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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어디 가고 빈 의자만
주인공은 어디 가고 빈 의자만 ⓒ 김강임

이럴 때일수록 따뜻한 것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가슴 뭉클한 감동과의 만남을 갖기 위해 다시 서귀포를 찾았다.

언덕 위에서 중문해수욕장의 흰 모래밭을 활처럼 껴안은 곳. 해변 끝에서 중문의 해안 절경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 잠시 일상을 접어두고 영화 속 '쉬리의 언덕'으로 떠나 보자. '쉬리의 언덕'은 서귀포 70경 중의 한 곳으로, 한국의 영화사를 다시 쓴 <쉬리>의 마지막 장면의 촬영 장소이다.

나도 영화속 주인공이 되어
나도 영화속 주인공이 되어 ⓒ 김강임

중문해수욕장 서편 숲 사이로 고개를 내민 나무 계단을 따라 해안가 언덕 위로 올라가면 영화 속의 인상 어린 장면과 만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기 때문인지 벤치 4개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그 벤치에는 번갈아 가며 주인이 바뀌어 가고 있다.

쉬리의 언덕에서 바라 본 중문해수욕장
쉬리의 언덕에서 바라 본 중문해수욕장 ⓒ 김강임

그 이유는 '쉬리의 언덕'에 있는 벤치에 앉으면 싱그러운 바다 내음과 시원한 해풍이 가슴속으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특히 멀리 보이는 수평선 아래 중문해수욕장이 펼쳐지는 해안 절경과 끝없이 이어진 옥빛 바다가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다.

중문해수욕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여 출렁이는 파도 소리가 금방이라도 귓가에 들려 오는 듯하다. 끝없이 이어지는 모래 사장 위에 포말을 그리며 하얗게 이는 파도는 장관이다. 특히 쉬리의 언덕에는 한번 앉으면 일어서기 힘들 만큼 사람을 붙드는 매력이 있다. 그 이유는 영화 <쉬리>에서 유중원(한석규)과 이명현(김윤진)이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 벤치에 나란히 앉아 지난날을 회상하며 끝을 맺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소나무 세 그루가 언덕을 지키고 있을뿐
소나무 세 그루가 언덕을 지키고 있을뿐 ⓒ 김강임

사람들은 바로 그 언덕, 그 벤치에 앉아 다시금 <쉬리>의 잊지 못할 감동의 잔상을 떠올리며 스스로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다. 더욱이 벤치 앞에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흔적이 남겨져 있다.

영화의 흔적이 남았네요.
영화의 흔적이 남았네요. ⓒ 김강임

영화 속에 등장하는 키싱구라미라는 물고기에 대한 대사는 인상적이다. 한 마리가 죽으면 나머지 한 마리도 뒤따라 죽는다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말라 죽기도 하고 배에 물이 차 죽기도 한다는 대사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만남의 장소인듯
만남의 장소인듯 ⓒ 김강임

그렇기 때문인지 이 곳에는 사연이 각기 다른 사람들이 찾아와 아쉬운 이별을 고하기도 하고 다시 사랑을 기약하기도 한다. 이를 위해 벤치 옆에 묵묵히 서 있는 노송 두 그루는 비밀을 지켜 주는 듯 말이 없다. 특히 언덕 바로 뒤에서는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 일본의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가 기자 회견을 했고, 구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산책을 즐기기도 했다.

들꽃따라 산책로를 걸어보면
들꽃따라 산책로를 걸어보면 ⓒ 김강임

더구나 쉬리의 언덕에서 산책로로 이어지는 길가에는 가는 계절을 붙잡고 얼굴을 내미는 가을의 꽃들이 줄을 지어 무리를 이루고 있다. 보라색, 노랑색, 하얀색 등 겨울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들꽃은 왠지 처량해 보인다.

바다로 이어지는 산책로
바다로 이어지는 산책로 ⓒ 김강임

산책로를 따라 바다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면 환상의 중문해수욕장이 보인다. 특히 쉬리의 언덕에서 해안가로 이어지는 연인들의 추억 여행은 꿈의 여행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해변을 걸어온 연인들은 '쉬리의 언덕'에서 자신의 기억 속에 남은 영화 속의 이미지와 현실의 풍경을 일치시키면서 따뜻한 겨울을 기다린다.

'쉬리의 언덕'이라고 해 봐야 바닷가를 향한 4개의 벤치와 해송 세 그루가 전부다. 그러나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운치 있게 펼쳐진 해안 절경과 옥빛 바다를 내려다 보며 한참 동안 넋을 잃는다.

서귀포 70경. 쉬리의 언덕에는 전설이 피어나고 있었다. 이 언덕에서 젊은 연인들은 사랑의 전설을 만들어 가고 있다. 특히 산책로의 벤치마다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연인들의 풍경은 을씨년스러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따스하게 느껴진다. 사진을 찍기도 하고,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산책을 하기도 하고, 영화 속 삽입곡 'When I dream'을 부르며 포옹을 하기도 한다.

누구를 기다리나?
누구를 기다리나? ⓒ 김강임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 속에 남은 이미지와 현실의 풍경이 일치하는 순간 탄성을 터뜨린다고 한다. 이를 확인이라도 하듯 해변을 걸어온 연인들은 '쉬리의 언덕'을 보기 위해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사랑을 쌓아가고 있다.

<쉬리>에서처럼,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올 겨울은 참 따뜻할 것이다. 그러나 한 하늘 아래서 같은 공기를 마실 수 없는 적이 되어 나타난 사랑. 그 비정한 삶의 수레바퀴를 조용히 가슴에 묻는 남자.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곁에서 천진난만한 눈망울을 하고 있는 여인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힘겨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쉬리>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은 과연 무엇일까? 어쩌면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닌 또 다른 '나'를 찾기 위해 '쉬리의 언덕'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닐런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현실과 이상이 파도처럼 줄타기를 한다.

분명 이상은 아름답게만 느껴지는데 잡을 수 없을 것 같다. 마치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수평선처럼. 그러나 현실은 촌스럽고 지겹게 느껴지는데도 왠지 아늑하고 정감이 있다. 마치 중문 해수욕장에 쌓여 있는 모래사장처럼 말이다.

주인공이 되어 'When I dream'을 불러 보세요
주인공이 되어 'When I dream'을 불러 보세요 ⓒ 김강임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람들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쉬리의 언덕'을 보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아마 그것은 '쉬리의 언덕'에서 보이는 머나먼 수평선을 타고 바다에서부터 해안으로 밀려오는 파도와 끝없이 이어지는 백사장을 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이는 바다와 백사장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무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무대에 서서 '내가 주인공이다'라는 착각에 빠져 꿈을 꾸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When I Dream.' 마치 <쉬리>의 주제곡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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