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전직 대통령을 가장 많이 두고 있는 보기 드문 나라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헌정을 이끈 8명의 전직 대통령 가운데 이승만(1∼3대)·윤보선(4대)·박정희(5∼9대) 대통령 세 분이 작고했고, 10대 대통령 최규하부터 15대 대통령 김대중까지 다섯 분이 건재한다. 5년 단임 대통령제를 채택한 '덕분'이다. 이는 결과만을 놓고 보면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이 '단임'을 실천한 '덕택'이다.
그래서 현직 대통령이 해가 바뀔 때마다 전직 대통령의 문후(問候)를 여쭙는 신년하례 때면 청와대 수석비서관 중에서도 특히 정무수석이 가장 바쁘기 마련이다.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일 '엽기수석'으로 통하는 유인태 정무수석을 전임 대통령들에게 보내 관례대로 '대통령 난(蘭)'을 전하고 새해 인사를 했다.
엽기수석 "모두 강북에 거주해 다행"
신임 윤후덕 정무비서관을 대동하고 난 심부름을 처음 다녀온 '엽기수석'의 소감은 "전직 대통령들은 전부 서울 강북에 살고 계셔서 다행이다"는 거였다. 엄밀히 따지면 14대 대통령 김영삼은 강남(상도동)에 살지만, 상도동을 강북이라고 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아무튼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과 제13대 대통령 노태우가 사이 좋게 연희동에 살고 있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최규하 대통령의 사저가 각각 동교동과 서교동에 있어 전직 대통령 5명이 반경 수 ㎞ 안에 다들 모여 사는 셈이다. 물론 이렇게 '이웃사촌'처럼 서로 가깝게 붙어 있다고 해서 서로 교분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견원지간(犬猿之間)처럼 으르릉대거나 마지못해 소 닭 보듯 하는 경우가 더 실제에 가깝다.
올해도 5명의 전직 대통령은 '대통령 난'을 전달한 정무수석을 통해 덕담을 나누고 현직 대통령과도 간접 대화를 했다.
우선 난을 받은 최규하 전 대통령은 "대통령께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라고 인사하고 "찾아뵙기도 해야 하는데 건강 때문에 그러질 못한다"고 노 대통령에게 양해를 구했다. 새해로 85세를 맞은 최 전 대통령은 세배객들에게도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면서 "모든 일이 잘 풀리길 바란다"고 주로 건강을 주제로 덕담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태우 전 대통령 또한 "대통령 내외분 건강하시지요"라고 인사하고 "나라가 잘 되기를 바란다"고 짤막하게 덕담을 나누었다. 노 전 대통령은 한편 새배 온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에게는 대선자금 문제와 관련 "정치자금은 여야를 막론하고 법대로 쓰기가 힘들다"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착복한 것은 없었을 것"이라고 동병상련의 위로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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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퇴임 후에 보니까 남는 것은 경제밖에 없어요"
이에 비해 전두환 전 대통령은 매우 활동적인 면모를 과시했다. 전(全) 전 대통령은 "내외분 건강하시지요?"라고 묻고는 "국가를 융성하게 해주세요"라고 주문했다. 전 전 대통령은 특히 "경제에 초점을 맞추어 주세요"라면서 "퇴임 후에 보니까 남는 것은 경제밖에 없어요"라고 국정 운영의 '훈수'를 두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전 전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과의 악연에서부터 이공계 우대정책에 이르기까지 무려 30분 동안이나 '조언'과 '주문'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비해 다른 전직 대통령들과의 하례시간은 10분 내외였다.
유인태 수석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은 "주위에서 88올림픽 때까지는 (대통령을) 하라고 권유하고 내가 할 수도 있었지만 단임으로 (임기를) 끝냈다"면서 "내가 단임을 실천해 내 뒤에 4명의 대통령이 나온 것에 대해 후세의 사가들이 평가할 것"이라고 자부심을 피력했다.
그는 또 "집권 이후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등 재벌총수들을 청와대 상춘재에 불러 '재벌들이 이제는 부동산투기 그만하고 기술개발로 돈 벌 생각을 해라'고 권유했는데 이병철 회장이 그 길로 반도체 투자를 시작해 오늘날 한국경제의 든든한 성장동력이 되었다"고 비화(?)를 공개하면서 "이공계를 우대하라"고 조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이어 "내가 노무현 대통령과 별 인연이 없지만 (당시 노무현 의원이) 청문회에 출석해 (내게) 명패를 던진 것 때문에 알게 되었다"고 '악연'을 스스럼없이 소개하면서 "그 다음에도 청문회에 또 나오라고 했는데 야당 총재들이 그런 일(명패 던지기) 안 생기게 보장해주질 않아 그 핑계로 청문회에 안나가게 되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영신만복(迎新萬福)'을 새해 휘호로 정한 전 전 대통령은 최병렬 대표로부터 신년 인사를 받는 자리에서도 "이회창 전 총재가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감옥에 가겠다고 한 것은 잘 한 것"이라고 치하했다. 그리고 "다음은 최 대표가 풀어야 한다"면서 "필사즉필생의 각오로 당과 나라를 위해 몸을 던져 정국을 구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영삼 "내가 왜 정치9단이가, 11단이지!"
김영삼 전 대통령은 늘 그렇듯이 올해에도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휘호를 썼다. 그리고 "정도(正道)를 가면 문이 없어도 갈 수 있다는 뜻"이라며 "꾀를 내 소도(小道)로 가지 말고 대로(大路)로 당당히 가야 한다"는 풀이를 덧붙였다. 다음은 '엽기수석'과 그에 못지 않은 전직 대통령의 공식 대화록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새해 건강해요."
