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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상
시인 이상
1937년 일본 동경의 한 병원. 해사한 얼굴의 키 크고 잘 생긴 조선 사내 하나가 "멜론 향기가 맡고 싶소"라는 기이한 유언을 남기고 27년 지상에서의 삶을 마친다. 사인은 각혈을 거듭했던 폐결핵.

친구 하나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의 얼굴을 데드마스크로 남긴다. 굳은 석고에 묻어있는 몇 점의 턱수염이 쓸쓸했다. '오감도' 연작시와 단편 '날개'로 1930년대 조선문단 최고 문제아의 자리에 우뚝 섰던 이상(본명 김해경)은 그렇게 죽음을 맞았다.

당시 본국에서 시왕(詩王)으로 군림하던 '까페 프랑스'의 정지용도, 시집 <기상도(氣象圖)>를 내며 조선과 일본에서 동시에 주목받던 보성고보(普成高普) 동창생 김기림도 그의 죽음을 통곡했다. 보편적 인식구조로는 도저히 해석 불가능한 난해한 언어로 남루한 지상에서 위대한 천상을 꿈꾼 천재의 짧았기에 더 뜨거웠던 생애.

<시여 날아가라>와 <만인보>의 작가 시인 고은이 그 특유의 절절한 문장과 휘황한 문체로 1974년 써내 화제를 모은 바 있는 <이상 평전>이 30년만에 향연출판사에 의해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책에는 앞서 언급한 한 불우했던 천재의 기행과 구구절절한 절망의 기록이 안타까운 비명처럼 그려졌다.

가난한 무식자였던 아버지에 대한 부정과 백부(伯父)의 과도한 애정에 대한 반발, 여기에 더해 자기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부정으로 점철됐던 이상의 27년 인생은 이미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틱한 시에 가깝다. 바로 그 시 같은 삶을 들여다본 고은의 시를 닮은 산문 문장으로 <이상 평전>은 완성됐다.

책은 시인 특유의 직관과 주변 인물의 취재를 통해 이상의 내면과 외면을 숨가쁘게 오간다. 7살 무렵에 <논어>를 술술 읽어내던 영민한 아이였으며, 목단 열끗의 화투장을 그대로 모사(模寫)하고는 "나는 화가가 될 거야"라고 수줍게 웃던 하얀 얼굴의 소년. 그는 어떤 경로를 통해 시와 만나고, 무슨 이유로 세상에 절망했으며, 무엇 때문에 울고 웃었을까?

종교에 가까운 숭배와 싸늘한 지탄을 한 몸에 받으며 사후에도 70년 가까이 한국문단의 '문제적 인물'로 남아있는 이상. 그런 이유로 이상의 연대기와 시를 살피는 것은 고통인 동시에 환희다.

ⓒ 향연
김기진과 박영희의 뒤를 잇는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소장파의 맹장 임화. 이상과 보성고보 동창이었던 그가 학창시절 인근 숙명여고보 여학생들에게 '연애대장'으로 놀림을 받았다는 사실과 '오감도(烏瞰圖)'를 조선중앙일보 지면에 연재하도록 주선했던 이태준이 독자들에게 "조감도(鳥瞰圖)와 오감도도 구별 못하는 놈에게 시를 쓰게 만드냐"라고 지탄받았다는 일화 등은 <이상 평전>의 재미있는 덤.

일본인 매춘부 기누코와 배천온천에서 만난 금홍, 변동림과 권순희 등 수많은 여성 사이를 오가는 것도 모자라, 한 방에서 기생 몇과 돌아가며 교접하는 언필칭 '꾀꼬리 동산'이라는 유사 스와핑의 형태까지 보인 이상. 끊임없이 피를 토해내는 각혈의 고통 속에서 그에게 여성은 무엇이었고, 퇴폐시는 무엇이었으며, 또 삶과 죽음이란 뭐였을까?

고은은 말한다. "이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건이었다." <이상 평전>은 위의 물음에 대한 답과 동시에 '사건'으로 살고자 했던 한 기이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력적인 텍스트다.

이상 평전

고은 지음, 향연(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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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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