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외벽에 큰 글씨로 "센스 앤 센서빌리티"라고 내건 현수막이 우선 수상하다. 제목이 거창하면 필시 더 어렵고 난해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한참을 들어갈까 말까 하다가 정문에서 입장료를 보니 어른은 700원에 그나마 토요일은 무료란다.
'토요일 다시 올까' 하다가 그냥 들어가기로 했다. 원래는 전시관 안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나 학예연구실의 도움을 얻어 여기저기 눈에 띄는 것들을 담을 수 있었다.
전시관 2층에 올라서니 제일 먼저 독특한 형체의 마차 한 대가 눈에 들어온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가 만들었다는데, 참 독특하다. 말은 온통 오래된 텔레비전 부속품으로 만들어져 있고 마부 자리엔 구닥다리 텔레비전이 쉼 없이 영상을 쏟아내고 있다.
'이런 것도 예술품이 되나?' 옆을 지나가던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키득거리며 던지는 말이다. 내 시선도 여학생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짐짓 뭔가를 아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 미소도 좀 지어 보이고… 흠흠.
2층에 들어서자 유명한 제인 오스틴의 동명 소설 '센스 앤 센스빌리티'라는 제목으로 여러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흥미를 끄는 작품들이 몇 가지 보였다.
가까이 볼 때는 수많은 마릴린 먼로의 초상들이었는데 두어 걸음 물러나서 보니 한 떨기 장미가 당당하게 자리잡고 앉은 그림. '아하, 이것은 살바도르 달리가 자신 애인의 벌거벗은 뒷모습을 이용하여 링컨의 초상화를 나타낸 것과 비슷하군.' 아는 것이 하나 나오자 다소 기분이 좋아졌다.
그 전시실에는 이런 류의 작품이 여러 개 걸려 있었는데 하나를 알고 나니 나머지 작품들을 감상하기도 쉬워졌다. 이렇게 해서 전시실을 둘러보고 나니 애초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차츰차츰 전시관에 걸려 있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3층에 마련된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2003"은 잠시나마 우쭐거렸던 나를 다시금 움츠리게 만든다. 기괴한 형상들과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림들, 부조들, 조각들로 온통 넘쳐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감을 가지고 하나하나 세심하게 들여다보니 의외로 작가들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어린 시절 소풍을 가서 보물찾기를 하듯, 평면과 입체의 형상물 안에 작가가 숨겨놓은 의미들을 보물을 찾듯 하나둘씩 찾아내는 맛! 미술관에 들어간 지 한 시간, 전시관 안에 가득 들어찬 작품들이 던지는 수많은 시선들이 그제야 서서히 눈에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이 예술가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 것은 우리들 자신이 볼 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넘어서 세상에 존재하는 예술가의 수 만큼 많은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그 점에 있다" - 마르셀 프루스트
세상에는 다양한 시각들이 존재한다. 하나의 사물을 두고도 그 사물을 바라보는 눈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나름대로의 몸짓이나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미술가들이란 그런 시선들을 붓이나 물감 혹은 입체 덩어리들을 통해 표현해 내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마치 시인들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들을 이용해 아름다운 하나의 언어로 된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소설 혹은 텔레비전을 통해 간접체험을 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인 것이다.
다양한 작가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사물을 인식하는 수많은 시선들. 미술관은 그런 남의 시선들을 빌어 또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유쾌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전에 어느 무용학과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예술은 아는 만큼만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아는 만큼만 즐기면 된다."
아는 만큼의 시선으로 부산시립미술관을 방황했던 나른한 오후 한시간, 딱 700원 만큼은 아주 행복했던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사진 촬영을 허락해주신 시립미술관 학예실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