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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화살이 날아와 음유시인의 가슴에 꽂혔다. 마침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쳐드는 순간이었다. 시인은 털벅 주저앉았다. 성벽이 그를 위해 등받이가 되어 주었다. 그는 등을 기대고 마지막 구절을 읊조렸다.

"신들께… 바칠 수 있도록 해주소서…"

독이 급하게 온 몸으로 번져갔다. 시인은 곧 숨을 거두었다.

그 다음날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성탑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 또한 시인이 그러했듯 애도가를 부르며 성탑을 맴돌았다. 구슬프고 처량한 노래가 도시를 뒤덮을 때, 폐허가 된 도시에 애가가 핏빛 황혼처럼 휘덮여들 때 침략자들도 더 참을 수 없어 말발굽을 몰아댔다.

그러나 그럼에도 며칠 후 애도가의 물결은 다시 되살아났다. 이번엔 성탑이 아닌 성문 밖에서였다. 사람들은 성벽을 따라 돌며 또 그렇게 날마다 애도가를 불렀다.

남은 사람들

시인들은 우르가 초원에 건설되었다고 노래했다. 지난 1백년간 극도로 번창해 성안은 온통 건물뿐이었음에도 계속 그렇게 노래했다. 외국에서 성탑 경배를 온 승려들이 자기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신전, 건물, 주택뿐이다, 초원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시인들은 대답했다.

"성탑에 올라 사방을 돌아보시오."

그랬다. 성 밖은 말 그대로 초원이었다. 아니 경작지였다. 봄날에 성탑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보면 성밖의 푸른 초원이 성안의 도시를 마치 숄처럼 폭 감싸 안고 있는 듯이 보였다. 아니 며칠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 그 아름다운 도시는 사라졌다. 초원도 짓밟혀버렸다. 축제날이면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던 기도의 거리도, 서민들과 애환을 나누던 점쟁이와 점성가들, 그들의 지대조차 불타버렸다.

온전히 남아 있는 곳이 없었고 온전히 숨어 있는 사람도 없었다. 평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파괴자로 동원되기도 했고 점술가나 무녀들은 각기 자기의 신 이름을 부르며 성밖으로 흩어져 갔다.

도시가 거의 파괴된 어느 날, 늦은 저녁이었다. 성밖에서 멀리 떨어진 한 농가의 부엌방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필경학교 교장과 교감, 젊은 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지금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서로 말이 없었고 표정들은 매우 긴장되어 있었다.

어둠이 좀더 깊어졌을 때 마침내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했다. 부사제장과 그 일행이었다.

집주인이 화덕에 나무토막을 올렸다. 미명으로 가라앉던 실내가 다시 밝아졌다. 부사제장은 주위를 살피면서 교장을 찾았다. 교장은 화덕 저쪽에 서 있었고, 그는 곧장 교장 앞으로 걸어갔다.

"여기…"

부사제장은 가슴에 품어왔던 필경 판을 꺼내 교장에게 건네주었다. 너비 15센티의 얇고 단단한 그 점토판은 대사제장이 남겼던 유품이었다. 교장은 그것을 받아들고 화덕 쪽으로 갔다.

집주인이 나무토막 하나를 더 올려주었다. 불빛이 더 밝아지자 점토판 글씨가 확연히 드러났다. 양면 모두 깨알처럼 채운 그 점토판은 전날 읽었던 그 서한이 틀림없었다. 교장이 일행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서한은 대사제장께서 운명하신 그날 밤, 부사제장이 나에게 가져왔던 것이오. 나는 물론 그때 읽어보았소. 내용이 하도 중대해서 혼자 감당하기는 어려웠고 그래서 여러분들에게도 연락을 했던 것이오."

교장은 먼저 교감부터 지목했다. 그가 화덕 가까이 다가오자 교장은 그 서판을 내밀었다.

"소리를 내지 말고 불빛으로 읽어보시오."

교감이 서한을 읽기 시작했다.

'자네 기억하는가. 백여 년 전의 역사를. 그때도 우리 민족은 모든 땅을 잃었지. 하지만 결국 그 땅들을 되찾았고 우리는 다시 힘차게 도시들을 재건했었지. 지혜의 보금자리인 에리두, 초원에 건설된 아름다운 도시 우르, 신들이 손수 만든 우루크-쿨랍, 안의 '거대한 검'라가시… 지도적인 도시인 키슈, 우리의 영원한 성지 니푸르…

그때 건축가들은 땀 닦을 틈도 없이 일했다지? 사제들과 필경사들도 그러했다네. 왜냐하면 구티 인들이, 문자도 없는 그 야만인들이 우리의 귀한 기록물들을 닥치는 대로 깨트려버렸고, 그래서 사제와 필경사들이 손실된 부분을 다시 보완해야 했던 때문이었네.