유인태 정무수석 "세배 드리겠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지난해는 참 어려웠어요…. 노 대통령한테 큰 시련이었고 국민 전체가 힘들었어요. 그렇게 됐어요. 유인태 수석은 어떠요?"
옆자리 인사 "제일 힘든 자리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정무수석이 제일 바쁘지, 제일 바쁜 수석이지."
그러나 비공식 대화록은 이와 다르다. 앞에서 인용한 옆자리 인사는 이원종 전 정무수석이다. 이원종 전 수석이 "원래 정무수석이 힘든 자리"라면서 "나도 '정치9단'이신 각하(김영삼) 모시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하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내가 왜 9단이가, 11단이지!"(언론에서 노 대통령을 '정치10단'이라고 표현한 것을 의식한 발언)라고 목소리를 높인 것으로 전해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특히 측근비리 의혹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노 대통령의 거취에 대해 "대통령은 법률 이전에 권위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인데 지금은 그게 전부 상실됐다"고 전제하고 "특검에서 심각한 측근비리가 더 나오면 하야로까지 가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노 대통령이 어떤 방법으로든 풀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신년 인사차 찾아온 최병렬 대표에게는 "시끄러울 때 잘 마무리 짓는 게 제일 좋은 것"이라며 "당무감사 문건 유출 사태를 잘 마무리 짓고 공천에 대비해야 한다"고 훈수를 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세배 온 상도동계 정치인들에게 여전히 '배드민턴 얘기'를 꺼내며 건강을 과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배드민턴 이야기는 자신이 동네에 아침운동을 나가면 지금도 동네 여자들이 서로들 배드민턴을 함께 치려고 한다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골 레퍼토리'를 말한다.
상도동에 세배를 다녀온 한 인사는 "요즘 YS의 최대 관심사는 국사가 아니라 아들 문제"라면서 "YS가 지난해 기도회를 핑계 삼아 거제에 자주 왕래하더니 요즘은 부친인 김홍조옹까지 손자를 국회의원 만들려고 거제에 상주하다시피 한다"고 근황을 전했다. YS의 둘째아들 현철씨는 아버지 고향인 거제에서 한나라당 공천으로 출마를 준비중이다.
김대중 "한국은 스스로 자신들의 가능성을 잠식시키고 있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유인태 수석을 맞이해 "대통령 내외분 건강하시지요?"라고 안부를 묻고 "(난을 보내주셔)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라면서 "새해에도 잘 하셔서 국민들을 편안하게 해주세요"라고 덕담을 건넸다.
이날 유 수석의 동교동 방문에는 김대중 정부 시절 초대 정무수석을 지낸 문희상 비서실장도 동행했으나 김 전 대통령 자택이 동계동계 의원 등 정치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뤄 오랜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고 유 수석이 전했다. 유 수석은 그러면서도 "조금만 더 있었으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우리당'이 잘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실 판이었는데 문 실장이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그 얘길 못듣고 나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자택에는 1일 1500여명의 세배객이 몰려 '정치인 DJ'의 영향력이 여전히 건재함을 새삼 보여줬다. DJ는 이날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전직 대통령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전제하고 주로 경제문제와 남북문제만을 거론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전직 청와대 비서관 70여명과 만난 자리에서는 참석자 가운데 일부로부터 "총선에 나갈 사람들과 사진 한장씩 찍어 달라"고 요청을 받기도 했다. 그러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진 찍으면 정치 개입하는 것이 된다"면서 "(그러니) 악수할 때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찍어라"라고 말해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DJ는 조순형 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와 김원기 공동의장 등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면담할 때도 60년대 민주당 시절 얘기와 90년대 초 여소야대 상황을 화제에 올리는 등 과거 이야기만 하고 민주당 분당 같은 정치현안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DJ는 "여소야대 때 우린 여당과 상의하며 도와줄 것은 도와주면서 국회 의결의 70∼80%가 투표 없이 갔다"면서 "우리는 다수의 힘을 남용 안 했지"라고 한나라당을 빗대어 말하기도 했다.
DJ는 또 자택 옆 김대중도서관에서 국민의 정부 전직 장·차관급 인사 200여명과 신년 인사를 하면서는 "최근 미국 월가에선 '한국은 스스로 자신들의 가능성을 잠식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며 국내 정치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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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찾은 최병렬 "백성은 우수한 데 정치를 잘못해서 걱정이다"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도 5일 어렵게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났다. 지난해 6월 최 대표 취임 이후 두 차례 면담을 시도한 끝에 처음으로 성사된 면담에서이다. 최 대표는 지난 1일 김영삼·노태우·전두환·최규하 전 대통령을 신년 인사차 방문한 바 있다.
최 대표는 이날 오후 동교동 자택 옆에 위치한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해 4층 집무실에서 김 전 대통령과 30분간 환담을 나눴다. 환담의 마지막 대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최병렬 대표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에서 오면 단단히 기합 좀 부탁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 "최 대표는 그런데서 이니셔티브 쥐고 있으니 열심히 해라."
최병렬 대표 "경제, 안보가 나라의 근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깜짝 놀란 것은 <실미도> 영화가 일주일만에 250만 동원했다고 한다. 그 분들이 참 고맙게 생각하더라."
최병렬 대표 "그것은 인정한다. 한국 영화가 점프한 것은 김 전 대통령 재임 당시다. 확 풀어놓으니 능력 있는 사람 많아 영화도 잘 만든다. 백성은 우수한 데 정치를 잘못해서 걱정이다."
권좌에서 물러난 지 15년이 넘게 단임 실천의 자부심을 갖고 있는 '철권 대통령'과, 퇴임한지 6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유아독존(唯我獨尊)에 빠져 있는 '철부지 대통령', 그리고 현직에 있을 때보다 퇴임한 뒤에 오히려 재평가받는 '철지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민은 다양한 대통령을 둬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