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추가파병 결정은 여러 가지로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참여정부'를 자처하고 있는 노무현 정부의 추가파병 결정 과정을 보면, 민주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인 '주권재민(主權在民)'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추가 파병을 요청 받은 직후 "국민 여론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했었다.
그러나 이라크의 유혈사태가 나날이 악화되고 추가파병의 정당성이나 이른바 '국익론'이 설득력을 얻지 못하면서, 각종 여론 조사 결과 국민들의 50-60%가 추가파병에 반대하는 결과가 나오자, 노무현 정부가 최우선적으로 고려하겠다던 '국민 여론'은 더 이상의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쟁취한 지 16년만에, 그리고 문민정부가 탄생한지 10년만에 민주주의의 위기가 도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반수가 넘는 국민 여론이 민주정부에서도, 국민의 대의기구인 국회에서도 무시당하는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의 근본 정신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정부가 확정한 추가파병안을 보면, 국회 이송에 앞서 가장 기본적으로 담겨져야 할 내용조차도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사실상 국회가 추가파병 동의안을 통과시켜주면, 구체적인 내용은 정부가 미국과 협의해 결정할테니, '백지수표'를 달라는 것과 다름아니라는 점에서 국회의 반응이 주목된다.
조영길 국방장관과 라종일 안보보좌관의 기자회견 내용을 보면, 국민과 국회가 파병동의안의 지지 여부를 판단하기에 필요한 내용들이 누락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파병시 주둔지역, 파병시기, 전투병의 비율, 이라크 현지에서의 활동 등이 포함된다. 특히 이러한 중대한 내용과 관련해서 정부는 대규모의 전투병 파병을 주장해온 국방부에 일임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어 더욱 큰 우려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우선 한국군의 주둔지역과 관련해 정부는 미국과 협의해 이라크 북부인 키르쿠크와 탈 아파르, 카야라와 서희·제마부대가 활동 중인 남부에 있는 나시리야 가운데 1곳을 정해 독자적으로 작전을 펼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는 한마디로 본말이 전도된 정책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정책결정이라면 한국군의 안전문제와 직결된 주둔지역을 결정하고 그 곳에서 안전하게 재건활동이 가능한지 치밀한 현지조사를 거친 이후에, 이에 대해 국회의 판단을 묻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국회가 일단 동의해주면 미국과 협의해 결정하겠다는 '전도된 정책결정'을 강행하고 있는 것이다.
추가파병시 전투병 비율 및 현지에서의 정확한 임무 역시 제시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조영길 장관은 이와 관련해 "파병부대는 자급적인 군수지원과 행정을 지원할 수 있는 직할부대, 이미 파견돼 재건과 의료지원을 하는 서희·제마 부대, 대민작전을 수행할 민사부대 등 원칙을 갖고 있으나 세부적인 편성은 더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파병 부대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핵심적인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부대 편성 비율과 관련해 "구성 비율을 정확하게 확정할 수 없다"면서, "편성 과정에서 유동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부대 편성 비율은 국방부에게 맡기겠다고 말한 점과 국방부가 대규모의 전투병 파병을 선호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추가파병 부대의 상당수는 전투병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실제로 조장관의 설명한 내용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추가파병 부대에서 실질적으로 이라크의 재건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의료·공병대대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군수 및 행정지원 직할부대, 대민작전을 수행하는 민사부대, 자체경비부대 등을 중심으로 부대 편성을 하겠다고 밝히고 있는 반면에, 서희·제마부대 이외의 추가적인 의료·공병대대 파병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파병 부대의 편성을 추측해보면, 대규모의 전투병이 주류를 이루면서 재건 및 의료활동에 참여하는 부대는 서희·제마부대로 한정되거나, 수백명 단위의 소수의 의료·공병병력을 추가하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이는 이라크의 재건지원을 위해 '추가로' 파병한다면서, 재건활동을 할 수 있는 병력은 그대로이거나 약간 늘어나는 수준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정부가 이러한 전망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파병동의안에 부대편성 내용을 포함시켜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국회가 동의해주면, 국방부가 미국과 협의해서 결정할 것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어 정책결정과정의 절차적 정당성을 스스로 훼손하고 있다.
한국 '작은 점령국' 되나
국회의 심의 및 표결시 또 하나의 중요한 판단 기준인 파병부대의 역할과 관련해서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주둔지역의 치안유지와 관련해 정부는 한국군이 이라크 행정기관과 경찰 및 군대를 통제해 치안을 유지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조영길 장관은 "충분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그런 원칙하에(이라크 군경에게 치안을 맡긴다는 뜻임) 파병부대 임무를 설정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상황에 따라 파병된 한국군의 임무가 치안유지로 확대될 수도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또한 이라크 군경이 과연 한국군이 주둔한 지역의 치안을 담당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차영구 국방부 정책실장은 "총 17만명을 목표로 내년 말까지 육성하고 있다. 현재 10만명 수준이다"며, "일정지역을 맡으면 현지 경찰이나 군을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국방부와 미국의 '희망사항'이다. 현재 명목상으로는 이라크 군경이 10만명에 달한다고 하지만, 월급이 적고 이라크 저항세력의 공격 표적이 되면서 이라크 군경 사이에서 '이탈자'들이 급증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미국 주도로 창설된 첫 이라크군 대대 병력 700명 가운데 300명 정도가 중도퇴직함에 따라 이라크군 창설이 큰 차질을 빚고 있다는 미군 사령부의 발표는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더구나 한국군이 "주둔지역의 행정기관과 경찰 및 군대를 통제하겠다"는 것은 점령군을 자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미국의 요청으로 파병된 외국군을 점령군으로 보는 이라크인의 시각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군이 주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주둔지역의 공권력을 통제하겠다는 발상을 갖고 얼마나 이라크인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참여정부'가 절차적 정당성마저 훼손하면서 추가파병 동의안을 확정한 이상,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가게 됐다. 과반수가 넘는 국민 여론이 정부에게 외면당하고, 국회 역시 이를 반영할 정당이 없는 상태에서 국회가 파병동의안을 부결시킬 것으로 기대한다는 것이 공허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정부의 파병동의안은 국회로 하여금 지지·반대 여부를 판단하게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내용들조차 결여된 '백지수표를 달라'는 것과 다름없다.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정부와 여당이 '구체적인' 파병동의안을 제출하면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이번에 정부가 확정한 파병동의안은 "3천명 이내 독자적 지역담당 혼성부대"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구체적인 내용도 담지 못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지금까지 해온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정신적 여당'을 자처하고 있는 열린 우리당은 이미 '전투병 파병 반대, 비전투병 파병 찬성'을 당론으로 정한 바 있다. 그러나 정부의 파병동의안은 사실상의 대규모 전투병 파병안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열린 우리당의 당론과는 반대되는 내용이다. '반전평화'를 핵심적인 창당 목적으로 내세운 열린 우리당이 중대한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민주당은 내부의 이견으로 당론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열린 우리당과의 선명성 경쟁을 벌이고 있는 민주당으로서는 이번 정부의 부실한 파병동의안에 확고한 입장을 밝힘으로써, 차별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된 셈이다.
국회가 과반수가 넘는 국민여론을 대변해 정부의 파병동의안을 원점으로 되돌려 진정한 국민의 대의기구로 거듭날 것인지, 아니면 부시 행정부와 '작은 점령국'을 자처하는 노무현 정부의 거수기로 전락할 것인지, 국민들은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