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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부러워하고 샘을 낼 정도로 단란하고 화목했던 우리 가정에 느닷없이 걸려 왔던 전화 한 통.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교 공간에서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꿈속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사랑하는 아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무적인 연락 전화 한 통. 자식을 전쟁터에 보낸 것도 아니고, 위험한 공사 현장에서 일하게 한 것도 아닌데, 마치 군대에서나 올 법한 '전사통지'나 다름없는 그 전화 한 통.
이 전화 한 통이 우리 가족의 삶을 바닥에서부터 뒤엎고, 한 가정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린 고통은 그 어떤 언어나 표현 수단으로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은 이 엄청난 일을 감당해낼 힘도, 지혜도 없어서 그저 망연히 넋을 잃고 주저앉아 아무 것도 못한 채 절망의 눈물만을 흘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학교 관계자들이나 많은 친지, 동료 등 주변 사람들의 걱정과 염려, 그리고 따뜻한 조언과 위로가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 어떤 판단도, 결정도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분들의 말씀은 사회 상규(常規)와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 행위에 대한 최선의 길을 상기시켜 주었고, 우리는 그에 따라 꿈결에서처럼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한 치도 어길 수 없는 철리(哲理)를 생각하며 사랑하는 아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먼 길로 떠나보냈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아들을 떠나보냈지만, 그 후 우리 가족에게 남겨진 고통과 절망은 고스란히 우리만의 몫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영결식에 참석하여 슬픔을 같이 했던 그 많은 분들은 되돌아서자마자 바로 바쁜 자신들의 삶 속으로 돌아가 당연하게도 우리 일은 금세 망각되어 버렸을 것이고, 비바람과 폭풍우가 모질게 몰아치는 거친 광야에 홀로 남겨진 우리 가족만이 그 험난한 고통을 맞받아야 했다. 우리로서는 서럽고 야속한 일이었지만 그게 어쩔 수 없는 세상 이치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 이번 사고는 나와 우리 아이가 '재수 없어서' 당한 '개인적인 비극'을 넘어선다고 판단해 나는 이 일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고 싶었다. 심각한 이공계 기피 현상이 국가 차원에서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이공계 현업 종사자들조차 불안한 미래와 열악한 연구 환경 때문에 '탈출'을 꿈꾸는 현실이 이번 사고와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슬픔 가운데서도 지난 8월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고, 고맙게도 <오마이뉴스>에서 공간을 허락해 줘 관련 글 10여 편을 공개할 수 있었다.
그 글을 읽은 많은 분들이 격려와 위로를 보내 주셔서 작은 용기를 얻을 수도 있었다. 그동안은 주로 아들을 잃은 내 개인적 슬픔과 고통을 글로 썼는데, 그게 '공적(公的)'인 지면을 '사적(私的)'인 것으로 유용(流用)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없지 않았다. 최대한 그런 요소를 자제하려 노력했지만, 글 내용의 성격상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이제 사고 후 만 6개월이 되는 오늘(13일) 나는 그동안의 경과와 함께 사후 수습 진행 상황을 정리해서 공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는 그간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신 독자 분들에 대한 내 책임이자 의무이며, 이번 사고가 개인적 불행이 아니라 이 분야 종사자 여러분이 주시하는 공적(公的) 성격의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난 글에서도 밝힌 것처럼 이번 사고가 계기가 되어 과기부 차원에서 실험실 안전에 관한 법 제정을 추진하게 된 것은 늦긴 했지만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속히 입법 절차를 마쳐 해당 분야 연구자들이 혜택을 받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 다음으로는 사고 수습에 관한 문제다. 