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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모습> 의 표지
ⓒ 현대문학
온 세상이 까만 밤, 눈발은 지상의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 쳐대고 있었다. 나는 두 시간을 그렇게 눈을 맞고 서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보이고 나는 잰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하지만 그는 나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내 눈길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소리를 내어 그를 부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의 완강한 등이 말해 주었다. '나를 따라오지 말라'고. 나는 어둠속으로 묻혀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순탄치 않을 그의 시간들을 감지할 수 있었다.

'뒤쪽이 진실이다'라는 '미셀투르니에'의 말은 내게 해묵은 옛날의 한 순간을 더듬게 한다. 뒷모습만이 기억나는 한사람, 문득 시간의 더께를 실감하게 된다.

그는 내게 뒷모습을 보였지만 나는 그와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다. '그가 보는 것을 나 또한 보았다고 믿었는데...' 같이 있는 뒷모습은 정겹지만 떨어져 있는 서로의 뒷모습은 애달프다.

<뒷모습>은 프랑스의 지성 미셀뚜르니에가 정면을 외면하고 뒤쪽에서 찍은 53컷의 사진에 무한한 깊이를 느끼게 하는 매혹적인 글을 실은 사진집이다.

앞모습이 겉모습이라면 뒷모습은 속모습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뒷모습만 찍은 많은 사진들을 다시 앞모습으로 돌려놓고 눈빛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다. 하지만 곧 앞모습의 익숙함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앞모습은 얼굴에 시선이 머물러 있어 다른 부분들, 이를테면 손가락의 움직임, 주위의 공간인 배경등에 소홀할 수 있다.

하지만 사진이 보여주는 대로 뒷모습은 많은 것들을 보게 한다. 처음엔 단순하게 평면적인 한 판의 조형물과 그것을 이루는 배경으로 구분되다가 다시 눈길은 처음으로 돌아온다. 목과 등의 언저리에서 점점 시야는 줌인 아웃으로 끌려가고 돌아오면서 되집기를 반복한다.

골똘해 있는 뒷모습의 사진들을 통해서 적어도 세 사람의 뒷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뒷모습의 대상이 된 사진속의 인물, 그리고 몇 발치 떨어져 사진을 찍은 '부바'의 뒷모습,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있는 나의 뒷모습이다.

시공간은 다르지만 모두 같은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상상하면 이곳에 실린 흑백의 사진들이 말해주듯 '쓸쓸한 삶이지만 낙관적인 행복감'을 얻기 위한 모습일 것이다.

나 또한 일상에서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뒷모습에서 앞모습보다 더 깊이 열중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정지해 있는 듯하면서도 약간 숙인 목덜미의 뼈대에서 완연하게 활동하는 몸의 에너지를 느끼는 것이다.

장난감을 흔드는 소리와 아이의 나직하고 저항없는 뒷모습이 한낮의 햇살과 더해질 때는 평화로움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는다.

한창 아기를 업던 때, 엄마 등만 보는 아기의 답답함을 배려해 앞으로 안을 수 있는 아기띠를 선호했다. 하지만 아기는 안아 주는 것보다 뒤로 업히는 것을 더 좋아했다. 등에 기댄다는 것, 어머니의 등에 엎드려 안심하고 사물을 바라본다는 것이 아기에게는 더 없는 안락함이었다.

눈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등에서 어머니의 숨결을 느끼는 것이다. 보이는 것보다 느껴지는 것이 진실임을 확인한 셈이었다.

뒷모습에는 앞모습처럼 얼굴에 의식적인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등, 완전한 순진함에 누구나 다를바 없어 보이는 유쾌한 엉덩이는 사회적 자아, 페르소나에서 놓여날 수 있다.

유배된 듯한 혼자만의 긴 침묵, 은밀히 속살대는 듯한 사이에서의 여운, 사막같은 뼈가 보여주는 암시의 세계, <뒷모습>은 주머니에서 달콤한 사탕을 하나씩 꺼내듯 인생의 비밀들을 살갑게 가르쳐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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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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