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3

국중대회는 언제나 정월에 열렸다. 연 닷새 동안 계속되는 이 행사는 천신과 천자, 백성이 다 함께하는 축제 중 축제로 연중 가장 큰 행사였다. 첫날 제천의례가 끝나면 곧 형옥을 판단하고 죄수를 해결하는 법률이 집행되었고 그 결과를 천신에게도 알리는 금석문으로 옮긴 후 신단에 올리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그 다음 날이 조의선인 선발대회였다. 조의선인은 특기가 문·무로 나눠지지만 궁술이나 기본적인 무술은 문과인도 겸비해야만 했고 첫 번째 시험은 문과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는 스승이 아닌 신치(문광부 장관급)나 태대신, 즉 중신들이 나서서 문답으로 후보자의 실력을 시험했고 선발이냐, 탈락이냐의 결과 점수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채택된 질문에 얼마나 정확한 답을 했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 까닭은 일단 선인이 되면 전국을 돌며 고사를 강론해야 했던 때문이었다.

문과시험이 끝나면 곧 무과로 넘어갔다. 이때부터 무술이나 칼춤이 등장하고 씨름이나 태껸 시합도 있었는데 특히 백성들이 즐기는 것은 씨름이었다.

사흘째 날부터 청년선인들의 선발대회였다. 참가자는 10세에서 16세까지며, 소년들은 그간 갈고 닦거나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던 기량을 그때 맘껏 발휘했다. 깨끔 질과 얼음을 깨고 물속에 들어가 오래 견디는 인내시험, 또 물싸움 등이 있었다.

작년에는 13세 소년이 온 몸이 퍼렇게 얼도록 물속에서 견디어 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실 그 소년은 구경하던 어른들이 애가 닳아 어서 나오라고 소리쳤을 때야 엉기엉기 기듯이 물에서 나왔고 그런 아이들은 대개 사냥이나 무술보다는 씨름이나 운동에 강했다.

청년선인들의 기본행사가 끝나고 나면 그들은 조의선인들과 함께 사냥을 나갔다.
장정들이야 곰이나, 큰 사슴, 돼지와 순록까지 잡아들이지만 소년들은 잘해야 중간치 곰이나 노루, 여우 등이었다. 이 때에 우열은, 잡은 짐승 수로 가려지는데 그 모든 짐승은 먼저 신단에 바쳐진 이후 백성들에게 나누어졌다.

이 기간 동안 모든 백성들이 먹고 마실 수 있는 술과 음식은 왕실에서 내놓았다. 백성들은 닷새 간 나라의 음식과 술을 맘껏 먹고 즐기다가 마지막 날엔 선발된 청, 조 선인들을 앞세워 신단과 성 앞을 빙빙 돌며 애환가(愛桓歌)를 부르는 것으로 축제를 마감했다.

말하자면, 에인이 바라는 것은 이러한 거국행사였다. 그것이 또 그에게 합당한 처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적어도 넉 달을 기다려야 했다.

태왕은 하루 밤 내내 생각을 거듭했으나 마땅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제후를 그냥 돌려보내는 것이었지만 사실 그럴 수도 없었다.

'딛을 문'은 가장 원거리에 떨어져 있음에도 아주 중요한 제후국이자 호시(互市= 국제무역)로도 없어서는 안될 거점지역이었다. 소호의 모든 물품들이 동서의 문물 교통지인 국제시장 대월씨국(사마르칸트)에서 인기가 있다지만 담비모피와 도기는 그 색택(회색무문)이 고상하고 우아하다 하여 메디아(이란) 군주들까지 금을 주면서 바꿔간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수만리 길을 오고가는 대상들에게도 긴 여독을 푸는 휴양지로서 더할 수 없는 기착지였다. 그러니까 그 일에 적극 나서야 할 이유는 아흔 아홉 가지라 해도 대응할 수단은 한 가지도 없는 셈이었다. 태왕은 다시 역법사를 떠올렸다. 그것이 마지막 방법이기도 했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태왕은 조반을 끝내자마자 곧 어전으로 들어 궁차지를 불렀다.
"어서 가서 역법사를 불러오라."
만약 역법사도 방도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이번 일은 없었던 것으로 되돌릴 수밖에 없다. 제후에겐 안 된 일이지만 운이 그것밖에 안된다면 그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역법사가 도착했다. 그는 주렴을 걷고 들어오자마자 먼저 절부터 올렸다. 그가 절을 끝내기도 전에 태왕이 말했다.
"어서 이리 가까이 오시오."
역법사가 다가와 앉자 태왕은 자기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역법사는 태왕의 이야기를 신중히 들은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먼저 상대분의 괘부터 살펴본 뒤 방도를 찾음이 옳을 듯하옵니다."
"문제는 에인에게 있는데 그 사람의 괘는 왜 필요하오?"
"만약 그분에게 엉뚱한 운이 있다면 설령 에인 선인을 내줄 수 있다 해도 덕보다는 실이 클 수도 있사옵니다."
역시 명인이라 싶으면서도 태왕은 다시 물어보았다.

"반대로 제후의 괘가 좋다면?"
"그렇다면 만사 제쳐놓고 보낼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건 또 왜 그러오?"
"운이 맞아떨어지는데도, 그러니까 서로 결합할 운인데도 그 운을 내치게 된다면 뒤이어 해가 돌아올 수도 있다는 뜻이옵니다."
"좀더 상세히 일러주시오. 그렇다면 이번 일이 내가 방법을 찾건 말았건 이미 득실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오?"

"예, 에인 선인에게도 이미 외방 운이 들었다는 뜻이옵니다."
"흠, 그래요? 한데 왜 이렇게 길이 꽉꽉 막히는 것이오?"
"정말 막힌 운인지, 아니면 길이 있는지는 우선…."
"그러니까 우선 제후의 괘부터 풀어보면 알 수 있다는 뜻이로군."
"그러하옵니다."
"그럼 어서 풀어보시오."

역법 사는 차지를 불러 제후의 출생을 물어오게 했다. 별채로 달려간 차지도 금방 돌아왔다. 태왕이 물었다.
"그래, 제후께서는 아직도 주무시던가?"
"아니옵니다. 궁인들과 함께 마당에 계셨습니다."
"궁인들과 함께?"
"그 희한한 짐승 때문이지요. 그놈은 먹을 때도 아주 시끄럽게 콧방귀를 털털 뀌어 대서 사람들이 웃느라 자리를 뜨지 못하옵니다."
"허허, 그럼 제후께서도 벌써 아침 식사를 했다는 말이군."
"예, 그러하옵니다."

그리고 차지는 역법사에게 제후의 출생을 일러준 뒤 물러갔다. 역법 사는 자기가 가져온 보자기에서 금석판과 석필을 꺼내더니 그 위에다 괘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태왕은 문득 궁금했다. 그 제후는 과연 어떤 운을 타고 났기에 제후가 된지 10년도 되지도 않아 그 영토를 빼앗긴 것일까. 그에게 과연 제후의 운이 있기는 한 것일까. 마침내 역법사가 괘 풀이를 끝냈다.
"이분에게는 진괘가 강하옵니다."
"진괘라면?"
"정의심이 강해서 옳다고 생각한 일에는 목숨을 다하는 괘이옵니다."

태왕은 '그에게 군주로서의 운은 어떠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 그것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먼저 '정의심이 강하다'는 괘가 나왔다면 그것만으로도 에인에게 나쁘게 작용할 사람이 아니란 뜻이다. 설령 에인이 공을 세운다 해도 그 공을 가로채기 위해 에인을 해칠 위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싶어 태왕이 또 물어보았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