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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에 눈을 떴습니다. 살그머니 대피소 밖으로 나갑니다. 9월이라고는 해도,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파고듭니다.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는 당신의 새벽도 이미 밝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대량 실업 시대에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새벽의 2시간을 자기만의 시간으로 활용하라는 당신의 충고가 떠오릅니다. 백 번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일들이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벽소령의 새벽이 길게 느껴집니다. 코를 골며 단잠에 떨어져 있는 아이들을 차마 깨울 수가 없습니다. 어른들도 1박으로 종주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지리산 주능선을 우리 아이들이 가고 있습니다. 누구도 우리의 길을 대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얘들아! 일어나거라. 5시다. 현배야, 어디 아픈 데는 없니? 몸이 뻐근할 것이다. 준비 운동을 하거라. 장비도 잘 챙기고. 형제봉을 거쳐 연하천 산장까지는 두 시간 거리다. 연하천에서 아침을 먹고, 토끼봉을 넘어가자. 화개재를 지나 임걸령에 다다르면 노고단이 바로 코앞이다. 성삼재로 내려서면 파주행 버스가 기다릴 것이다. 자, 출발하자. 벌써 50분이 지났다."
벽소령에서 연하천 가는 길은 핏빛 선연함이 가득합니다. 이곳은 빨치산의 활동 무대였습니다.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버림받은 현대사의 비극적인 영웅,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이현상이 사살된 곳입니다. 국군에게 쫓긴 그들은 살기 위해서 가파른 산허리를 달렸고, 죽지 못해 이 산속을 헤매었습니다. 또한 그를 추종했던 수많은 범부들이 마지막 피를 흘린 곳입니다. 좌익과 우익으로 갈려 광란의 죽음을 연출한 이곳에 서면, 늘 서러운 안개비가 내립니다.
예비군 교육장에서 만난 당신의 말들이 부슬부슬 비에 섞여져 내립니다. 당신은 이현상을 '작은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국군 장교로 전역한 당신의 아버지는 가족의 한을 풀기 위하여, 당신을 사관학교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입학을 거부당할 수밖에 없었던 당신은, 특전사 베레모 사나이가 되어 12·12 사태의 또 다른 범부가 되었습니다. 이 얄궂은 가족사를 들려주던 당신의 표정에서,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우리 시대의 이야기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음을 봅니다.
아침 상념의 산행이 꽤나 고단합니다. 아이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떠들어대는 것이 정상입니다. 아이들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몹시 힘들어 한다는 반증입니다. 나는 아이들에게 일부러 참기 힘든 침묵의 시간을 안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치열한 자기 내면의 대화 속에서 아이들이 성숙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입니다.
7시 45분, 연하천에 도착하면서 성장의 고통 속에서 말을 잊었던 아이들이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지리산의 새벽 정기를 머금은 아이들이 또랑또랑한 말들을 쏟아내며 아침밥을 짓습니다. 부모가 만들어 주는 밥만 먹던 아이들이 스스로 찌개를 끓이고 밥을 지어 먹습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밥을 해 먹는 것, 나는 이것이 남자들이 부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시대 변화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성의 고정 관념은 해체되었습니다. 남녀를 구별하지 않는 아이들의 언어에서 이같은 변화의 양상은 확연히 드러납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해결하고, 스스로 홀로서기에 익숙한 아이들이 연대하는 세상은 분명 지금보다는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밥을 먹는 일부터, 모두 아이들에게 맡겨 버립니다. 참 신기한 것은, 아이들이 소꿉장난하듯이 각자의 역할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비록 3층밥일망정 스스로 일구어 내는 과정에서, 우리의 밝은 내일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백진아, 또 가자."
아침을 든든히 먹은 덕분에 가볍게 명선봉을 넘어 토끼봉을 오릅니다. 빗줄기가 굵어집니다. 화개재로 내려서면서, 내친 김에 삼도봉을 타오릅니다. 반야봉 밑을 지나면서 아이들이 지쳐가는 모습을 봅니다. 원래 뱀사골산장에서 점심을 해 먹을 계획이었지만, 시간 절약을 위해 그냥 지나온 것이 자꾸 걸립니다. 12시 30분입니다.
"얘들아, 밥 먹자."
노루목에서 배낭을 풀었습니다. 행동식입니다. 고이 간직해온 비장의 먹거리들을 나눕니다. 비를 맞으며 먹다보니 턱이 흔들리고 손이 떨려서 음식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뿔싸! 모두가 덜덜 떨고 있습니다. 황급히 출발을 서두르는데, 한 무리의 산행객들이 우리들을 향해 환호를 연발합니다.
"어디서 왔니?" "백두대간 종주라고?" "야, 참 대단하구나!" "여러분! 우리 모두 학생들을 위하여 박수를 칩시다." "짝짝짝……."
게다가 우리 아이들에게 따뜻한 찻물을 나누어주지 않습니까! 갑자기 몸이 더워짐을 느낍니다. 그래, 바로 이 맛입니다. 이 맛 때문에 세상은 늘 따뜻합니다.
마르지 않는 샘 임걸령에 도착하여, 부모님께 드릴 지리산 생수를 퍼 담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옵니다. 멧돼지들이 뛰어 논다는 돼지평전을 돼지처럼 걸어갑니다. 하산이 멀지 않았다는 희망이 아이들을 들뜨게 합니다. 또 다시 침묵에 빠져들던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성삼재로 내려서는데, 어제는 찔끔 눈물까지 짜던 한호가 종일 내 뒤를 바짝 따라붙는 것이 아닙니까? 한호야! 너 산삼 캐 먹었니?
오후 3시 50분. 빗방울과 땀방울을 뒤집어쓴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로 성삼재는 마냥 시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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