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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999년 연말에 당신은 무엇을 준비하며 새로운 천 년을 맞으셨습니까? 그 해의 화두는 밀레니엄 버그였습니다. 새로운 천 년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기대와 불안은 소문과 추측 속에서 여느 해와는 다른 준비를 서두르게 하였습니다.

우리집 아래 층에 살던 세종이 엄마는 생수와 부탄가스와 동전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전직이 은행원이었던 그녀는 밀레니엄 버그가 반전시에 해당하는 일대 사건이 될 것이라며 그때그때 동전으로 알맞은 지출을 하기 위하여 동전을 많이 바꾸어다 놓았다고 했습니다. 바꾼 동전의 양이 은행에서 쓰는 동전 자루로 가득한 것을 보고 절로 웃음이 나오면서 '뭐 그렇게까지야 큰 일이 있으려고…'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준비한 품목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이불과 요를 더 준비했어요. 혹시 도시가스가 끊기면 추울까봐서지요. 안 그래도 감기에 자주 걸리는 아이들인데 추우면 안 되잖아요. 그리고 부탄가스 1줄, 생수 3병 이게 다예요."

내 말을 듣고 세종이 엄마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부탄가스와 생수를 더 준비해야 한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이럴 때 성격이 나타나는가 봅니다. 대충대충 긍정적인 생각으로 별로 걱정을 많이 안 하고 사는 나에게는 아래층 세종이 엄마의 철통 같은 준비가 어찌나 희극적으로 보였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웃음이 납니다.

방송에선 연일 밀레니엄 버그가 가져올 가상 시나리오가 전개되고 있었고 라면과 부탄가스와 생수가 그 해 연말의 인기 품목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친정과 시댁으로 전화를 하니 느긋하게 뭐 별 일이야 있겠느냐고 태평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방송이나 신문도 안 읽어봤느냐고 물으니 난리가 날 것 같으면 얼른 시골로 내려오라 하면서 부모님들이 하하 웃으셨습니다. 부모님들은 도시가스도 쓰지 않는 데다, 여차하면 흐르는 물이 있으니 그 물 먹고 살아도 된다며 걱정 하나 없는 편안한 목소리였습니다.

도시에서 접하는 소식들은 한결같이 마음을 서두르게 합니다. 편리에 길들이며 살아가는 자동화 시스템들이 작동하지 않음으로써 야기되는 문제는 이만저만 큰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밀레니엄 버그 시나리오가 3년이라는 시간을 무사히 넘기며 또 한 해를 맞는 정점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계절에는 마음이 아려옵니다. 준비하지 못하고 맞은 한 해를 그저 그렇게 흘려 보내고 또 한 해를 맞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바탕 소동으로 끝나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는 마음가짐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0년은 시작과 동시에 무언가 대단한 일이 터질 거라는 기대와 우려와 지구의 종말까지 생각했던 그 완전한 밀레니엄의 환상 속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환상 속에서 빠져 나와 설렘도 걱정도 없이 무덤덤하게 새해를 맞는다고 생각하니 회한에 빠지게 됩니다.

2004년, 나이 한 살을 더 먹고 마음과 몸이 다같이 조금씩 노쇠해지는 거라고 한숨을 쉬다가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화들짝 놀랍니다. 나에게 딸린 아이들의 미래가 함께 가자고 맑은 목소리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희망을 품어야 한다고 까치집이 나무 꼭대기에서 우리 집을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밀레니엄 버그 때문에 산 아이들의 이불과 요가 이제는 아이들에게 작아졌습니다. 그때 한꺼번에 많은 양의 부탄가스와 생수를 사들인 아래층 세종이네는 그 많은 양의 부탄가스를 다 쓰지 못하고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세종이네 집으로 오랜만에 전화를 해야겠습니다. 밀레니엄의 '천사'를 맞이하라는 덕담과 함께 행복한 새해 인사를 나누려고 합니다. 갑신년 새해가 밝아오기 전에 '작심삼일'이 될지언정 계획과 뜻이 있는 근사한 다짐 하나 마음에 걸어두는 준비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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