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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산문, 치인리 십번지>
책 <산문, 치인리 십번지> ⓒ 열림원
흔히 스님이나 신부님처럼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세속에서 떨어져 지내며 내적 수양과 절대자를 향한 구도의 길을 걷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삶은 일상적인 우리들의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책을 지은 현진 스님은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수행자다운 모습이다"는 생각을 화두로 삼는다. 수행을 하는 존재가 절대자가 아닌 인간이기에 인간적인 삶을 통해 수행의 길을 걷는다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가 전하는 해인사 스님들의 이야기는 웃음을 자아내게 하면서도 수행의 길을 걷는 스님들의 대단한 정신을 엿볼 수가 있다.

"해인사가 하드웨어라면 여기에 속한 스님들은 소프트웨어다. 그렇다면 해인사는 용량과 기능이 잘 어우러진 수행 도량이다. 그래서 많은 스님들의 개성과 역할은 산중을 유지하는 일종의 네트워크다.

한편으론, 스님들이 많이 사는 만큼 이야기도 많고 배울 점도 풍부하다. 누구에게나 한 가지는 반드시 본받을 만한 부분이 있고 그 가운데 하나 정도는 깨우침을 준다. 모순과 갈등조차도 수행자의 존재 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참 행복하다. 해인사에 산다는 것이."


모순과 갈등조차 수행의 일부로 수용할 수 있는 마음, 이것이 바로 수행자의 참 자세일 것이다. 아무리 수행의 길을 걷더라도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이 해인사에 존재하기에 그 곳에 갈등과 모순이 없을 리 없다.

현진 스님은 "산사에서는 모든 일이 만행(萬行)"이라고 하면서 빨래하는 일을 통해서도 독신 수행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홀로 걸어가는 삶의 방식을 배운다고 말한다. 빨래를 할 때마다 '깨어 있다'는 의미를 떠올리고, 순간 순간의 마음을 놓치지 않는 삶의 자세.

그러기에 "누군가가 지금 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깨어 있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남과 비교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지금의 의미를 찾아내고, 그 일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며 살면 된다.

작가는 더러움이 묻어도 깨끗이 씻으면 그 먼지가 사라지는 고무신을 인간의 품성에 비유한다. 고무신 스스로가 더러워진 것이 아니라 오물이 고무신을 더럽힌 것처럼, 우리 본래의 성품은 그대로인데 번뇌와 망상이 마음을 어둡게 만든다는 것이다.

"마음 다스리는 수행이란 어려운 게 아니다. 애써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본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 올바른 태도다. 이는 약을 쓰는 일보다 건강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한 이치와 통한다. 깨침이란 따로 닦는 것이 아니라 본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깨끗하고 맑은 성품을 가진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은 수행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 모두가 가져야할 정신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깨끗한 마음을 스스로 갖추기 위해 늘 마음을 닦는 자세도 필요하다.

"기쁜 마음을 흰 구름이라고 한다면, 슬픈 마음은 먹구름이다. 그러나 둘 다 구름인 것은 똑같다. 진정한 수행은 이 구름을 지워내는 일이다. 그렇다면 기쁨과 슬픔도 그림자일 뿐 본래 마음은 아닌 것이다. 구름 없는 맑은 하늘이 본래 마음이다."

이 책에서 묘사되는 해인사 스님들의 수행은 '고행(苦行)'이라는 말이 정말 딱 어울릴 정도로 힘들면서도 기나긴 여정이다. 오랜 기간의 수행 속에 인간적인 고독을 내면화하고 참된 마음의 밝은 빛을 찾아가는 수행자들.

이 책은 그 깨어 있는 마음과 맑은 정신을 수려한 문체로 표현하기에 잔잔한 감동을 준다. 깨우침의 정신만을 강조하는 딱딱함보다 해인사 스님들의 재미있는 일상사를 통해 소박한 삶의 진실을 전하는 점 또한 현진 스님의 글이 주는 아름다움이다.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일에만 열중하라. 이것이 본래 마음이다. 본래 마음은 과거의 마음이 아니라 현재의 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본래 마음을 놓치지 않는 것이 '깨어 있는 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는 순간순간 일어나는 고통과 번뇌를 삶의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깨어 있는 인생이다."

현진 스님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꼭 스님이 되어 구도자의 길을 걸음으로써 획득되는 것은 아니라고 역설한다. 깨달음은 일상의 상황이나 조건을 주체적으로 바꾸는 수행이며, 따라서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가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그 일에 대한 미련을 털어 내는 마음의 자세. 이것이 바로 마음 비우기이며, 깨달음인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말처럼 "마음의 수행이란 긍정적인 생각들을 키우고 부정적인 생각들을 물리치는 일이다. 이 과정을 통해 진정한 내면의 변화와 행복이 찾아온다."

결국 현진 스님이 우매한 중생(衆生)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것일 게다.

세상살이는 주어진 고통보다 스스로 만든 고통이 더 많다는 것. 그러기에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어둠의 나락에서 헤매기보다, 밝고 건강한 마음으로 고통과 번뇌를 밀어내어 밝은 빛을 향해 나아가라는 것.

해인사 이야기를 통한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살아가는 일 자체가 아름다움 속에 존재한다는 작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순간 순간의 일들을 가르침으로 여길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 한 자락을 꿈꾸어 본다.

산문, 치인리 십번지

현진 지음, 열림원(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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