어떤 기관의 잘못으로 사고가 나서 그 소속원들의 인명이 손상되었다면 이는 당연히 그 기관의 책임이며 마땅히 그에 따른 법적,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사고에 대해 명확한 규정이나 제도적 뒷받침이 미비하여 가해자(기관)와 피해자(유족) 사이에 의견 대립이 생길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올해 카이스트에 대한 국정감사(보도자료)에서는 여야 의원들 모두 이 사고에 대한 질의가 주종을 이루었는데, 그 일례로 보상과 관련해 김영선 의원은 "현재 학교측이 경영자책임보험에 가입되어 있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본다. 외국의 경우 사고에 대한 예방도 철저하지만 사고 발생 시 그 보상비용이 엄청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안전예산을 비용으로 보지 않고 투자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처음부터 보상 문제는 학교측에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어떻게 내 사랑하는 아들의 몸값을 돈 가치로 환산하여 따질 수 있단 말인가. 학교측 관계자를 만난 자리에서 나는 돈으로 '보상'을 하려 한다면 카이스트를 다 팔아 준다고 해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가 바랐던 것은 억울하고 원통하게 떠나야 했던 아들을 위해 아이가 공부하던 학교에 작은 추모의 공간이라도 만들어지고, 또 아이가 수행하던 연구를 그 동료나 후배 세대들이 지속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념사업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일의 성사를 위해 슬픔과 절망이 밀려올 때마다 학교를 찾아가 행패라도 부리고 난동이라도 쳐서 가슴속의 그 응어리를 풀고 싶은 유혹을 자제하고 인내하느라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러면서 학교측의 성의 있는 자세를 믿고 기다렸다. 설마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들이 모인 곳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공공기관을 운영하는 분들이 그만한 양식도 없겠느냐는 신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설마'가 결과적으로 우리를 이렇게 실망케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사고 후 두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나도록 우리가 원하는 사고의 정황이나 경위조차 한마디 설명해 주지 않고, 입건된 사람들에 대한 탄원서를 요구했던 그들을 믿었던 내가 어리석었던 것일까.
이 사실에 대해 유족의 울분과 의문을 제기했던 언론(대전MBC) 보도 이후, 나의 절친한 동료 지요하 선생이 인터넷 매체에 쓴 글에 대해서는 '공문'으로 민원 회신까지 보냈던 학교가 그 후 여론이 잠잠해지자 시간 끌기로 버틸 줄을 내가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경찰에서 사건 수사기록이 검찰로 넘어간 7월 초에 학교에서는 우리를 불러 '자체진상보고서'라는 걸 설명해 주었다. 사고의 여러 정황을 종합하여 학교에서 내린 결론은 현행 규정상 저촉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학교는 아무 책임 없다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사고 원인은 부상자의 가스통 취급 부주의로 추정된다는 것이었단다. 그 결과를 듣고 나는 물론 부상자 가족들은 격렬하게 항의하고 학교측의 책임에 대해 추궁을 했다.
잘 가르쳐서 훌륭한 인재로 키워달라고 맡긴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을 결과적으로 죽고 다치게 만들어 놓고 규정을 찾아가며 책임 회피에 급급한 그들이 진정 이 나라 최고 과학자들이 모인 집단이라고 어찌 인정할 수 있는가.
7월 중순 내 근무처를 찾아온 사고수습위원장이라는 분과 학생처장에게 나는 분명하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 공부하던 학교와 '원수'지는 걸 절대 원치 않는다, 상상하기 싫겠지만 당신들 자녀가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성의 있게 사후 수습에 임해 줬으면 좋겠다, 학교에서 억울한 희생을 당한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우리 가족이 당한 고통을 달래 줄 수 있는 안을 만들어 내게 알려달라, 이 문제를 '보상'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부탁을 절절한 심정으로 했다.
그 자리에 동석했던 내 동료 교수님 한 분이 중재를 자임하고 나섰고, 그 후 그들의 만남이 거의 석 달 가까이 계속되었는데, 우리 가족들은 답답한 마음에 별별 추측을 다해가며 지지부진한 진행에 나를 닦달해 댔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번 맡긴 일인데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볼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달래기만 했다.
