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는 호세 리잘은 필리핀의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그렇듯이 상류계층의 자식이었고, 여느 식민지의 상류계층의 자녀들이 그래왔듯이 스페인에 유학을 갔다가 그동안 필리핀 내에서 세계의 중심이라고 배워왔던 스페인의 허상과 잘못된 식민교육의 문제를 깨달았다.
1892년 필리핀 민족동맹을 조직하여 비폭력 저항 운동을 전개하다가 반식민 폭동 공모 혐의로 체포되어 1896년에 총살당했는데, 그가 유명한 것은 의사이자 시인인 번뜩이는 천재성이나 독립투사라는 면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처형되기 전날 쓴 '나의 마지막 작별'이란 시 때문이다.
"잘있거라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태양이 감싸주는 동방의 진주여
잃어버린 에덴이여
나의 슬프고 눈물진 이 생명을
너를 위해 바치리니
이제 내 생명이 더 밝아지고 새로워지리니
나의 생명 마지막 순간까지
너 위해 즐겁게 바치리
(중략)
먼 훗날 잡초 무성한 내 무덤 위에
애처로운 꽃 한 송이 피었거든
내 영혼에 입맞추듯 입맞추어다오
그러면 차가운 무덤 속
나의 눈썹 사이에
너의 따스한 입술과 부드러운 숨소리 느끼게 되리니
부드러운 달빛과 따스한 햇빛으로
나를 비쳐다오
내 무덤가에 시원한 솔바람 불게 하고
따스하게 밝아오는 새 빛을 보내다오
(중략)
내 영원히 사랑하고 그리운 나라
필리핀이여
나의 마지막 작별의 말을 들어다오
그대들 모두 두고 나 이제 형장으로 가노라
내 부모, 사랑하던 이들이여
저기 노예도 수탈도 억압도
사형과 처형도 없는 곳
누구도 나의 믿음과 사랑을 사멸할 수 없는 곳
하늘나라로 나는 가노라
잘있거라, 서러움 남아 있는
나의 조국이여
사랑하는 여인이여
어릴 적 친구들이여
이 괴로운 삶에서 벗어나는 안식에
감사하노라. 잘있거라
내게 다정했던 나그네여
즐거움 함께했던 친구들이여
잘있거라 내 사랑하는 아들이여
아, 죽음은 곧 안식이니....
호세 리잘/ <나의 마지막 작별>
그의 시신이 묻힌 자리에 세웠다는 기념비는 예전 죽은 자의 비분강개를 알리 없겠지만은 그의 소망처럼 그 비문 주위에는 이름 모르는 화사한 꽃들이 활짝 피어 죽은 자의 영혼에 입 맞추는 듯하다.
죽을 때까지 스페인 사람들에게 무릎 끓기 싫다는 이유에서 등뒤로 총을 맞았다는 조각상을 처음 보았을 때 칼이든, 총이든 뒤로 맞는 것을 비겁자, 도망자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사고 방식과는 너무나 다른 그네들의 사고의 차이에 당황되고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어쩌랴, 그게 바로 각 민족 특유의 문화적 차이인 것을…'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공원에는 휴일을 즐기기 위해 나무 그늘에서 한가한 오후를 즐기는 필리핀 사람들의 여유로운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물질적인 것만으로는 도저히 충족될 수 없는 남국 특유의 여유라고나 할까?
리잘이 죽어가기 직전 그토록 걱정했다던 그의 조국 필리핀, 잃어버린 에덴에서 작열하는 태양 빛으로 쑥쑥 자라는 야자수 그늘 아래에 모여 있는 이들이 문득 꽃보다 아름다웠다.
| | | 1페소에 새겨진 호세 리잘 | | | |
| | ▲ 1페소에 새겨진 호세 리잘 | | | 필리핀 독립의 영웅인 만큼 호세 리잘의 얼굴은 흔히 볼 수 있다.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1페소짜리 동전안에 새겨진 그의 모습이다.
필리핀과 우리나라와 화폐가치를 비교해보면 대략 1페소가 20원 정도 하는데 현지에서는 1페소에 보통 25원씩으로 따진다.
.물가는 과일과 같은 농산물은 매우 싸지만 공산품은 그네들의 물가에 비해 그다지 싸지 않은 것같다. 예를 들면 대략 맥주 한캔이 35페소이고 캔커피같은 종류가 18페소 정도 하니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그저 그런 수준이다.
보통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고 계산서를 보면 페소 이하의 소숫점으로 나오게 되면 종종 페소 밑으로 센티모라는 단위의 동전을 거스름돈으로 사용한다. / 김정은 | | | | |
여전히 마닐라 하늘의 햇볕은 따가웠고 햇볕을 받은 아스팔트의 지열은 후끈 달아올랐지만 여기 저기 늘어져 있는 야자나무의 청량함은 낯선 이방인에게 외국에서 보내는 첫날밤의 설렘을 안겨주었다.
이국의 밤, 가로등 불빛 그림자에 그리움의 자욱을 묻다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창 밖의 바다를 내려다보니 어느덧 노을이 지고 바닷가 도로에 이상하게 생긴 알록달록한 색깔의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대충 짐들을 정리하고 밖으로 무작정 나가 거리를 배회하였다. 밤이 깊을수록 이 거리는 더욱 더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지개 색깔의 가로등 불빛도, 알록달록한 색을 띠는 분수도, 불꽃놀이도, 간단한 먹을 것을 파는 노점상이며, 길거리에 수수한 의자와 테이블 몇몇을 놓고 음료수를 파는 노천 카페며, 어찌 보면 촌스럽게 보일만큼 알록달록한 꽃다발을 파는 상점이며…. 낮과는 사뭇 달리 들떠있는 활기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이 활력에 넘칠수록 나는 점점 땅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 활기 넘치는 이 곳에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방인일 수밖에….
편의점에서 그들이 자랑하는 35페소 짜리 산미구엘 맥주 한 캔을 사들고, 이제는 깜깜해져 전혀 형체조차 볼 수 없는 시꺼먼 바다를 응시하며 가로등 불빛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불빛이 더욱 알록달록하게 빛날수록 뭔지 알 수 없는 내 마음 속 그리움의 그림자가 순한 맥주거품과 함께 뽀글뽀글 올라오고 있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결국 너무나 이국적인 가로등 불빛 그림자에 정체 모를 내 그림자 자욱을 묻은 채 나는 터덜터덜 호텔로 돌아와야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