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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문화, 아이들 천왕봉에 서다
또 하나의 문화, 아이들 천왕봉에 서다 ⓒ 신종균

10시 30분에야 천왕봉에 올랐습니다. 남들은 두 시간이면 거뜬하다는데 여섯 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세상이 발 아래에 깔려 있습니다. 모두들 환희에 찬 얼굴입니다. 저 멀리 설악산 진부령, 백두산을 향하여 대장정의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천왕봉 표지석에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는 글발이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이 글발의 의미를 아이들에게 설명하려다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느낌의 대상임을 어렴풋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표지석으로 몰려드는 것은 느낌 때문일 것입니다. 혼자 혹은 여럿이 글발을 끌어안고 사진을 찍는 것은 또 하나의 느낌을 창조하는 숭고한 행위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칭찬이 보약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배불리 얻어 먹은 아이들의 발길이 가볍습니다. 제석봉을 지나면서 또 아이들에게 봉우리 전체가 왜 고사목들로 가득한지를 설명하려다가 입을 다물었습니다. 느낌을 전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앎을 통해서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인지, 느낌을 통해서 앎을 확산시키는 것인지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산에서 만큼은 아이들에게 머리로 가르치는 것보다 가슴으로 공유하는 체험이 더 소중함을 믿습니다.

장터목은 늘 시장처럼 사람들이 들끓습니다. 사람들 틈 속에서 부대끼며 점심을 먹고 나니 힘이 배에서 솟아납니다. 장터목에서 세석까지는 구름 위의 산책길입니다. 각자 편한 대로 나무가 되고, 꽃이 되어, 어머니산 지리산의 품에 안깁니다.

풀이 되고 나무가 되어 세석으로 가는 길
풀이 되고 나무가 되어 세석으로 가는 길 ⓒ 신종균

오후 2시 30분에 유럽식 산장의 중후함을 뽐내는 세석 산장에 도착하였습니다. 라면으로 원기를 보충합니다. 사실 두 시간 남짓한 벽소령길이지만, 우리 상태로는 네 시간을 늘려 잡아야 합니다. 비까지 내리기 시작합니다. 어차피 야간 산행을 해야 할 판입니다. 지사제를 먹어도 계속 설사를 하는 준용이 덕분에 쉬엄쉬엄 길을 갑니다. 피곤에 절은 아이들이지만, 어디까지 어떻게 가야하는지를 잘 압니다.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둠을 헤쳐갑니다. 가슴 속 솔직한 언어와 느낌을 숲속에 뿌려가며 함께 걷다보니, 멀리 왕자님이 사는 궁궐처럼 벽소령 산장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서둘러 저녁을 해 먹고 잠자리로 들어갑니다. 건강하게 일정을 소화해 준 아이들이 고맙습니다. 더 고맙고도 무서운 것은 아이들의 어머니, 소위 '아줌마'들입니다. 자식들의 장래를 위하여 강남 특구를 만들고, 기러기 아빠를 만들어 내는 아줌마들입니다. 대학 입시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 땅의 아줌마들입니다. 그렇건만 파주중학교의 아줌마들은, 아이들이 대학 입시 전사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직하게 자신들의 아이들을 산으로 보냈습니다. 아이들만의 백두대간 초행길에 어린 딸과 아들을 내보낸 아줌마, 어머니들의 깊은 뜻을 왜 모르겠습니까? 오늘 밤 꿈속에서는 무성한 잔뿌리를 내릴 것만 같습니다. 당신에게도 좋은 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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