지난달 24일 그쪽 사람들이 만든 최종안을 전달한다고 해서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들이 내놓은 안이라는 건, 실험실과 세미나실에 아이 이름을 명명해 주겠다는 것, 적당한 공간에 추모비를 세워 주겠다는 것, 그리고 추모 사업을 위한 기념재단의 기금 규모(공개하는 게 적절치 않은 것 같아 액수는 적지 않겠다)였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실질적인 학술재단 사업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런 내용은 수용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가장 화가 나고 울분을 느끼는 것은 그 액수를 말하면서, 자신들도 여러 가지로 알아본 결과라며 무슨 '호프만식 계산법'이라나 뭐라는 걸 들먹이는 것이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이번 사고에 대해 학교에서 접근하는 태도는 길 가다가 차에 치여 죽은 사람을 놓고 그 보상금을 계산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태도였다.
아무리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라지만 어찌 사고방식이 그런 식으로만 작동하는지 참으로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억울하게 떠난 아들에 대한 '보상금'을 요구하고, 그 액수를 가지고 학교와 다툴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장례식을 왜 순순히 치렀겠으며, 울분을 억제하며 학교에 그만한 시간과 기회를 주면서 이제까지 기다렸겠는가. 우리의 진심과 성의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게 하는 그들의 태도는 정말 통분을 일으켰다.
나는 지금까지 가끔 언론에 보도되는 대형 사고 후 그 수습과정에서 시신(屍身)을 볼모로 버티며 협상하는 모습에 대해 대체로 눈살을 찌푸리는 편이었다.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을 놓고 그 값을 따져 많다거니 적다거니 밀고 당기는 게 과연 사자(死者)에 대한 예의인가. 어떤 이유에서든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음 앞에 겸허해지고 경건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며 그분들의 그 절박하고 '효율적인 투쟁'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부터 요구 조건을 내걸고서 그것이 관철될 때까지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 버텼다면, 분명 오래 전에 우리 뜻대로 처리되었을 것이다. 눈앞에 일이 닥쳐야만 허겁지겁 해결책을 찾아 나서고, 양순하게 대처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손해가 돌아가는,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그 비겁한 태도'가 정말 역겹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일단 '협상'이 결렬된 지금, 난 지금 생소한 법률 관계를 알아보며 사회적 약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결코 거기까지는 가지 않으려 했던,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 이 일이 슬픔에 만신창이가 되어 '환자' 수준인 나와 내 아내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 줄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여기까지 오고 만 것이다.
나는 지금도 내 아들이 공부했던 카이스트라는 데를 믿고 사랑하는 마음에 조금도 변함이 없다. 이 기관이 잘 운영되고 발전하는 것이 우리 미래를 밝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학교를 구성하고 있는 경영진들에 대해서는 서운함을 넘어서 울분을 금할 수 없는 마음이다.
어찌 모든 일을 그처럼 기계적이고 사무적으로만 처리하려고 하는지, 철학자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분명 이성은 인간의 가장 고도(高度)한 정신작용임이 틀림없지만, 감정이 없이 이성만으로 구성된 인간은 신의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니면 저 돌멩이나 나무 토막에 불과할 것이다.
사람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불완전과 실수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하고, 이성과 함께 감정을 적절히 발휘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규정과 제도만을 따져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남의 피눈물보다 자신들의 안위만을 걱정한다면, 그건 얼마나 추악한 일인가. 세상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절망에 빠져 있는 유족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않은 채, 신성한 공간인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도로상의 흔한 교통사고쯤으로 처리하려는 저분들의 대처 방식에 할 말을 잃을 뿐이다.
한말의 애국자 매천 황현 선생은 나라를 잃은 슬픔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남긴 절명시(絶命詩)에서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 일을 생각하니, 글자 아는 사람으로서 사람 노릇하기 어렵구나"라고 말씀하셨다. 무식한 사람은 제 멋대로, 내키는 대로 세상을 살 수 있지만 배운 사람들은 그만큼 사람답게 살기 어렵다는 뜻이다.
제발 저분들이 '글자 아는 사람'의 면모를 회복해서, 오늘이라도 졸지에 세상을 떠난 억울한 영혼과 우리 가족들의 통한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대처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당한 비극이 단순한 비극으로 가중되어 머물지 않고 새로운 의미와 가치로 승화되는 계기로 전환되었으면 하는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버림받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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