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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장은 서주희씨의 격정적인 신음소리로 가득채워졌다.
ⓒ 송영석
관례적으로 금기되었던 음지의 단어, 여성의 성기를 지칭한 순수 한국말이 연극무대에서 한 여자의 입을 통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모노드라마의 흥행가능성을 점치며 <2003년 서주희의 버자이너 모놀로그>로 국내 팬들에게 다가온 이번 연극은 제목부터 자칫 외설 시비에 휘말린 소지가 다분하다.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한국말로‘보지의 독백’정도의 뜻. 굳이 외국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국내정서의 한계를 실감케 한다.

그러나 작품은 외설하고는 거리가 멀다. 1인극 주인공인 서주희는 전혀 옷을 벗는다거나 ‘에로’비슷한 어떤 행위도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야하게 느껴진다면 여성의 성기를 지칭한 단어를 스스럼없이 내뱉는 그녀의 말 뿐.

작품은 미국의 극작가이자 시인, 사회운동가인 이브 엔슬러가 5살 어린 소녀에서 75세 노파까지, 아홉 명 여성들의 왜곡돼 왔던 성으로 인해 경험한 에피소드를 인터뷰 해 엮어낸 드라마형식이다.

‘왜곡된 여성성을 바로 잡는다’는 작품의 취지도 훌륭하지만 관객의 눈을 뜨겁게 달군 건 신들린 연기를 보여줬던‘서주희’라는 배우. 그녀는 무대에 올라 마치 토크쇼 진행을 하듯 편안하게 공연을 시작한다. 그러다 슬며시 관례적 금기어를 내뱉기도 하며 그것의 은어인‘냄비’,‘짬지’라는 말까지 관객의 침묵과 헛기침에도 불구하고 계속 금기어를 언급한다.

그러나 작은 어색함은 신선한 충격을 위한 시작일 뿐. 그녀가 보여준 다양한 인물의 모습은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웠다. 워낙 연기파 배우인 터라 성격연기에 발군의 재능을 발휘하는 서주희지만, 마치 무당이 신 내림을 받아 작두를 타는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와 몸짓은 서서히 다른 인물로 변해갔다.

좌중을 분개시킬 정도로 강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던 성적학대를 겪은 한 어린 소녀의 연기, 75세 노파로 변신해 말하는 질퍽질퍽한‘홍수(여성의 애액)’에피소드는 관객의 모든 감각을 무대위로 끌어당기는 마술을 부렸다.

단연 압권은 서주희가 구사해내는 다양한 신음소리. 목구멍에서 간헐적으로 기어 나오는 듯한 요염한 신음에서부터 절정의 오르가즘 순간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격정의 신음소리까지 공연장은 온통 그녀의 신음소리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녀의 야한(?) 모습은 어느 순간 온데간데없고 맑은 웃음과 잔잔한 감동을 느끼게 했다. 공연장 구석구석에 울려 퍼지는 서주희의 신음소리는 여성으로서 치러야 했던 억눌림의 해방으로 보였다. 결국 서주희의 신음소리는 여성의‘성기’가 더 이상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아니라 성스러운 결정체이고, 생명의 원천임을 일깨워주며 공연은 막을 내린다.

11가지 신음소리를 구사하는 광기 어린 서주희의 연기는 혀를 내두를 정도. 그러나 더욱 더 놀라운 것은 막이 내린 후 깊은 감동을 받은 듯 숙연해진 관객의 얼굴이었다.

덧붙이는 글 | 한의신문(1199호) 1월 8일자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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