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나이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 오해들을 풀어가야 할 텐데 어떻게 시작해야 적절할 것인가. '활 쏘는 것은 직접 보셨소이까?' 그건 너무 직접적이다. 그래, 그러면… 마침내 사나이가 말머리를 풀었다.
"아까 청년이 활을 잘 쏜다고 하셨는데…."
사나이의 질문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태왕이 앞질러 대답했다.
"그야 만백성이 다 아는 일이지요. 이 청년이 선인이 된 것은 열세 살 때인데, 그때 아주 큰 곰을 잡았다오."
태왕은 어찌하여 자꾸만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가. 정말로 큰 곰을 잡자면 그 얼굴에 담력이 있어야 한다. 한데 저 얼굴 어디에 그런 것이 있단 말인가? 새 눈물만큼도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그저 곱상하게만 생긴 얼굴, 안방으로만 도는 비리비리한 도련님 형안이지 않은가.
사나이는 문득 태왕이 의심스러워졌다. 자기가 간언한 이야기를 아주 가볍게 받아들였거나 혹은 아무 청년이나 내주어 자기 부탁을 무마하려는 속셈인지도 모른다 싶기도 했다. 그때 태왕이 다시 덧붙였다.
"이 청년은 어릴 때부터 사냥을 했소. 제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말이오."
지금 청년의 부친은 재상이지만 2년 전까지만 해도 잠사(蠶師)였다. 그 직책당시 부친은 더 많은 누에고치를 얻기 위해 자주 산행을 했다.
"폐하, 청년의 부친이 뭘 하는 사람인데 자주 산행을 하는지요?"
"오랫동안 잠사 직을 지냈소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말이오."
소호국은 일찍부터 천혜의 자원인 멧누에고치를 이용해 방사와 방포를 개발해왔다. 멧누에는 굴참나무 잎을 먹고 번식하는데 보통 어른의 중지손가락보다 길었고 그놈이 번데기가 될 때는 꼭 굴참나무에 올라 고치를 틀었다.
부친은 굴참나무 숲이 있다면 그 거리가 얼마이든 찾아 나서곤 했다. 답사가 끝나고 채취가 결정되면 그때부터는 또 소년을 데리고 다녔다. 사냥수련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중인들이 고치를 따는 사이 부친은 소년을 숲 속으로 이끌고 들어가서 짐승을 기다리는 법, 소리를 죽여 걷는 법, 활을 쏠 때의 거리 조정 등을 가르쳤다. 곰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현장에서 배운 아버지의 수련법 덕이었다.
"그럼 칼도 잘 쓰는지요?"
다시 사나이가 물었다.
"아닙니다. 큰 칼은 쓸 줄 모릅니다."
이번엔 청년이 먼저 대답을 했다. 그러자 태왕이 놀랐다. 결코 어른의 말을 가로챌 성품이 아니었던 때문이었다. 태왕은 비로소 청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얼굴에는 그 어떤 기색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둘러 대답했다는 것은 손님의 태도에 벌써 마음이 상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에인아, 이번 일엔 반드시 네가 가야 한다.'
태왕은 안타까워서 혼자 속말을 쳤다. 청년은 아우의 장자이지만 장차 한 나라를 떠맡을 인물이었다. 그는 그런 운명을 타고났다. 그 운을 지키자면 반드시 외방을 돌아야 한다고 했고, 또한 먼저 바깥세상을 탐험하고 경험을 쌓아야만 자기 자리를 튼튼한 반석으로 유지해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태왕이 입을 열었다.
"이 청년은… 우리에게 아주 상서로운 전조를 가져오기도 했다오."
태왕은 사실 먼저 그런 얘기까지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제후가 청년을 앝잡아 보고 있어 어서 빨리 실체를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야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이나 오해를 종식시킬 수 있었다. 제후가 물어왔다.
"상서로운 전조라면 무엇인지요?"
태왕은 잠깐 주춤거려졌다. 꼭 그런 얘기까지 해야 할까? 이역만리에 떨어진 조그만 제후국 사람에게까지…. 그러나 에인을 위해서는 말해야 한다. 더욱이 에인은 반드시 외방 운을 타야 할 아이다. 게다가 오늘 아침 저희들끼리 벌써 만났다지 않은가. 그것도 이 아이 운의 전조이다. 태왕은 마음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이 청년은 신조 봉을 보았소."
그리고 태왕은 뒤이어 청년에게 물었다.
"그때가 몇 살 때였더냐?"
"열두 살 때이옵니다."
부친이 단혈산에 갔을 때 소년도 따라갔다. 그때는 중인들의 자식들도 몇 명 함께였다. 어른들이 굴참나무 숲으로 들어간 사이 아이들은 따로 떨어져서 사냥놀이를 했다. 그 산에는 사슴이나 노루, 산닭도 많았다. 아이들이 토끼를 발견하고도 좋아라고 달려가곤 했지만 에인은 좀더 큰놈을 잡고 싶었다.
그날 그가 기대한 것은 호랑이나 곰만큼 큰 짐승이 아닌 그저 늑대였다. 물론 큰 짐승은 자기 힘으로 잡을 수도 없을뿐더러 잡아봐야 가죽만 얻지만 늑대는 길만 잘들이면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특히 털이 누렇고 다리가 긴 놈은 일단 친하면 사냥 몰이에 충성을 다해준다고도 했다.
그가 올가미를 놓고 늑대를 기다릴 때였다. 어디선가 이상한 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소리도 맑고 투명한데다 음조 또한 한 가지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활대조차 놓고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가 보았다.
한참 숲을 헤쳐 나가자 아름드리 오동나무가 서 있었고 거기에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의 키보다 컸고 날개는 다섯 색깔로 아롱져 있었다.
'세상에는 별 희한한 새도 다 있구나!'
그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새가 다시 울었다. 그것은 울음이 아닌 신비한 노래였다. 그 노래가 따뜻한 꿀물처럼 온몸을 적시는가 했더니 그 음조가 자기를 태우고 꽃구름 위로 두둥실 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때 등 위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조 봉이다!'
어른들도 그 울음소리에 이끌려 거기까지 내려온 모양이었다.
'무엇을 하느냐, 어서 엎드려 절을 올려라!'
아버지와 어른들이 모두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러나 소년은 절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봉이 하늘로 날아오른 때문이었다. 그는 그 신비한 새를 그냥 놓치고 싶지 않았고, 가면 어디로 가는지 그 지점을 봐둬야 할 것 같아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