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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천 유물관에 전시돼있는 월하스님 흉상
ⓒ 정일응
대한불교 조계종 9대 종정을 지낸 통도사 영축총림방장 월하스님은 40년 가까이 통도사 산문을 지키며 수행에 정진해온 한국불교계의 큰 어른이다.

스님은 조선말 통도사에 주석했던 성해스님의 제자 구하(1872~1965)스님의 법을 이었다.충남 부여 출신으로 서당을 다니다 보통학교 6년을 졸업하고 1932년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했다.

스님은 당대의 거승 구하 스님을 만나 1940년 통도사에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50년대부터 종단 일에 매진한 스님은 ▷1955년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1956년 통도사 주지 ▷1958년 조계종 총무부장 권한대행 ▷1958년 조계종 감찰원장 ▷1960년 중앙종회 의장직을 수행했다.

1970년부터는 통도사 조실로 통도사에 주석하다 1980년 종정 직무대행 등을 역임했다. 1984년에는 영축총림 방장으로 추대됐다. 1994년에 서암스님에 이어 조계종 제9대 종정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종정으로 재직중인 98년 11월 종단분규에 휘말려 원로회의의 불신임을 받고 종정에서 물러나며 방장지위도 박탈당했다.

2001년 방장으로 재추대 됐고 이때 "분규의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며 종단 화합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그러던 그해 5월 폐렴으로 입원하면서 건강히 급격히 나빠졌다.

▲ 스님의 영전에 국화꽃을 장식하고 있는 불자들
ⓒ 정일응
통도사 정변전에 주석하고 있던 스님은 언제나 문을 열어놓고 방문자들을 맞았고, 손수 자신의 빨래까지 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 왔다.

특히 ‘일일불작 일일불식’(일을 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의 정신을 독특한 선풍으로 확립해 방청소와 빨래를 직접하는 등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에 시자를 부리는 일이 없이 수행의 모범을 보여왔다.

스님은 또 "부처님도 도둑을 제도하려면 같이 도둑질하면서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을 깨우쳐 주라"고 가르쳤다. 스님은 승·속 구분없는 대중교화의 마음을 자신의 문집 <노천묵집>에서도 묻어나고 있다.

해마다 다르게 육신이 무거운지 모습을 달리하던 스님은 최근까지 바깥 출입을 금하고 대중들과의 만남도 차단한채 정진하다 입적했다.스님의 제자로는 입적한 전 주지 홍법스님, 현주지 현문스님 등이 있다.

▲ 통도사 노천 유물관에 월하스님이 평소 사용하던 유품들이 전시돼있다
ⓒ 정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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