본시 야만인들이란 그렇지 않았는가. 보석은 챙기고 문자판은 부수어 버리는 종족들… 우리에겐 소중한 기록물들일지라도 그들에겐 한갓 흙덩이 점토판이거나, 기분 나쁜 부적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겠지.

이번 침략자들도 그렇다고 들었네. 문자도 문화도 없는 종족들… 그들 또한 그럴 것이네. 먼저 약탈을 끝내고 다음은 신전과 도서관을 파괴하려들 걸세.

만약 그렇게 된다면, 보다도 우리가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면, 검은 머리 사람들이 기력을 되찾지 못한다면, 그때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기록 한줄 남기지 못하고 영영 사라져버리는 그런 민족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지금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라네.

자네 기억하는가. 젊은 시절 우리가 격렬히 논쟁을 벌였던 일을. 그때 나는 신이 역사를 만들고 인간은 그저 따를 뿐이라고 했고 자넨 신이 역사를 만든다면 그것은 신이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역사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실행하고 기정사실화시키는 것은 인간 자신이라고.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네. 누가 옳은지는. 그럼에도 오늘 나는 자꾸만 자네 생각을 하고 있다네. 자네도 니푸르에 있는 그 고대서판을 봐야 한다는 생각, 아마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네.

그렇다네. 우리의 고대문자로 씌어진 그 서판은 다름 아닌 엔릴 신의 선언문이었다네. 누가, 어떤 시기에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판인 것만은 확실하고, 그 모든 고대서판들은 지금 에쿠르 신전의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다네.

서론이 길었네. 자네, 이 서판을 받는 즉시 곧 니푸르로 가주게.

물론 자네는 놀랄 것이네. 니푸르에도 곧 적군이 들이칠 텐데 그 위험한 곳엔 왜 가라느냐고? 걱정 마시게. 이번만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네.

자네도 기억할 것이네. 아카드의 사르곤 대왕, 그는 세계를 지배했고 가장 화려한 수도를 세웠고, 그 수도 아가데를 세계의 문화중심지로 만들었다는 왕… 한데 그 지배 기간이 고작 40년이었지 않았는가. 또 사르곤의 손자는 어떻게 죽었는가. 목에 올가미가 씌워진 채 죽을 때까지 맨몸으로 말에 끌려갔다지 않았던가.

한데 그들이 왜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가? 그 손자, 나람 왕이 니푸르를 파괴했기 때문이지 않았는가? 신성한 '평화의 문'을 부수고 엔릴 신의 처소, 에쿠르를 마치 청금석이 채광된 산처럼 갈기갈기 찢었던 때문이지 않은가?

그리고 아카드는 어떻게 되었는가? 곧 멸망하고 말았지 않나? 그 이유는 우리의 신들께서 용서하지 않으신 때문이라네. 그랬지, 신들께서는 그들을 벌하시고 또 저주까지 하셨지.

'너희가 최고의 도시라고 뽐내던 아가데를 영원히 폐허로 만들겠노라!'고.

그래서 그 도시는 곧 폐허가 되어버렸지. 인적도 끊기고 모래바람만 쌓여 유목민이나 대상들조차도 피해 가는 그 곳, 누가 그런 곳을 한때 세상에서 가장 화려했던 도시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또 그런 도시가 어떻게 갑자기 폐허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네. 우리의 신들께서는 성지 니푸르의 파괴만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시고 이제는 그 사실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네.

젊은 시절 내가 수행여행 삼아 페니키아에 갔을 때도 그곳 사람들까지 니푸르 신전의 위력을 기억하고 있었네. 페니키아도 한때는 아카드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 것이네. 한데 그들이 말했다네. 아카드가 니푸르의 신전들만 허물지 않았어도 그 거대 국가가 그렇게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이제 니푸르를 치는 것은 삼이웃에도 금기가 되었다는 사실이네. 지금 우리를 침략한 이 야만인들도 시리아 쪽에서 왔다니 아마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네.

이제 안심하고 니푸르로 가주게. 자네도 어차피 이 도시를 벗어나야 할 처지라면 그 성지가 타국보다는 훨씬 안전할 걸세.

어서 떠나주게. 생각할 시간이 없네. 하루라도 더 머뭇거리면 자네는 자네의 목숨을 적들의 손에 넘겨주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 걸세.

서둘러 주게. 이곳 일이 끝나는 대로 나도 곧 뒤따라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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