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의 죽음으로부터 6월 항쟁까지
1987년 1월 14일 당시, 경찰은 제헌의회 그룹 사건으로 81학번 박종운을 수배 중이었는데 그의 홍길동 같은 잠행에 약이 오를 대로 올라있었던 중이었다. 박종운은 일주일 전 종철의 하숙집에 들른 적 있었는데, 이때 종철은 손에 잡히는 대로 목도리와 마지막 남은 비상금까지 털어 그에게 건넸다. 그리하여 박종운을 향하던 화살은 종철에게 꽂히고 말았다.
긴급 연행된 종철이 끌려간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형사들로서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종철이 연행되었다는 소식이 박종운의 귀에 들어가면 또 허탕이었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지휘하에 조한경, 강진규, 이정호, 황정웅, 반금곤 등은 종철의 옷을 벗기고 물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수 차례 욕조에 머리를 밀어 넣었지만 종철은 묵묵부답으로 버틸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종철의 사지가 뻣뻣해졌다.
처음에 경찰은 “탁 하고 책상을 치니 억 하고 엎어졌다”며 후안무치로 일관했으나, 담당의사 오연상씨가 “바닥에 물이 흥건하고 고문 흔적이 있다”고 증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문공부 홍보조정실은 시급히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시달하여 '박군이 심장마비로 쇼크사한 것으로, 1단 기사 처리'하도록 했다.
분노한 학생들이 2.7, 3.3 투쟁으로 뛰쳐나왔지만 역부족이었고, 전두환 정권은 도리어 현행 대통령 간접선거(소위 체육관 선거)를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라는 초강수로 버티었다.
1987년 5월 18일, 광주항쟁 7주년 추모미사를 집전하던 김승훈 신부가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에 관련된 경관은 모두 다섯 명이며, 당국은 철저하게 이 사건을 은폐했고 그 과정 일체도 조작하여 국민을 두 번 속였습니다.”
민중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들끓는 여론은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로 모이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서는 6·10 대회 성사를 위한 학생회장들의 단식농성이 줄을 이었다.
그날은 원래 잠실체육관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코미디언 김병조의 만담까지 섞어 대회는 일사천리로 끝나고,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후보의 손을 번쩍 드는 그 순간, 전국에서 25만 명이 항쟁의 거리로 뛰쳐나왔다.
밤늦도록 계속된 시위에서 3800명이 연행되었으나 이제 시위는 명동성당에 갇힌 600명의 농성자들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로부터 6일간,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가 된다. 농성대오에게는 전국에서 후원금과 식료품이 끊임없이 답지했다. 농성 마지막 날, 공수부대가 투입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농성자들은 자발적으로 유서를 쓰며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에는 전국적으로 자그마치 백만명이 나섰으며 6월 26일의 평화대행진에는 34개 도시에서 150만명이 대열에 동참했다. 이제 경찰에게는 더 이상 쏠 최루탄이 없었다.
전경들은 곳곳에서 무장해제 당하고 시위대와 함께 ‘아침이슬’을 합창하며 울었다. ‘넥타이 부대’라고 불리는 샐러리맨들이 나서자 명동 하늘에는 수만 장의 '크리넥스' 휴지가 비둘기처럼 뿌려졌다.
미국이 먼저 상황을 파악했다. 7년 전 광주와는 달랐다. 그 땐 고립된 한 도시였지만 지금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이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군 투입은 최후의 순간에 보류되었다.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TV에 나섰고 “직선제 개헌”안을 발표했다.
후일 알려졌지만 이 선언은 양김씨의 분열을 예상한 전두환의 작품이었고, 노태우는 마지막에 가서야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30년 군부독재의 한국에서 이 정도의 양보마저도 받아내기 위해 수천 수만의 피가 땅을 적셨고, 그 피의 대가요 위대한 승리였다. 한 청년이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신의에, 민중이 호응하여 궐기하였던 것이다.
2004년 열사의 정신을 기리는 것은...
지난 17년간, 우리는 문민정부도 보고, 정권교체도 보고, 심지어 인권변호사가 대통령 당선되는 것도 보았다. 그러나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정권을 잡은 사람은 박종철의 염원이 풀렸다고 말들 하지만, 그의 목숨이 고작 세 사람의 정치가를 대통령 만드는 것이었을까.
박종철이 원하는 세상이 기껏 이 겨울에 외국인 노동자들을 명동성당에서 떨게 하는 것이라면 그는 죽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바라는 세상이 부국강병을 위해 이라크의 학살에 동참하는 것이라면 그는 차라리 선배의 이름을 불어도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의 신의를 배신한 이들의 잘못, 그 배신을 용납하고 있는 우리의 잘못이다.
이경해, 김주익, 다르카, 알리
이국에서 배를 가른 농민운동가, 크레인 위에서 목을 맨 노동자, 지하철에 몸을 던진 이주노동자, 폭격에 희생된 이라크의 아이들, 이들이 2004년의 박종철이다. 이 박종철들은 17년 전에 그랬듯이 여전히 우리의 무뎌진 양심에 가하는 채찍질이고 식은 피를 다시 데우는 불꽃이다. 박종철은 인간에 대한 신의를 지키라는 정언 명령이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평등과 자유를 다 누리기 전에는 결코 멈춰선 안 된다는 준열한 호통이다.
올해 박종철 열사의 추모제는 14일 저녁 7시에 명동성당에서 열린다. 그곳에는 불법체류자의 딱지가 붙은 이주노동자들이 단속과 추방을 피해 농성 중이다. 여기가 박종철이 있어야 할 곳이다. 박종철은 저 386 국회의원들의 홈페이지 속에서 80년대의 후일담으로 있어서는 안 된다. 박종철은 투쟁하는 양심의 소리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오준호 기자는 박종철 추모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