이뤄진다는 얘기가 전해오는 탓인지 불자들의 참배가 줄을 잇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의 지나친 기복신앙으로 지리하고 따분한 일상을 꾸려 가야하는 관음보살상에게 한 가닥 연민을 보내며 보리암을 떠났다.
걸음을 서둘렀다. 금산 최고의 절경인 쌍홍문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두 눈을 부릅뜬 형상을 한 쌍홍문이 나타났다. 쌍홍문을 들어갔다 나오니 바로 앞에 장군암이 나타난다. 장군암 머리에는 수백년 된 넝쿨식물 송악이 자라고 있었다.
되돌아서 다시 쌍홍문으로 오르니 사람들이 벽에 난 지름 50cm 가량의 구멍 세 개에 돌을 던져 넣느라 야단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구멍에 돌을 던져 모두 들어가면 금산 산신령이 소원 한 가지를 들어준다고 한다.
모두가 자신의 기복을 위해 힘껏 돌을 던질 때 나는 어디 남북통일이나 한번 빌어볼까나. 그러나 돌 던질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 것인지! 미처 돌 던질 차례를 얻지 못한 나는 '내게 돌 던질 기회만 줘도 통일은 지척인데'라고 중얼거린다. 오늘은 내가 너무 자주 공염불을 외는구나. 아무래도 간밤의 숙취 탓일레라.
다시 산길을 더듬어 오르니 금산산장이 나온다. 여기 저기 유자주 마시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대장봉, 화엄봉, 일월봉, 제석봉 등이 아직도 성불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무래도 금산산장 유자주 때문이 아닐까 싶다.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좌선대로 향한다. 눈 들어 바라보니 좌선대에 웬 고승이 결가부좌를 틀고 있다. 아니, 이것이 원효대사의 환생이신가 하고 눈을 마찰시키고 보니 어럽쇼! 팸투어를 주관하는 팀의 일원인 오남해님이 아니신가? 이런 걸 두고 바로 주최측의 농간이라 한다. 할!!
금산 등산의 최종 목적지인 상사암에 도착했다. 이야기는 이야기요, 뙈기는 뙈기다. 상사병, 난 그 구태의연한 시작과 결말에 결코 동정을 보태지 않을 셈이다. 상사바위에 연접한 바위들에는 아홉 개의 홈이 파여 있다. 비가 와 고이면 샘처럼 보인다 하여 구정암이라 부른다 한다.
여기저기서 상사병 걸린 총각을 추모하는 술자리가 벌어졌다. 닉네임이 박초시인 분도 어느새 추모 대열에 합류해 있다. 그는 어제 밤새 내 음주 도반이 아니던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그의 핸드폰처럼 아마도 음주 습벽 또한 011 가족인가 보다.
벌써 예정 시간을 훌쩍 넘겨 버렸다. "하산해도 좋다"라는 금산 산신령의 명령은 없었지만 하산을 서둘렀다. 미조포구 앞으로 갓! 복곡 주차장을 출발한 버스는 점심 시간에 늦었다고 씩씩거리고. 미조포구 공주식당에서 갈치회 정식을 먹었다. 처음 먹는 갈치회에 대해 내 혀는 의외로 담담했다. 미조포구 선창으로 나아가 어부들이 그물을 손질하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곽재구 시인의 산문집 <내가 사랑한 세상 내가 사랑한 사람>이라는 그의 산문집 가운데 <미조포구에서의 하룻밤>이란 글의 한 귀절을 생각했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좋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베르그송? 릴케? 한때 그 말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꿈과 향수에 대한 설레임이 그 거짓말 속에 담겨 있을 수 있다고 믿은 때문이었다.
덧없고 부질없는 것들로 가득찬 삶이라는 일물(一物)에는 그렇게 많은 위안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여행이란 것도 하나의 거짓말이며 우린 때때로 그 거짓말에 기대고 싶은 하는 건지도 모른다.
버스는 이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인 은점마을 해오름 예술촌을 향해 달려간다. 폐교를 활용해 지역문화의 중심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취지에 걸맞게 해오름 예술촌은 선박모형전시실과 미술실, 다실과 판화공방과 도자기실, 천연염색실에 화랑, 와인숍에 이르기까지 잘 꾸며져 있었다.
해오름 예술촌 운동장에서 진행된 남해 역사 퀴즈 대회를 끝으로 모든 일정은 막을 내렸다. 맨 처음 집결지였던 남해대교로 돌아와 기념 사진을 찍은 후 서로 악수를 나눴다.
1박 2일 동안 내가 주마간산 격으로 돌아본 남해는 분명 전설의 땅이었다. 대구산성, 미조포구, 상사바위 등등 전설이 깃들지 않은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전설은 당대 민중의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고 민중의 속내에 숨겨진 희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남해에 유독 전설이 많다는 건 남해 사람들이 매우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이라는 걸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그들은 전설에 담긴 희망에 의지해서 가난이라든가, 국난의 파도를 헤쳐 나왔을 것이다. 1박 2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남해는 내게 너무도 많은 여운을 남겼다. 무정한 버스가 서서히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